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 여자도 강하고, 엄마도 강하다 (2)
지훈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용히 은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사실 마지막 말이 좀 감동적이긴 했다. 짜증나게.
그런데 심각한 얼굴로 한참을 읊조리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별안간 입가에 미소를 띠더니, 말을 덧붙였다.
“근데 그 사람이 그러더라.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는 말라고. 내가 일을 얼마나 좋아하고 잘하는지 아니까, 자기가 물심양면으로 도우겠다고.”
“……도현재 씨가?”
“응.”
“…….”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내 남은 인생을 맡겨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를 믿어 보겠다는 확고한 마음.
그리 말하는 여자의 얼굴엔 이 세상 모든 행복이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한 그조차도 미처 안겨 주지를 못했던, 그 행복이.
“…….”
덕분에 지훈은 전에 없이 비참해졌지만, 제 표정이 어떤지 모르고 있는 은수는 그런 그의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날짜는…… 아직 기약 없어. 그치만 언젠간 할 테니까, 내가 이런 맘이라는 걸 지훈 씨는 알아야 할 것 같았어.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훈은 이제 그들의 관계에 있어 저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려 줘서 고맙다. 어차피 결혼식은 못 가겠지만.”
“…….”
“……어쨌든, 준비 잘하고. 몸도 신경 쓰고…….”
“……지훈 씨.”
무턱대고 그의 이름을 부른 은수는 말을 내뱉기 전, 잠시 머뭇거렸다.
이제는 정말…… 맘속에서 그를 완전히 떠나보내야 할 순간이었으니까.
“이제껏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
“고마웠어, 진심으로.”
지훈의 눈빛이 잠시 일렁였다.
“3년 동안 날 많이 사랑해 줘서. 또…… 결혼하자고까지 말해 줘서.”
“…….”
“정말 고맙다고…… 꼭 말해 주고 싶었어.”
‘진심’을 말하는 그녀의 미소엔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지훈의 입술 끝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마친 그녀는 먼저 자리를 뜰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지훈의 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맞닿았다. 은수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채였다.
“…….”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녀의 미소에서 이것이 ‘마지막’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애틋하게 이지러졌다.
“지훈 씨도 누군가한테는…… 인생을 맡겨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 지훈 씨에게도 그러고 싶은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고.”
“…….”
“지금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야.”
당신이 부디 행복해질 수 있기를. 가능하다면 지금의 나보다도 더.
* * *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를 뒤로하고, 문틈 새로 빼꼼이 고개를 내민 은수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저, 이사님.”
“어, 민 팀장.”
안경을 낀 채 뭔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김 이사가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어서 와. 여기 앉게.”
“예.”
공손하게 목례를 한 은수는 응접용 테이블 쪽에 자리를 잡았고, 김 이사도 텀블러를 든 채 은수의 옆으로 다가왔다.
“마실 거라도……? 커피는 당연히 안 될 테고.”
“괜찮습니다. 어차피 길게 있을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 요즘 일은 좀 어때. 바빠서 힘들진 않나.”
“아닙니다. 덕분에 잘 처리해 나가고 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소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끝나고, 김 이사는 무거운 안경을 벗으며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 나를 찾았다고.”
“…….”
“무슨 일인가.”
처음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수십 번 생각해 온 순간이지만, 막상 맞닥뜨리니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
“…….”
“제가 이제 조만간 휴직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의논 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드디어 올 게 왔군.
김 이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그래, 그렇겠지. 슬슬 몸 생각해야 할 때니까.”
“…….”
“대체자는 누굴 생각하고 있나.”
“……저희 팀 김 차장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아, 김성권 차장.”
“예.”
“당사자와 얘기된 건가?”
“예, 물론입니다.”
“……흐음.”
김 이사가 고심하는 듯 턱을 문질렀다.
김성권 차장은 그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물론 물망에 오른 이는 그 말고도 여럿이 있었지만, 개중에선 그래도 전임자가 추천하는 인물이 가장 나을 것이었다.
그의 눈치를 보던 은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인수인계는 최대한 성실하게 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업무에 지장을 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송구스러워하는 은수의 말에 김 이사는 손을 내저었다.
“음. 아니야, 아니야. 지금껏 민 팀장 덕에 우리 회사가 득 본 게 얼만데.”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영광입니다.”
“……저, 그런데 민 팀장.”
“…….”
“차후 복직은 어떤 식으로 하고 싶은 건가.”
사실 휴직 자체는 별 문제될 것이 없었다. 대체자만 구해지면 회사 업무 자체는 어떻게든 굴러가게 되어 있는 거니까.
문제는 복직. 그녀가 다시 마케팅 1팀 팀장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가, 그것이었다.
은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야…… 당연히 지금과 같은 마케팅 1팀 팀장으로 복귀하고 싶습니다. 가능만 하다면요.”
“흠…… 그래.”
“…….”
“사실, 회사 차원에서도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이긴 하네. 지금껏 육아 휴직을 쓴 여직원들이 있기는 했어도 민 팀장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
……당연히 처음일 수밖에.
