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86화 (86/128)

# 86

86. 당신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3)

“냄새보단 향기에 가까운 것 같은데.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이제.”

“……엄마 냄새가 뭐지.”

“모르겠어요. 그냥…… 그런 냄새예요. 설명하긴 힘들지만.”

“……어쨌든 나쁜 냄새는 아니란 거죠?”

“좋아요, 엄청.”

현재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느슨하게 풀었다.

은수는 유순한 양이 된 것처럼 느릿하게 그의 품과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자 현재가 그녀의 정수리에 고개를 올려놓았다. 이제 물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그녀의 머리칼이 부슬부슬 일어나 턱을 간질였다. 자꾸만 졸립다고 하는 은수 때문인가. 덩달아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은수의 갑작스런 질문이 현재를 깨웠다.

“현재 씨 어머님은…… 어떤 분이세요?”

“음…….”

현재가 제 품에 기댄 은수를 자연스레 감싸 안았다. 마디가 불거진 손이 은수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좋은 분이세요. 일하느라 바쁘셔서 나한테 많은 신경은 못 써 주셨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면 날 믿고 뭐든 해 보게 하셨어요. 경험이 중요하다고.”

“…….”

“그리고…… 생각이 나이대에 비해서 굉장히 젊으신 편이고, 예쁜 거 좋아하셔서 나름 멋쟁이세요. 그렇게 보수적인 편도 아니고.”

“…….”

“그러니까, 잘 말씀드리면…… 분명히 이해해 주실 거예요.”

평소보다 유난히 가까이 있는 자세 때문에 차분하면서 포근한 현재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렸다.

은수는 방금 전까지 고민을 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제 마음이 거짓말처럼 차분히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현재의 손가락 끝이 조약돌처럼 반질반질한 은수의 손톱을 매만졌다. 안정제를 투여 받는 듯한 느낌, 무엇보다 오롯이 사랑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현재 씨는…… 좋은 가정에서 잘 자란 사람이란 느낌이 들어요. 그냥 얼굴만 봐도 그래 보여요.”

“…….”

“물론 현재 씨도 나와 비슷한 상처를 겪은 거 알지만, 그래도…… 나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은수의 눈빛이 짙어졌다.

만약 내가 따뜻한 가정, 아니…… 적어도 평범하기라도 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이 사람처럼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남자의 품에 안겨 있으니 문득 그런 의문이 그녀의 마음속을 비집고 올라왔다.

그녀는 왠지 그에게만은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어졌다. 이제껏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마음을.

“있잖아요, 사실 난…… 지금까지 순전히 내 잘난 맛에 살아온 사람이라서, 현재 씨같이 구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속으로 부러워도, 티 내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오히려 더 잘나져서, 그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게끔 하려고 했죠.”

“그랬어요?”

“네. 근데 지금은…….”

고개를 돌려 현재를 바라보는 눈길이 은수답지 않게 매우 수줍었다.

“나도 그 사람들 못지않게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훨씬 더 행복할지도 모르구요.”

“…….”

“근데 그러니까, 그런 오기가 통 안 나려고 해요. 어떡하지?”

처음으로 제 앞에서 행복한 엄살을 부리고 있는 은수를, 현재는 사랑이 담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겉은 강해 보이지만 속에는 나름의 상처가 많은 여자였다. 그런 만큼 은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세상엔 그런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녀에게도 얼마든지 행복의 한가운데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만 일일이 말로 알려 주기는 민망해서, 이렇게 더 따스하게 감싸 안아 주는 걸로 대신할 때가 많았지만. 하지만 놀랍게도 은수는 그런 제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받고 있는 것 같았다. 때마다 알아채 주고 이렇게 응답해 주었으니까. 갑작스럽게 창을 열듯 마음을 활짝 내보이는 여자를 마주할 때면 현재는 그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재밌는 거 하나 알려 줄까요?”

이번엔 현재가 불쑥 은수를 향해 물었다. 입가에 웃음기를 띤 채 다시 고개를 돌린 은수가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슬쩍 올려 두며 되물었다.

“어떤 거요?”

“우리 부모님도 우리처럼 연상 연하 커플이었대요.”

“……정말요?”

“네.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한 살 적으시거든요.”

에게. 겨우? 난 또 한 여섯 살 정도는 되나 했네.

‘한 살’이라는 소리에 은수의 얼굴엔 실망의 기운이 역력했다. 만약 두 분의 나이 차가 자신과 현재의 나이 차보다 더 크다면, 그의 어머니께서 자신들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쉽지 않으실까 하는 기대가 순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살 가지고 뭘.”

“왜요. 한 살이어도 연하는 맞죠. 물론 한 살이나 다섯 살이나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그건 아니죠. 한 살은 간혹 친구 먹는 경우도 있지만 다섯 살은…….”

……잠깐.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다시 한 번 현재를 휙 돌아보더니, 이제는 아예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맞아. 현재 씨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잖아요.”

“그렇죠.”

“……근데 왜 난 항상 존대하고 있었지?”

갑자기 왜 이렇게 심각하게 구나 했네. 난 또 뭐라고.

현재가 푸스스 웃으며 대꾸했다.

“말 놓고 싶으면 놔도 돼요.”

하지만 현재의 대답을 들은 은수는 뭔가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런 것보단.”

“…….”

“누나라고 불러 봐요.”

“……네?”

