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 예행연습
그가 그녀의 앞으로 의기양양하게 데리고 온 것은,
“어머!”
바로 흰색 털과 갈색 털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포메라니안 강아지 한 마리였다. 그가 예전에 키운다고 했었던 그 강아지였다. 그것은 낯선 사람 앞에서 커다란 동공을 이리저리 굴리며 헉헉거렸다.
“헐…….”
아니나 다를까, 그의 품 안에서 강아지를 발견한 은수는 금세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감탄사가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다.
“와, 너무 예쁘다. 어떡해……. 진짜 너무 귀엽다!”
그녀의 반응을 이미 빤히 예상하고 있던 현재가 약간 우쭐대며 말했다.
“저번부터 한번 보여 주려고 생각했었는데, 계속 까먹어 버렸네요.”
“아, 진짜. 이렇게 귀여운 걸 이제 보여 주면 어떡해요!”
좋기는 엄청 좋은 모양이네. 늦게 보여 줬다고 이렇게 짜증까지 내는 걸 보면.
현재는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기뻐하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헤실거리던 은수가 별안간 제 손을 꼭 말아 쥐더니 강아지의 코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어?’
그리고 그걸 목격한 현재는 문득 깜짝 놀랐다.
“어. 그거, 알아요?”
“뭐요?”
“강아지들한테 맨 처음 냄새부터 맡게 하는 거요. 그거 잘 모르는 사람 많은데.”
아무리 말 못 하는 강아지라고 해도 처음부터 무턱대고 쓰다듬고 간질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방금 전 은수가 한 행동은 낯선 강아지를 만났을 때 해야 하는 당연한 매너였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그는 상당히 의외로 느껴졌다. 더구나 개를 키워 본 적도 없다면서.
하지만 그녀는 뭔 새삼스러운 얘기를 하냐는 듯 씩 웃었다.
“아, 이거요?”
“…….”
“이거야 당연히 알죠. 길 가다 예쁜 강아지들 보면 다 이렇게 하구 그랬어요. 키우지만 않았다 뿐이지 알 건 다 안다구요. 내가 개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
“근데, 이름이 뭐예요?”
“……도현재요.”
순간, 그녀의 눈초리가 그를 휙 째렸다. 누가 지금 그거 물어보나.
“그쪽 이름 말구요. 얘요, 얘.”
하하하. 장난인데 안 먹히네. 멋쩍게 웃은 그가 대답했다.
“‘토리’예요.”
“토리? 왜 토리예요?”
“이리저리 빨빨 돌아다니는 게 외로운 도토리 같다고. 또 털 색깔도 갈색이 섞였잖아요.”
풉, 은수의 입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어째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아서.
그러고 보니 정말 ‘토리’같이 생겼네.
토리는 귀가 쫑긋 솟아 있는 게 꼭 사막여우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곰 인형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녀가 근래 본 것 중 가장 귀여운 생명체였다.
제 냄새를 충분히 맡게 한 그녀는 이제 강아지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자 토리는 그에 화답하듯 조그만 혀를 내어 그녀의 손바닥을 슥 핥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핥았다.”
“얘 원래 잘 핥아요. 오만 거 다 핥고 다녀요.”
“아…… 근데 되게 안 짖네요. 조용하다.”
“밖에선 좀 안 짖는 편이에요. 집에선 잘 짖고. 얼마나 시끄러운데.”
“아아, 너도 낯을 좀 가리는가 보구나?”
강아지와 노닥거리다 보니, 그녀는 종일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한순간에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여간 그녀를 위해서라면 밤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 같은 남자였다. 늘 고맙기만 한 사람. 이런 식으로 기분을 풀어 줄 줄 누가 알았을까. 생각 하나도 참 남달랐다.
“생각도 못 했는데…… 진짜 고마워요.”
“고맙긴요. 그냥 산책시킬 겸 집에 있는 애 데리고 나온 것뿐인데.”
“…….”
하지만 그런 그가 고마우면서도 그녀는 그가 너무 넘치게 잘해 주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저는 늘 그에 못 미치는 것 같아 약간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누가 들으면 이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하겠지만…….