이 회사는 나름 여직원 복지에 특화된 회사로서 최대한 공정하고 평등한 인사 관리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었지만, 그것도 최대 과장급까지였을 뿐 팀장을 여성으로 기용한 예는 은수가 처음이었다. 그런 파격적인 인사가 가능했던 것도 다 은수가 결혼 생각이 전혀 없는─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직원이었기 때문임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로 결론은, 지금 그녀에겐 비빌 언덕이 하나도 없어진 상태라는 것. 고개를 숙인 그녀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민 팀장을 신뢰한 건 승진 전부터 보여 줬던 한결같은 성실성 때문이었어. 어찌 보면 우리 회사에서 제일 중요한 부서를 민 팀장에게 맡겨 놓은 것도 그 때문이고. 자네도 알고 있지?”
“……예.”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겠네. 민 팀장도 그게 편할 테니.”
“…….”
“지금 우리 회사 사정상, 복직 후에도 같은 직급과 부서를 유지시켜 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네. 아니, 못 하네. 요즘은 워낙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하는 추세이지 않나. 그 사이에 누가 또 치고 올라올지 모르는 일이고.”
“…….”
“또, 민 팀장이 다시 돌아와 자리를 채우게 되면…… 그 자리에 있던 김 차장은 자연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도 있는 거고. 기껏 체계 잡아 놓았는데 또 팀장이 바뀐다고 하면 팀원들부터 꺼려 할 수도 있어.”
“…….”
김 이사의 말은 하나하나 틀린 말이 전혀 없어서, 차마 반박할 수도 없었다. 만약 그녀가 팀원의 입장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인정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제 처지가.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가 울컥, 하고 터지는 느낌이었다. 산처럼 부른 배가 왠지 모르게 콕콕 뭉치며 아파 왔다.
“민 팀장이 회사에 헌신하고 기여한 바가 큰 만큼 최대한으로 배려해 보겠지만, 누군가는 그걸 특혜로 보고 항의할 수도 있는 일이네. 여러모로 조심스럽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압니다.”
“그래. 너무 서운하게 듣지는 말았으면 좋겠네. 나도 민 팀장 같은 인재를 허무하게 놓치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야.”
“…….”
“아무튼 알겠으니 휴직할 때까지 몸조리 잘하고, 다음에 또다시 얘기하자고.”
“예.”
뜨거워진 눈시울을 어떻게든 힘을 주어 참아 내며, 은수는 애써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은 확실히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아픈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 * *
“은수 씨.”
“……네.”
“목소리에 힘이 없네요.”
“……그래요?”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길. 잠자코 운전을 하던 현재가 조수석에 흐물흐물하게 앉아 있는 그녀를 힐끗 보았다. 꼭 빨랫줄에 널어놓은 오징어 같은 자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오징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덧붙였다.
“잘 봤어요. 목소리만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몸 자체에 힘이 없는 거니까.”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 있었지.
대답할 여력도 잘 나지 않는 느낌이었지만, 은수는 겨우 힘을 내어 천천히 중얼거렸다.
“오늘 오전에 육아 휴직 때문에 이사님한테 갔었거든요.”
“아…… 그래서 잠깐 자리에 없었구나.”
“…….”
“뭐라고 하세요, 이사님이?”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안전벨트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꽤 길게 말씀하셨는데. 음, 요약하자면…….”
“…….”
“네가 좋은 인재인 건 맞지만 하루가 다르게 일 잘하는 사람이 늘고 있고, 그래서 복직 후에도 너에게 지금과 똑같은 자리를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또 만약 네가 다시 돌아온다 해도 팀원들로부터 반감을 살 수 있을 거다. 그건 회사 입장에서 어찌할 수가 없다.”
“…….”
“이걸 되게 되게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더라구요.”
내 입으로 이렇게 다시 한 번 정리하니까 또 새삼 맘 아프네. 그녀의 한숨에 자조적인 웃음이 섞여 나왔다.
“솔직히 다 알고 간 거지만…… 그래도 막상 들으니까 기분이 별로였어요. 애 가진 게 무슨 죄도 아닌데.”
“…….”
“나도 내 자신이 이기적인 거 아는데, 그래도 일단은 둘 다 잘해 보고 싶거든요. 팀장이든 엄마든 최선을 다해 보고 싶어요.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
“근데 그 기회조차 없어질 수 있다고 하니까…… 좀 그래요. 내 맘이 어떤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
어쩐지 오전부터 이상하게 저기압에다 울상이다 했더니. 매사에 긍정적인 편인 그녀가 이유 없이 그럴 린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꿀꿀했어요?”
“네. 기분이 영 안 풀려서 ‘아기 아빠’한테 화풀이할까 생각중이에요.”
그래도 이리 장난할 정신은 있는 걸 보니 아주 기분이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단지, 허탈하고 허무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어딘가 텅 비어 버린 것처럼.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는 애써 짐짓 웃어 보였다.
“뭐, 그렇게 해서 풀린다면 받아 줄 순 있는데.”
“……쳇.”
“…….”
그녀를 위한 기분 전환 거리가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이 사람이 뭘 좋아할까. 먹을 걸 주는 건 이제 너무 진부한데…….
그때였다. 뭔가가 그의 머릿속을 휙 스쳐 지나간 것은.
“아!”
“……왜 그래요?”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금방 신이 난 얼굴이 된 그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났어요, 은수 씨 기분 좋게 할 거.”
“응?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