# 91
91. 우리, 결혼할 거예요 (2)
잠시 뒤, 은수와 현재의 묵직한 돌직구를 거하게 두드려 맞은 그들은 이제 당황하기보단 웃는 쪽을 택한 듯했다.
“와…… 우리 완전 깜빡 속았네?”
“어쩐지. 현재 씨가 팀장님 껌딱지였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였어!”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옛말 틀린 거 정말 하나 없다니까.”
여러 갈래의 웃음을 짓는 그들을 보며 은수와 현재는 안도의 눈빛을 교환했다.
어떻게 말하는 게 가장 좋을지 고민하다, 결국 그들이 생각한 방법은 정공법이었다. 어차피 회사에 그들과 관련된 소문이 무성한 판국이니,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가장 뒤탈이 없을 거라 여긴 것이다. 다만 은수가 고민해 온 과정은 빼고 애초부터 결혼을 전제한 사이였다는 걸로 결론짓는 게 모양새가 그나마 나아 보일 것 같다는 데 둘 다 동의했다. 사람들은 어쨌든 과정보단 결과에 더 초점을 두니까.
은수든 현재든 어느 정도 회사 내에서 쌓아 온 이미지라는 게 있었지만, 속도 위반 결혼을 하게 된 이상 그게 어느 정도 깎이는 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는 팀원들의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때, 호탕하게 웃던 김 차장이 웃음을 거두며 다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해도 해도 너무하시네, 두 분. 우리한테까지 이렇게 속여도 되는 겁니까? 섭섭하네, 좀.”
어차피 둘의 일이니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같은 팀원으로서 배신당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농담조지만 그 속엔 무른 뼈가 있다는 것을 현재도 알고 있었다. 그는 김 차장을 포함한 전체 팀원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결혼이 확실시 될 때까지는 좀 조심스러워서요. 여러분들을 속이려 했던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짧은 사과였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물론 정말로 서운하기는 했다. 하지만 영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불편한 사내 연애였을 텐데, 덜컥 임신까지 했으니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웃고는 있었지만 속으론 약간 찜찜해했던 팀원들도 그의 말에 조금 누그러졌다. 어차피 이미 지나간 얘기이고, 끝난 얘기였다. 은수와 현재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니만큼 결혼 소식은 당연히 축하해 줄 일이었다. 거기다 오늘 이렇게 사실을 알리기로 결심했을 때는 엄청난 용기가 발휘된 거였을 테고.
때문에 살짝 맘 상했던 김 차장도 현재에게 악수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
“아무튼 축하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예쁘게 잘 살아요.”
“……감사합니다.”
민희를 제외한 모두가 밝은 표정으로 한마디씩 축하 멘트를 건넸지만, 이 대리는 잠자코 뒤에 물러 서서 석연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쁜 소식인데 어째 분위기가 영…….’
아, 오늘은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이러면 또 내가 솔선수범하는 수밖에 없지.
자고로 축하는 시끌벅적해야 제맛이 나는 법이었다.
결국 이 대리는 참지 못하고 바람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 전면으로 나섰다.
“야, 경사네, 경사. 이거 소라도 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쩜 이렇게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여요.”
“그러니까요. 우리만 완전 바보 됐어요.”
“진짜 대박이네. 그래서 우리, 국수는 언제 먹는다고요?”
“맞아. 결혼식 날짜가 언제예요? 아기 때문에 당장은 좀 무리실려나?”
이 대리의 성화 덕분에 팀원들의 관심은 두 사람에게 폭발적으로 집중되었다.
좋기는 한데,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네. 민망해진 은수는 괜히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아직 날짜는 안 정해져서……. 정해지면 말씀 드릴게요.”
“아, 그래요? 그럼 결정되는 대로 알려 주시고. 햐,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워우.”
“진짜 아직도 믿기질 않네.”
이 대리를 포함해 끝없이 이어지는 팀원들의 감탄사에, 멋쩍어진 은수와 현재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이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렇게나 충격인 걸까.