“…….”
그래도 앞으로 시간은 무진장 많으니까. 언젠간 나도 얼마든지 보답할 수 있겠지. 나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그렇게 잠시 남자와 토리를 번갈아 보던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럼 진짜 산책 가요. 내가 시켜 주고 싶어요.”
* * *
더운 여름밤. 근처의 공원은 사람이 꽤 있는 편이긴 했지만 나름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풀벌레 소리를 배경음 삼아 그들은 잰 걸음으로 활보하는 토리와 함께 천천히 공원을 돌았다. 목줄을 매고도 토리는 매우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손을 꼭 맞잡은 채였다. 비록 살짝 더운 온도였지만, 촉촉한 살갗이 닿는 느낌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기만 했다.
“현재 씨 덕분에 내가 강아지 산책도 시켜 보고…… 신기하네요.”
그녀의 말에 그가 씩 웃고는 대꾸했다.
“원하면 매일매일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은수 씨가 힘들겠지만.”
“음……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일석이조네요. 산책도 시키고, 운동도 하고. 임산부도 적당한 운동이 필요하다잖아요. 일하느라 너무 앉아만 있는데 잘됐네.”
……말이 많아진 걸 보니 평소의 그녀로 돌아온 것 같은데.
은수의 눈치를 힐끔 본 그가 물었다.
“기분은 좀 나아진 것 같아요?”
“그럼요. 아까 벌써 풀 충전 완료됐어요.”
역시, 나로는 안 되는 게 얘로는 되는군. 그의 얼굴이 살짝 불만스럽게 변했다.
“저번에도 느꼈는데, 은수 씬 나보다 강아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
뭐야, 설마 개한테 질투하는 건가……?
홀린 듯 토리의 뒤꽁무니를 좇던 그녀가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질투할 데가 없어서 개한테 질투를 해요?”
“…….”
“그냥 너무 귀여우니까 그런 거고……. 좋은 건 당연히 현재 씨가 더 좋죠.”
“정말요?”
“그럼요!”
말해 봐야 입 아프지. 당연한 걸.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가던 중, 그들은 벤치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다지 먼 거리를 걸은 건 아니었지만 혹시나 그녀가 힘들어할까, 그는 자연스레 은수의 손을 잡아끌어 벤치에 함께 앉았다.
“잠깐만 쉬었다 가요. 무리하면 안 되니까.”
“아, 네.”
그들의 눈이 각자 정면에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
모두 자신들과 달리 집에서 막 나온 듯 편한 차림새였다. 그도 그럴 게, 여기는 편하게 나오기 좋은 집 근처 공원이었으니까. 이런 차림은 아무래도 튈 수밖에 없는 장소.
덕분에 그들은 약간 민망해졌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갖춰 입고 있는 건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옷이라도 갈아입고 올 걸 그랬나.”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여기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긴 뭐 그래도 옷차림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사실 옷보다는 단란한 분위기가 더 눈에 들어왔다. 가족 단위로 나와 사이좋게 산책하는 모습,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함께 나온 부부…… 지금 그들처럼 애완동물과 함께 뛰노는 아이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은수는 문득 자신과 현재가 결혼한 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별이를 사이에 둔 채 양옆으로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와 그녀.
아직 잘 그려지지도 않는 그 모습을 떠올리자, 그녀의 눈이 절로 애틋해졌다.
“현재 씨.”
“네?”
“우리 나중에 결혼하면 꼭 강아지 하나 길러요.”
“은수 씨 강아지 키우는 거 싫다고 하지 않았어요?”
“에이, 그건 나 혼자 살 때 얘기죠. 그땐 현재 씨도 있고, 또 우리 별이도 있을 테니까.”
“…….”
이젠 그녀가 그와의 미래를 생각하는 게 그리 어색한 일도 아니건만, 그는 매번 이상하게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이건 언제쯤이면 아무렇지 않게 될 수 있을지.
“그럼, 종은요?”
“음,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말티즈? 요키?”
“말티즈 괜찮네요. 보편적으로 많이 키우는 거니까.”