돌아오는 대답이 한 템포 늦었다. 은수는 작정한 듯 눈을 부릅떴다.

“내가 누나잖아요. 은수 누나, 이렇게 한번 해 봐요.”

‘누나’ 소리에 현재는 당황한 나머지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은수는 아랑곳 않고 그런 현재를 채근했다.

“아, 빨리요~. 듣고 싶어요. 엄청 궁금하다.”

“……쑥스러운데…….”

“아, 뭐가 쑥스러워요. 우리가 회사에서 만나서 이렇지, 딴 데서 만났으면 그렇게 불렀을 걸요?”

물론 그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정말로 듣고 싶어요?”

“네! 정말요.”

처음엔 단순히 반 장난이었는데, 그가 순순히 해 주지 않으니 더 듣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가 나오고 말았다. 은수가 신이 난 표정으로 짓궂게 고개를 돌려가며 현재의 얼굴을 끊임없이 좇았다.

정말로 해야 하나. 진짜 걷잡을 수 없이 부끄러울 것 같은데…….

하지만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계속 귀엽게 종용하는 은수 때문에 속으로 두 손 두 발을 다 든 현재는 결국 머뭇머뭇 입을 열고 말았다.

“……은수…….”

“…….”

“누나.”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쉰 그가 쐐기를 박아 주듯 한 번 더 말했다.

“은수 누나.”

“…….”

“……이제 됐어?”

“…….”

……반말까지 하라고는 안 했는데.

현재의 ‘누나’ 소리와 ‘반말’을 함께 들은 은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뭐지, 이 기분은?

“기분, 되게 이상하다.”

“뭐가?”

“……이제 계속 반말할 거예요?”

“응.”

“언젠 쑥스럽다면서요.”

“해 보니까 할 만해서.”

창피하다고 거부할 때는 언제고, 금세 반말을 잘도 하네. 은수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미션을 완료하고 후련해진 현재는 은수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웃기만 했다. 반면 은수는 왠지 모르게 그가 낯설게 느껴져서 가슴이 뛰었다.

부끄러움 탓인지 설렘 탓인지 얼굴이 발그레해져 있는데, 그런 은수를 향해 낮게 헛기침을 한번 한 현재가 어명을 내리는 왕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현재야, 하고 불러 줘요.”

“……네?!”

“빨리.”

……헐.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수가 빠르게 도리질을 했다.

“싫어요.”

“어? 왜 싫어요. 빨리 해 봐요.”

“……방금 들어 보니까 오그라든단 말이에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빨리 해 봐. 나도 해 줬잖아, 누나.”

“…….”

상황 역전이란 게 이런 것일까. 금세 주객이 전도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현재가 빙글빙글 웃으며 은수를 놀려 대고 있었다.

예의 하면 칼인 그답지 않게 은근히 불손하게 느껴지는 반 존대 때문에, 은수는 마치 그가 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처럼 맘이 들썩하는 것을 느꼈다.

……아, 현재 씨는 해 줬는데 치사하게 나만 안 해 줄 수도 없고.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양심은 남아 있었으므로, 결국 은수도 눈을 질끈 감고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혀, 현…….”

“…….”

“……현재야.”

으악!!! 난 몰라.

은수는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그의 웃음소리에 손바닥에 닿은 볼이 용광로처럼 뜨거워졌다.

아오, 내가 내 무덤을 팠지. 괜히 누나 어쩌고 말해서…….

마른세수를 하고 겨우 옆을 쳐다보자,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현재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왜 안 하겠다고 한 건지 이제 알겠어요?”

“……미안해요. 이럴 줄은 나도…….”

다음부턴 절대 시키지 말아야지. 크게 욕보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은 은수였다.

그녀가 참회의 시간을 가지려는데, 현재가 별안간 그런 은수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누나.”

“…….”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말 한 마디에 은수의 심장이 바닥을 향해 번지 점프를 하듯 곤두박질쳤다. 다들 연하, 연하 하더니. 바로 이런 게 연하를 사귀는 묘미라는 걸까?

현재를 항상 어른스럽다고만 생각해 온 그녀였지만, 누나 소리를 듣고 나니 그가 자신보다 어린 나이라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요소가 오히려 그녀를 더 설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고, 입술을 새처럼 모은 은수가 현재의 말에 조심스럽게 화답했다.

“……나도 사랑해, 현재야.”

어깨를 타고 흐르는 개미 소리에 크게 소리 내어 웃은 현재가 은수를 품에서 떼어내었고,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또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빼는 은수의 얼굴은 불타는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손은 연신 손부채질로 바빴다.

“으. 진짜 못 하겠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내가 들어 본 내 이름 중에 제일 듣기 좋았어요. 방금 은수 씨가 현재야, 해 줬을 때.”

그 말에 은수는 손부채질을 멈추었다. 그녀의 다물어진 입술 새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존댓말은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좋았지만, 반말을 종종 섞어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말을 하니 왠지 좀 더 친근해지는 기분이랄까.

나도 현재 씨가 그렇게 불러 줘서…… 솔직히 좋았어요.

하지만 남자에게는 차마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하는 사실.

“벌써 내일이에요, 결전의 날.”

“……알아요.”

“준비됐죠?”

“그럼요.”

다시 아까 전 원래의 포즈로 돌아간 그들은 깍지 낀 손을 주먹 쥐듯 불끈 쥐었다.

내일은, 그들이 정해 놓은 대망의 디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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