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85. 당신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2)
“난 왜 현재 씨가 머리만 말려 주면 잠이 오죠.”
“은수 씨는 원래 잠 잘 자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유난히 더 잠이 와요. 꼭 수면제 먹은 것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은수가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직하게 웃는 현재의 웃음소리가 드라이 소리에 묻혀 들어갔다.
현재가 일부러 세지 않은 바람으로 말리고 있어 말소리가 묻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가 혹시라도 듣기 어려울까 은수는 더욱 크게 목소리를 냈다.
“아무튼, 얼른 말해야 하는데 큰일이에요.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데 어떡하지…….”
“……그냥, 먼저 정식으로 찾아뵐까요? 설명은 그때 하고요.”
“으! 정말 모르겠어요.”
그게 좋을까. 정말이지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다.
은수는 지끈거려 오는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피임을 조금만 더 조심할걸. 정신 좀 똑바로 차릴걸……. 참 살다 살다 이런 고민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드라이 소리만이 집 안을 채웠다. 그의 섬세한 손놀림 덕분인지, 시간이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머리가 다 말라 있었다.
드라이어를 제자리에 놓아두고 온 현재가 아까 전 함께 들고 왔던 비닐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러그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쩡한 소파를 앞에 놔두고 매번 바닥에 앉는 현재를 보며 은수가 피식 웃었다.
“왜 또 여기 앉아요.”
“사 온 거 빨리 써야죠.”
“뭘……. 아.”
마침 오늘 마사지에 쓰던 코코넛 오일이 똑 떨어지는 바람에 현재에게 오는 길에 좀 사 오라는 주문을 넣어 뒀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발마사지 정도만 해 줬었는데 지금은 튼 살 방지를 위해 배 마사지까지도 가끔 해 주곤 하는 현재였다. 하지만 은수는 괜히 그를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혼자 해도 충분하다고 말했었는데, 오늘은 사 온 김에 본인이 직접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해도 된다니까요. 괜히 손에 다 묻히고 미끄러운데…….”
“나도 알아요. 그래도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얼른 걷어 봐요.”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현재가 이미 코코넛 오일을 개봉한 채로 눈을 잔뜩 빛내고 있어서, 할 수 없이 은수는 옷을 걷고 불룩 솟은 배를 내어 주었다.
이제 배를 내주는 것쯤이야 그렇게 민망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알몸도 몇 번씩이나 오픈한 사이에, 배 까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다만 배에 닿는 그의 손길이 왠지 항상 순수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아서, 그게 좀 부끄러울 뿐이었다.
손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녹은 코코넛 오일과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이 배 전체로 퍼져 나갔다. 뱃속의 별이가 오랜만에 닿은 아빠의 손길을 환영하는 양 활개치고 있었다. 속눈썹을 내리깐 채 열심히 마사지에 집중하고 있는 현재의 반듯한 얼굴을, 은수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괜찮아요? 이건 몇 번 해 봐도 할 때마다 어색하네.”
선생님에게 숙제를 확인 받는 양 그가 말했다. 한껏 치켜 뜬 눈이 귀여웠다.
떨리는 손길이 요리조리 움직이며 배를 온전히 감싸는 느낌이 어설프고 간지럽기는 해도, 정말 좋았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질 만큼.
“기분 좋아요. 진짜 막, 튼 살이 없어지는 기분이에요.”
은수의 대답에 그는 뿌듯하다는 듯 씩 웃었다. 그 미소에서 은수는 제가 프러포즈를 받던 그날, 현재가 지었던 미소를 떠올렸다.
마침내 은수는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완전히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을 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남아있었고, 그렇다고 당장 멋대로 결혼을 해 버리자니 뱃속에 있는 별이도 걸렸으니까.
그러나 현재는 역시나 그런 은수의 마음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처럼, 사이좋게 반지를 나눠 낀 뒤에 나지막이 덧붙였다.
‘물론, 지금 당장 하자는 건 아니에요. 나중에 은수 씨가 누군가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반드시 나여야만 한다는 얘기지.’
그녀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그가 또 한 번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 앞으로 당분간은 좀 힘들 거란 거, 알죠.’
그것도 당연하지. 씁쓸하게 웃은 은수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의 의미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둘의 마음이 통하게 되는 순간, 그 다음부터는 자신과 현재 둘만이 아닌 주위 사람들에게로까지 고민의 영역이 확장되리란 걸 그녀도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결혼이고 뭐고, 일단 빨리 현실을 실토해서 짊어지고 있는 이 짐을 내려놓고 싶었는데. 엄마도 엄마지만 실로 남자의 어머님이 더 문제였다.
그분을 뵐 때는 대체 무슨 낯으로 대면해야 하나.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머릿속으로 그려 볼 때면 수백, 수천 가지의 상황들이 자동 시뮬레이션 되곤 했다. 그리고 그 상황들은 항상 말도 못 하게 끔찍하고 차가웠으며, 지나치게 세세했다. 그러다 보면 금세 머릿속은 과부하가 걸렸고, 그럴 때마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건 오로지 한숨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왜 또 한숨이에요.”
“……몰라서 묻는 거예요?”
맘 같아선 임산부가 한숨을 달고 살면 안 된다고 입바른 소리를 하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들어 은수를 한번 바라본 현재가 다시 고개를 숙여 오일을 펴 바르며 대답했다.