“그럼 말티즈로 하죠, 뭐. 수컷보단 암컷이 좋겠죠?”
“글쎄요. 별반 차이 없지 않을까요.”
아직 결혼조차 안 했는데, 벌써부터 애완동물을 키울 생각에 열중하고 있다니.
현재는 그런 그녀가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이게 뭐라고, 이게 이렇게 사랑스러울 일인가.
차라리 확 보쌈해서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맘 놓고 서로만 볼 수 있을 텐데.
“……아, 빨리 결혼하고 싶다.”
“……네?”
의아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여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은수를 제 품에 살짝 끌어안으며, 현재는 녹아들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요, 은수 씨랑.”
“…….”
“매일 아침 은수 씨랑 같이 눈뜨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잠들고…….”
“…….”
“그랬으면 좋겠다, 하루빨리.”
얼떨결에 안기게 된 그녀의 얼굴이 대번 수줍어졌다. 그의 허리춤에 놓인 그녀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나두요.”
“…….”
“현재 씨랑 같이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서 그게 좀 싫기는 한데.”
“…….”
“그래도……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큰일이야.”
그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찡하게 울렸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은수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속상하거나 힘든 일 있으면 담아 두지 말고 오늘처럼 꼭 말해야 돼요. 그래야 내가 강아지를 대령하든 뭘 하든 어떻게 해 주죠.”
“……네.”
“요즘 나 회사에서 진짜 죽을 맛인 거 알아요?”
“……왜요?”
“계속 이렇게 안고 있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같이 앉아서 일을 할 수도 없고.”
……하여튼 못 말려. 팔불출. 은수의 고개가 절로 흔들렸다.
“요즘 같은 때에 계속 이러고 있음 땀띠 나요.”
“괜찮은데, 땀띠 나도.”
“……한번 크게 고생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쯧쯧. 그녀의 혀 차는 소리에, 그에게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남 눈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그런 건 회사에서도 충분히 많이 했으니까.
그러다 그가 불쑥 말했다.
“내 인내심이 여기서 또 드러나는 것 같은데.”
“…….”
“우리 이제 그만 공식적으로 밝히는 게 어때요?”
밝힌다니. 뭘 밝히자는 걸까?
그녀가 고개를 뒤로 빼어 그를 쳐다보았다.
“……밝혀요?”
“네.”
빙긋 웃은 그가 마침내 덧붙였다.
“이제부터 은수 씨, 공식적으로 내 거 하자고요.”
“…….”
“괜히 둘 다 이상한 오해 받는 것도 싫고, 오늘처럼 은수 씨 혼자 힘들게 만드는 것도 싫어요. 당당하게, 이 아이가 내 아이다, 이 여자가 내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
아니, 저게 언제 적 드라마 대사야.
은수가 순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는데, 그가 무척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정말로 밝혀요, 우리.”
“…….”
“내가 은수 씨 아이의 아빠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어요.”
“…….”
“그래도 되죠.”
그제야 그녀는 그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조만간 밝혀져야 할 일이었다. 아이 아빠도 밝히지 않고 결혼 소식을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어차피 밝혀질 거라면 그가 원하는 대로 일찍 말하는 게 나을지도…….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
하지만 잠시 뒤, 그녀는 마침내 눈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명백한 예스였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그는 어김없이 하회탈이 되었다.
“…….”
말없이 기쁨에 찬 그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끌어안으려던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저기요.”
웬 아주머니였다. 그것도 매우 떨떠름한 얼굴을 한.
“……?”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 얘 지금 똥 싸는 것 같은데.”
“……네?!”
“봐 봐요.”
그게 무슨…….
“…….”
“…….”
그들은 그제야 토리가 옆에서 활발한 배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니, 심지어 싸기도 무척 시원하게 싸잖아. 끄응거리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금방 치울게요.”
참, 진짜 별일이 다 있네.
두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얼른 일어나 챙겨 온 봉지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왜 우리는 꼭 마지막엔 이렇게 무드가 없이 끝이 날까.
두고두고 미스터리라고밖엔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