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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위반 로맨스-87화 (87/128)

# 87

87. 여자도 강하고, 엄마도 강하다 (1)

자고로 마음이 심란할 때는 독서가 최고인 법이다. 활자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히 잡생각이 사라지고, 머릿속도 저절로 정리되곤 한다.

때문에 은수는 카페 구석에 한가로이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의 여유.

그런데 그때, 갑작스럽게 웬 향수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일찍 왔네.”

낮은 목소리, 무척이나 불편해 보이는 표정.

지훈이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건만, 어느샌가 그의 향수 냄새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훈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그녀가 오늘 독서의 힘을 빌린 건 일종의 예방 차원이었다. 보기만 해도 잡생각이 생기는 남자를 만나야 했으므로.

“어, 음. 내가 오늘 좀 빨리 준비해서.”

“…….”

“앉아, 지훈 씨.”

은수는 얼른 책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러자 지훈도 그녀의 맞은편에 삐딱하게 착석을 마쳤다.

“미안. 갑자기 연락해서 놀랬지.”

“……뭐, 그냥.”

“…….”

“네가 먼저 날 다 보자고 하고, 좀 의외네.”

……꼭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단 말이야.

비꼼 섞인 지훈의 말에 은수는 애써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할 얘기가 있어서. 저번에 못 한 말도 좀 있고.”

할 얘기라. 이야기는 이미 다 끝난 것이 아니었던가.

지훈은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으며 별 흥미 없이 물었다.

“뭔데.”

그녀는 답지 않게 조금 뜸을 들였지만, 이내 확고한 얼굴이 되었다.

“나…….”

“…….”

“……그 사람이랑 결혼하려고.”

풉!

순간 지훈은 입안에 머금고 있던 커피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황급히 주먹으로 막았다. 은수의 얘기는 그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민은수가 지금, 뭘 한다고? 뭐, 결혼?

“……뭐?”

“……결혼할 거라구, 현재 씨랑.”

다시 들어 봐도 그 말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런 이야기를…….

결혼, 민은수가 결혼을 한다.

혼란에 빠진 그의 머릿속엔 자연스레 지난번 은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이제 결혼이 무섭지 않아.’

‘결혼이란 거…… 괜찮은 거 같기도 해.’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그때는 저를 골리기 위해 홧김에 그냥 한 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지훈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결국 그놈이랑 결혼을 하겠다고.”

“…….”

“네가?”

그건 마치, ‘네가 퍽이나 결혼 같은 걸 하겠다.’ 같은 류의 말이었다.

하지만 레모네이드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은수는 말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 거야.”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순간 지훈은 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허술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

이럴 수가. 이게 말이 돼?

그날 이후 그는 약간 체념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내가 뭔 짓을 한들 얘가 쉽게 돌아오지는 않겠구나. 더군다나 아이도 있으니까……. 조바심은 났지만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조금 더 지켜보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는 것은 그를 매우 고무적으로 만들었다. 아이 아빠야 어쨌건 그녀의 남편 자리는 엄연히 공석이니, 아직은 관계를 풀어 갈 여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이런 식으로 초강수를 띄울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덕분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곱게 나가질 않았다.

“……날 차고 결혼한다는 게 고작 그런 어린놈이냐?”

“…….”

“너도 참 어련하다, 민은수.”

……지금 감히 누가 누굴 찼다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은수는 황당한 마음을 감추고 얼굴을 굳혔다. 그렇잖아도 요즘 왠지 모르게 쇠약해지는 기분인데, 이런 데 괜한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 현재 씨, 지훈 씨한테 그런 소리 들을 이유 전혀 없어.”

“…….”

허, 이제는 대놓고 두둔까지? 저 깊은 곳에서부터 짜증이 끓어올랐다.

불손한 표정이 된 그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뇌까렸다. 어떻게든 그녀의 기분을 나쁘게 하려는 심보였다.

“고작 속도위반으로 결혼하려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

“너는 그런 꼴이 되고도 그 남자 편을 들고 싶니?”

결과적으로 그 말은 정확하게 은수의 비위를 건드렸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금세 날이 섰다.

“……내 꼴이 어디가 어때서? 듣기가 좀 그러네.”

“몰라서 물어? 거울 보면 알잖아, 지금 네가 어떤 꼴인지.”

“…….”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실상 외모적인 측면으로만 봤을 때 그녀는 많이 변해 버린 게 사실이었다. 배를 제외하고라도 몸매가 전에 비하면 많이 망가진 상태였고, 전체적으로 통통해진 탓에 얼굴도 예전만 못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 현재만은 여전히 그녀가 예쁘다고 했다. 아니, 오히려 그전보다 훨씬 더 예쁘다고 했다. 물론 제 눈에 안경이겠지만 그거면 충분한 거였다. 다른 게 뭐가 더 필요할까.

