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 우리, 결혼할 거예요 (1)
“박 과장님.”
“어, 민희 씨. 왜.”
보통 이 시간쯤이면 사무실엔 은수 혹은 현재가 도착해 있었지만, 오늘 아침엔 웬일인지 박 과장과 민희 두 명뿐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상쩍게 왜 저런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걸까.
안경을 낀 박 과장의 눈이 반대편 컴퓨터 너머에서 심각해져 있는 민희의 얼굴을 일견했다.
“혹시요…….”
“혹시? 혹시 뭐.”
민희는 누가 듣기라도 할까, 잔뜩 소리를 낮추고 박 과장을 향해 속삭였다.
“팀장님이랑 현재 씨…… 뭔가 있다는 생각 안 드세요?”
타이핑을 하던 그녀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박 과장이 마침내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민희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입이 근질근질해 말을 참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민희는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결국 입 안에 담아 두었던 말을 한바탕 꺼내어 놓았다.
“실은요. 제가 얼마 전에 법무팀 아는 애한테서 들었거든요. 마케팅 1팀 민은수 팀장이랑 사원 도현재랑 뭐 있는 거 아니냐고…….”
“……그래? 왜?”
박 과장에게서 약간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민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왠지 모르겠는데 그쪽에선 이미 유명한가 보더라고요. 솔직히, 둘이 유난히 가깝게 지낸 건 사실이잖아요.”
민희의 은근한 말투에도 박 과장은 아무렇지 않은 듯 천천히 타이핑을 재개하며 말했다.
“그야 팀장님은 원래 일 잘하는 부하 직원 예뻐하시기로 유명하잖아. 도현재 씨는 인기남이기 이전에 일 잘하는 직원이고. 난 이상할 게 전혀 없다고 보는데?”
그러나 민희는 필요 이상으로 펄쩍 뛰었다.
“완전 이상하죠! 아니, 둘이 나이 차가 몇 살인데. 게다가 그런 꽃미남 총각이랑…… 그게 안 이상해요?”
“…….”
“소문으로는 둘이 출퇴근도 같이 한대요. 비상구 같은 데서 조용히 얘기하는 걸 들은 사람도 있다던데요?”
“……민희 씨는 대체 그런 소문을 어디서 듣고 오는 거야?”
“뭐, 다 여기저기서 주워듣는 거죠.”
박 과장은 옆에 놓아두었던 차를 들이켜며, 다소 멋쩍어하는 듯한 민희의 얼굴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한때는 그녀도 둘의 사이를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금의 민희처럼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선남선녀인 두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그게 정말로 실현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민희의 얘기로 미루어 봤을 때, 그들은 이제 슬슬 다른 팀원들에게도 조금씩 꼬리가 밟히고 있는 중인 듯했다.
박 과장은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아예 모른 척할 수는 없고, 대신 사실이 아니라는 뉘앙스만 적당히 풍기기로 했다. 저절로 밝혀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예의상 쉴드는 좀 쳐 줘야지. 그러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해서, 그녀는 매우 무심한 어조로 입술을 떼었다.
“팀장님이랑 현재 씨가 유난히 가깝긴 했지만, 그것도 솔직히 말하면 일방적인 거였지. 현재 씨가 팀장님 바라기잖아.”
“……바라기는 무슨 바라기예요. 그냥 현재 씨가 워낙 착하니까 그런 거지!”
평소 박 과장은 다소 얄미운 타입의 민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굳이 그들의 관계를 부정하려 드는 것을 보니 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네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 게 다 사실인 줄도 모르고. 쯧쯧. 애먼 데 쫓다가 지붕 쳐다 볼 일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민희 씨가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게밖에 안 보일걸? 현재 씨가 팀장님한테 쩔쩔매면 모를까, 팀장님은 절대 아니지.”
“……그럼 더 큰일이죠! 현재 씨가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건데!”
어이구, 참.
유부녀로서의 경험으로 볼 때 저런 경우는 다 일방적인 삽질로 끝날 뿐이었다. 그건 꼭 임자가 존재하는 현재 같은 대상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서 김칫국을 마시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를 보지도 못하는 양, 민희는 꿋꿋하게 말했다.
“암튼, 분명히 뭔가 있어요. 얼마 전부터는 둘이 유난히 조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증거를 잡아야 되는데.”
증말 가지가지 하네. 박 과장은 일부러 코웃음을 터뜨렸다.
“민희 씨가 그걸 왜 잡아. 잡으면 또 뭘 하게. 일은 안 하고 이상한 데 신경 쓸 거야, 자꾸?”
“아, 이건 중대한 문제라니까요!”
안 되겠다. 이대로 놔두다간 정말로 큰일을 칠지도.
다른 덴 그닥이지만 현재 쪽으로는 무척 집요한 민희였기에 혹시 모를 일이었다.
“민희 씨.”
상사로서 진지하고 엄숙하게 한마디를 하려는데, 마침 우연히 출근을 함께한 듯한 은수와 현재가 나란히 사무실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황급히 입을 다문 채 일하느라 바쁜 척하는 민희를 뒤로하고, 박 과장은 매우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웬일로 같이 들어오세요? 요 앞에서 만나신 거예요?”