그때,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박 과장이 나직하게 의견을 보태었다.
“근데, 일이 이렇게 되면 우리 팀에서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선물 같은 거라든지.”
그녀의 말에 은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한 탓이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안 하셔도 돼요. 지금까지 말씀 못 드린 것도 죄송한데.”
그러나 그런 걸 그냥 넘길 이 대리가 아니었다.
“에이, 그래도 그게 도리가 아니죠. 우리 팀에서 나온 첫 사내 커플인데.”
“그래, 그건 그러네. 뭘 하면 좋을까. 다들 생각 좀 해 보라구. 두 분도 생각 좀 해 봐요.”
“진짜 안 그러셔도 되는데…….”
은수는 곤란함에 입술을 모았다.
그래도 평소 팀워크가 돈독했던 것이 여기서도 드러나는 듯,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민희만은 그 분위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었다. 팀원들의 격렬한 반응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현재의 눈길이 문득, 열이 받아 얼굴이 빨개져 있는 그녀에게로 향했다.
“…….”
어디를 쳐다보는 거지?
현재의 눈길을 좇아가던 은수의 눈길도 그를 따라 민희에게로 닿았다.
그런데 갑자기, 현재가 민희를 향해 불쑥 말을 걸었다.
“저번에 회식 때 보니까, 민희 씨 노래 실력이 꽤 수준급이시던데.”
“……네?”
갑작스레 불린 제 이름에 놀란 눈이 된 민희가 그를 쳐다보았다.
현재는 그런 그녀에게 그저 담백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결혼 선물이 별게 있나요. 다른 건 됐고…… 저희가 축가를 부탁할 곳이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축가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민희 씨를 필두로 해서.”
……축가?
이건 미리 상의하지 않았던 얘기였다. 모조리 함께 고민하고 말하기로 했으면서 갑자기 축가는 웬 축가…….
은수가 저도 모르게 그를 멍하니 쳐다본 순간, 현재가 그런 그녀를 향해 씩 웃으며 깜빡 윙크를 했다.
갑작스런 윙크에 당황한 그녀는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왜 저러지?’
그러나 잠시 뒤, 그제야 은수는 현재의 의도를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잠깐, 이 남자가 지금…….
“……허…….”
뭐야, 이거 완전 엿 먹이기잖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 사람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와 민희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은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하기야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을 텐데, 난 왜 이 사람이 하나도 모를 거라고만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었지만, 은수는 답답했던 속이 한순간 절로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민희 씨가 노래를 그렇게 잘해? 난 왜 몰랐지?”
“그야, 차장님이 매번 술 땜에 제정신이 아니셨으니까 그렇죠. 우린 다 알고 있었는데.”
“나참, 내가 뭘 그렇게 마셨다고!”
“…….”
온통 시끌벅적한 가운데서, 민희는 뭐라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내내 짝사랑하던 상대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른다, 라. 그것도 다름 아닌 현재의 제안으로……. 은수에게는 정말 기가 막힌 복수임에 틀림없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 민희는 당장 싫다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얄궂게도 그녀를 제외한 다른 팀원들이 그 제안을 반기고 나섰다.
“아무튼 좋네, 그거! 우리 팀에서 축가 불러 주면 선물 생략해도 되는 겁니까?”
“생략이 아니라, 그게 저희한테는 선물인 거죠. 그렇죠, 팀장님?”
“……어, 네. 그럼요. 엄청나게 큰 선물이지…….”
엉겁결에 은수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이 대리가 일사천리로 마무리를 지었다.
“오케이. 그럼 민희 씨가 대표로 좀 준비해 봐. 우리 다 도와줄 테니까.”
“……네?”
단번에 난처한 눈빛이 된 민희가 눈동자를 굴렸다.
“……어, 네…….”
대답하는 목소리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상사의 말이라 싫다고 할 수도 없고…….