그래서 그녀는 부러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마치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아니, 난 잘 모르겠는데. 만날 예쁘다는 소리만 듣고 있어서 그런가.”

“…….”

“예전에 내가 말했었지. 원하지 않았던 아이라고 해서, 그 아이가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당분간 절대로 잊힐 수 없는 날이었으니까.

그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은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훈 씨도 잘 알겠네. 나한테는 지금 이 아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는 거.”

“…….”

“좀 불어터지고 못나졌을지언정, 난 이렇게 된 내 모습이 자랑스럽고 기뻐. 이게 다 아이를 위한 거니까. 그리고…….”

“…….”

그녀는 말을 더 하려다 멈추고, 지훈을 향해 애달픈 눈을 했다. 지금 그가 날카롭고 모나게 구는 게 온전히 그의 탓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래도, 3년이란 시간 동안 그들은 나름 행복했었다. 몇 달 만에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가 지금 얼마나 억울한 기분일지, 그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공들이던 것을 한순간 애먼 놈에게 뺏겨 버린 기분일 터.

그녀가 오늘 그와 이런 자리를 따로 마련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에게 이 결혼을 납득시키고, 남은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 주기 위해. 물론 실제로 도움이 될는지는 미지수였지만…….

후우. 한숨을 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황당할 거 알아. 그렇게 결혼이 혐오스럽다더니, 고작 몇 개월 만난 남자하고 임신에 결혼까지……. 어이가 없겠지. 나 같아도 그럴 거야.”

“…….”

그는 그녀의 말에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답은 이미 그의 표정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그 얼굴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다, 문득 속으로 물었다.

내가 만약 당신의 아이를 가졌더라면, 당신과 결혼을 했을까.

“…….”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답했다.

아니, 아마 그렇진 않았을 거야. 왜냐하면…….

“나도 이런 내 자신이 낯설고 당황스러운데, 그래도…… 그러고 싶어.”

“…….”

“처음엔 그냥 아이의 아빠를 존중해 주고 싶었어. 그게 예의니까. 그래서 굳이 그 남자에게 알렸던 거고, 그땐 단지 그게 다였어. 근데.”

“…….”

“……지금은 아니야.”

……당신은 현재 씨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 사람이랑 같이, 그 사람을 닮은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고 싶어. 그 아이가 예쁘게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보고 싶고, 그 사람 나이 든 모습도 보고 싶어. 그 사람과 같이…… 늙어 가고 싶어.”

“…….”

“그래서 이러는 거야.”

“…….”

지훈은 느릿한 목소리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그녀의 진심에 놀라고 말았다.

……민은수가 내 앞에서 이렇게 진지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지난번, 그놈에게서 은수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쓸데없는 오지랖’이라 치부하며 현재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녀가 저런 눈으로,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이상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민은수는 이미 도현재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제게 절대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지만 차분한 여자의 얼굴은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 말해 주고 있었다.

“……회사는, 그만두려고?”

“아니. 아직 그럴 생각은 없어.”

“……회사 다니면서 애도 키우겠다?”

“……가능하면.”

“……하.”

그에게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럼…….”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럼 뭐, 별수 있나.

“포기해야지.”

포기. 그녀와 알고 지내면서 처음 들어 보는 말. 지훈은 그저 놀람의 연속이었다.

아이가 대체 너에게 뭐기에, 그 남자가 뭐기에 이렇게까지…….

그 남자와 비슷했던 신입 시절, 남다른 패기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죽자 사자 열심히 해서 꼭 저 위로 올라가고 말 거라고, 선배도 지금부터 내 밑에서 줄 잘 타 놓으라고 호언장담을 하곤 했었다.

그 모습이 나는 아직도 눈에 선한데, 대체 무엇이 너를 이토록 바꿔 놓은 걸까.

지훈은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미처 깨닫지 못한 새, 그녀는 이미 완연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네 입에서 ‘포기’라는 단어가 그렇게 쉽게 나올 줄 몰랐다.”

“…….”

“언제는 최고의 커리어 우먼이 되겠다며. 남자들 못지않게 잘해 보이겠다며. 근데 그런 네가, 네 꿈 다 버리고 한 아이의 엄마 혹은 한 남자의 아내로만 살아가겠다고.”

“…….”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그 말에 은수는 잠시 멈칫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완전히 자신은 없었다. 그러기엔 그녀는 그 일을 너무나 좋아했으니까. 그보다 더 큰 꿈도 있었고.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응. 더 절실한 게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

“…….”

“꿈을 버리는 게 아니야. 새로운 꿈이 다시 생긴 거지. 물론 두 가지 꿈을 함께 이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일이란 게 어디 그런가. 한 번뿐인 인생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걸.”

“…….”

“만약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나머지 꿈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

“감수해야지, 그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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