“아, 아뇨. 현재 씨가 데려다줬어요.”
“아, 그래요?”
“…….”
그 순간, ‘거 봐요. 제가 이상하다고 했죠?’라고 말하는 듯한 민희의 눈길이 박 과장에게 몰래 날아와 박혔다.
“…….”
등잔 밑이 어두울 거라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민희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티 내는 건 정말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 사람들은 조심할 생각은 않고 대놓고 뭐 하는 거야. 홀로 고민에 빠지게 된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어쩐지 긴장한 것 같은 은수는 그런 것 따윈 전혀 안중에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사무실 안을 짧게 훑어보던 은수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출근은…… 다들 아직인가 봐요.”
“네. 이제 곧 다들 올 시간이긴 한데…….”
아니나 다를까. 박 과장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인 모를 시끌벅적한 소음들이 바깥에서 조금씩 전해져 왔다. 소음의 크기상 아무래도 출근길에 만난 팀원들이 다 함께 우르르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 사람들도 양반은 못 되는구만. 박 과장에게서 피식 웃음이 흘렀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니까! 진짜 별일이 다 있……. 어?”
그런데 사이좋게 사무실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입구 앞에 멀거니 서 있는 은수와 현재를 발견하곤 하나같이 의아한 눈초리를 했다. 그걸 재빨리 캐치한 은수가 현재에게 살짝 눈짓했고, 작게 미소를 지은 그가 그들에게 먼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어, 현재 씨도 굿모닝.”
“굿모닝.”
이 대리와 김 차장, 태섭 등이 밝게 인사했다. 한데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도 현재와 은수는 평소처럼 일할 준비를 하러 가기는커녕 그 자리에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고, 이 대리와 박 과장은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뭐 하려고 저래?
“……근데, 팀장님이랑 현재 씨는 왜 거기서……?”
불안한 것은 은수 쪽도 매한가지였다.
거사를 앞두고 마음을 애써 다독인 은수는 현재를 대신해 차분히 대답했다.
“별건 아니고…… 우리 팀원들한테 공지할 사항이 하나 있어서요.”
“……아, 그럼 얼른 말씀하세요. 현재 씨는 얼른 이리 와서 자리에 앉고.”
팀원들은 으레 그랬듯 업무와 관련된 공지를 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자리를 찾아가며 툭 던진 태섭의 말에, 은수의 팔은 본능적으로 현재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뇨. 업무랑은 관련이 없는 얘기예요. 현재 씨랑은…… 관련이 있는 얘기구요.”
“……네?”
……이게 무슨 소리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말에 팀원들 전체가 은수와 현재를 주목했다. 은수의 눈이 팀원들의 동태를 재빨리 살폈다.
가만 보자. 유라 씨가 아직 안 왔네. 어떡하지, 조금 더 있다 말해야 하나……?
적당한 타이밍이 언제일지를 가늠하며 무작정 서 있는데, 그런 은수의 귓가로 현재의 진중한 목소리가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임에도 실제로 듣는 것은 그 여파가 상당했다.
“저희, 결혼합니다.”
다이너마이트. 아니, 그건 핵폭탄이었다.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사무실 안이 쥐 죽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방금 전 그가 한 말을 자신이 제대로 알아듣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다들 놀란 얼굴로 눈치만 보는 가운데, 황당한 얼굴을 김 차장이 현재와 은수를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예??????”
그래, 이게 정상이지. 당연한 거야…….
멋대로 날뛰는 마음을 진정하려 노력하며, 은수가 현재의 말을 다시 정리했다.
“네. 현재 씨 말대로 저희…… 결혼할 예정이에요.”
“…….”
“…….”
저, 저게 지금 무슨 소리야?
한순간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민희의 미간 위로 단숨에 빗금이 쫙쫙 그어졌다.
“아, 아니, 잠깐만요. 그럼…… 팀장님 아이는요? 현재 씨가 애 아빠가 된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의식의 흐름에 따른 민희의 질문에 답한 건 은수가 아니라 현재였다.
현재가 직접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민희가 당황한 목소리로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팀장님이랑 현재 씨랑 결혼을 하면 원래 애 아빠는…….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왜 멀쩡한 친아빠를 두고 두 분이…….”
“……통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네요.”
장황하게 늘어지는 말들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투.
은수의 배를 슥 한번 쳐다본 현재가 당연한 진리를 말하듯 낭랑하게 대답했다.
“제가 애 아빠인데요, 원래부터.”
“……!!!”
그 말에 놀란 건 민희뿐만이 아니였지만, 얼굴이 볼썽사납게 구겨진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민희를 제외하고는 모두 웅성거리며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뒤편에서 관망하고 있던 이 대리와 박 과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그 상자를 여는구만. 이제 그럴 때도 되기는 했지.
“……뭐야, 그럼……?”
“이야, 현재 씨.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럼 뭐예요. 처음부터 두 사람, 연애 중이었던 거예요?”
“……뭐, 그런 셈이죠.”
은수가 수줍게 중얼거리자, 그를 통해 마침내 이것이 모두 사실이란 것을 팀원 전체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늘 사무적이기만 하던 팀장이 저런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을 하고, 저런 대답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이 모든 게 사실이지 않고서야 민은수 팀장이 저럴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