울긋불긋하던 얼굴이 어느새 죽상을 하고 있는 걸 보며 은수는 사이다 한 병을 마신 것처럼 속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상한 축가를 준비해 오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조금 들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어쨌든 도현재는 내 것인 걸.
은수는 자꾸만 슬금슬금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아 내야 했다.
‘이쯤 하면 다 끝난 거겠지.’
언제까지 여기서 노닥거릴 순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은수는 ‘사랑에 빠진 여자’에서 ‘팀장’의 신분으로 빠르게 복귀해, 서둘러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자, 이제 그만들 하고 일해야죠? 다 제자리로 돌아가세요. 암튼,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축하드립니다, 팀장님. 현재 씨도요.”
“감사합니다.”
“민희 씨도…… 고마워요.”
“…….”
민희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겉으로는 맘 좋은 상사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고소해하고 있을 은수의 속내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다른 팀원들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은수의 얼굴을 힐끔 살피는 현재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 * *
현재와 은수가 결혼을 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회사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막상 그들이 정말로 결혼을 한다고 선포해 버리자 쉬쉬하며 퍼지고 있던 불미스러운 소문들은 우습게도 거짓말처럼 모두 사그라졌다.
물론 이번 선포가 또 다른 소문을 낳기는 했다. 민은수 팀장이 임신을 빌미로 도현재를 협박했다느니, 혹은 민은수 팀장이 도현재를 잡고 산다느니, 그래서 도현재가 민은수에게 껌뻑 죽는다느니 하는 소문들. 그것을 전해 들은 은수는 득달같이 현재에게 따지듯 일렀다. 어차피 사실이 아니니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하필이면 인기남인 당신을 만나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런 은수의 말을 듣고도 그저 어이없다는 듯 웃기만 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앞에 두 개는 틀렸는데, 마지막은 맞는 말이네요.”
“네? 뭐가요?”
“나 은수 씨한테 껌뻑 죽는 거 맞잖아요.”
“…….”
은수는 ‘또, 또 느끼한 말 한다.’며 그를 구박했지만,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은수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물론 힘들 그를 생각해 웬만하면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은수였지만, 현재는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진정으로 그럴 용의가 있었다.
이 길만 해도 그랬다. 지난 몇 달 동안 얼마나 자주 오간 길인지, 이제는 내비게이션 따위 없이도 기막히게 제일 빠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재주까지 생겼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현재는 한산하다 싶은 도로를 두리번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신호가 바뀌고 다시 출발을 했지만, 그의 시선은 이따금씩 조수석으로 향했다. 케이크 상자와 그 옆에 놓인,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는 작은 종이 가방.
오늘은 그들이 함께한 뒤 처음으로 맞는 은수의 생일이었다.
“……흐음.”
은수 씨가 좋아하려나.
큰 눈동자가 떼구르르 굴렀다. 사실 그도 확신은 없었다. 여자를 위해 생일 선물을 고르기는 처음이라, 매장 직원의 도움을 받아 심사숙고 끝에 겨우 고른 것이었으니까.
그녀의 취향에 맞춰 심플한 디자인의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샀다. 다른 좋은 선물들도 많이 떠올려 보기는 했지만, 임신을 한 이후로 급격히 여성스러움을 잃어 가는 것 같다며 실망스러워하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 탓이었다.
이런 예쁜 액세서리를 선물하면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가 임신 때문에 제약을 받게 된 것이 늘 안타까웠던 그였다. 지금 당장은 좀 힘들더라도, 나중에 별이를 낳은 뒤에는 얼마든지 멋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더 많은 것을 선물해 주어야지. 그녀가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게.
은수에게 어울릴 만한 소품을 찾으려고 매장 몇 군데를 돌아다녀야 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선물을 받고 좋아할 그녀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났으니까.
차가 막히지 않은 덕분에 예상보다 더 빨리 동네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은수의 집 앞 골목길을 서행하며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현재는 언뜻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