“나도 얼른 엄마한테 은수 씨를 소개시키고 싶고, 우리 별이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
“그런데 알잖아요. 나도 처음엔 엄청 놀랐는데, 우리 엄마나 은수 씨 어머님은 어련하실까.”
“……그렇죠.”
은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차라리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어쩌면 이건 속도위반의 대가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하게 된 대가인지도.
하지만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했듯, 만약 현재와 아이를 온전히 제 옆에 두기 위해서 그런 무게를 견뎌 내야만 하는 거라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바뀌어 버렸다. 현재와 별이의 존재는 마치 깨닫지도 못한 사이 그녀에게 너무도 깊게 뿌리를 내려 버린 나무 같았다.
“솔직히, 많이 겁나요. 예전 같았음 그냥…… ‘까짓 거 그냥 말하면 되지, 그게 뭐라고.’ 그랬겠지만, 이제는…… 걱정이 돼요.”
“…….”
“기껏 잘 키워 놓은 아들이 갑자기 직장 상사하고 엮여서 결혼한다 그러고, 거기다 아이까지 생겼다고 하면…… 현재 씨 어머님께는 내가 미우면 미웠지, 눈에 차실 리가 절대 없을 테니까요.”
“…….”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일 수 있을까, 더 예뻐 보일 수 있을까 내내 생각 중인데, 그래도 영 감이 안 잡히네요.”
잠시 동안 둘 사이에 말이 멎었다. 오가는 건 눈빛뿐이었다. 제 배에 손을 올려놓은 채 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현재 때문에 은수의 얼굴에는 또 미열이 올랐다.
그러나 현재마저 은수에게서 전염이 된 듯 한숨을 한번 폭 쉬더니 이내 비싯 웃음을 흘리며 어떡하지, 하고 중얼거렸다.
“왜요?”
그가 그녀를 보며 물끄러미 웃었다.
“예뻐서요.”
배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던지는 솔직하고 대범한 말에, 은수는 귓불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못 말리겠다는 듯 현재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툭 쳤다.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이제 결혼 승낙까지 받아 냈겠다, 요즘 들어 현재는 대놓고 애정 표현이 부쩍 늘었다. 예의 있게 에둘러 표현하던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과 행동이 솔직해졌다고 해야 할까.
덕분에 힘들어진 건 은수였다. 현재처럼 잘생긴 남자와 연애를 하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그의 평소 이미지와 상반되는 이런 말투와 행동이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끄럼 섞인 은수의 타박에도 현재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잘생긴 눈썹이 불퉁하게 비뚤어졌다.
“예뻐서 예쁘다고 하는 건데, 말도 하지 말라 그러면 나는 답답해서 어떡하라고요.”
“…….”
……그렇게 따지면 또 할 말이 없지.
맘대로 하라는 듯이 피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은수가 배를 쑥 내밀며 소파에 몸을 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또 깜빡 잠이 들려던 차에 마사지는 끝이 났다.
현재는 오일이 잘 스며들어 은은한 코코넛 향이 풍기고 있는 배를 옷으로 잘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은수가 앉아 있는 소파 옆자리로 올라가 앉았다. 그는 또 앉기가 무섭게 다부진 손으로 다시금 은수의 어깨를 잡고 시원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혹시 또 걱정하고 있으면, 하지 마요. 그거 다 스트레슨데.”
“…….”
“잘될 거예요. 나만 믿어요.”
“…….”
“대답이 없네. 나 못 믿어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 상황이 이러니까요…….”
“믿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도 분명히, 은수 씨 좋아하실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직감이죠.”
“……믿을 만한 거예요?”
“우리 엄마잖아요. 나랑 보는 눈이 똑같으세요.”
……뭐,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네.
은수는 입술을 쭉 내민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때,
“엄마!”
촉, 소리를 내며 뒷목에 붙었다 떨어진 무언가 때문에 은수의 고개가 저절로 뒤로 돌아갔다. 스티커를 붙였다 뗀 자국처럼, 입술의 부드러운 느낌이 목덜미에 남아 또렷했다. 뒤늦은 은수의 손이 목 근처를 배회했다.
“왜 그래요?”
마치 다른 누군가가 와서 하고 간 것처럼 태연한 표정. 현재는 그저 능글맞게 빙긋 웃고 있었다.
“이, 이상해요. 하지 마요.”
“왜요. 내 것에 내가 뽀뽀하겠다는데.”
씩 웃은 현재가 뒤에서 은수를 꼭 끌어안더니, 한 번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은수의 손을 치워 내고는 목덜미와 뺨에 얼굴을 묻으며 쪽쪽,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간지럽다고, 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은수의 말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곳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여기저기 입을 맞추면서 도톰한 입술이 귓불을 스칠 때면 은수는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행복했다. 이러다 콱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어쩐지 현재의 이런 행동은 늘 새삼스러웠다.
그렇게 잠시 동안 까르르 웃고 입 맞추며 장난을 치던 현재가 꽃향기라도 맡는 양 은수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냄새 난다.”
“……냄새요?”
설마? 방금 씻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순간 은수가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제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걸 알아챈 현재가 낮게 키득거리며 말을 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