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 당신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1)
중학교 때였나, 고등학교 때였나. 은수는 어느샌가 저편으로 넘어가 있었던 것 같은 까마득한 기억을 떠올렸다.
아빠가 살아 있었을 때니까 아마도 중학교 때가 맞을 것이다. 한 번은, 찬란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은수가 나름 이유 있는 반항심에 완전히 시험을 죽 쒀 버린 적이 있었다. 아빠란 사람은 어차피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으니 그녀의 성적에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엄마의 유일한 ‘희망’은 언제나 은수였으니까.
그러나 은수는 그때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였으므로 과감하게 일을 쳐 놓고 후회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그 시험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모르는 문제는 풀어 볼 시도도 하지 않았고 아는 문제도 성의 없이 풀다 틀려 버릴 정도로 시원하게 시험을 말아먹었다. 그런데 막상 성적표가 나올 때가 되니 초조해지는 것이었다.
이번 시험은 어땠느냐고 은근히 기대하며 물어 오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고…… 그런 엄마를 실망시킨다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었다. 이미 친 시험을 후회해 봤자 무엇하리. 그러니까 은수에게 남은 방법은 성적표 위조. 그것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손재주 하나는 비상한 터라, 은수는 컴퓨터를 이용해 매우 그럴듯하게 성적표를 위조했다. 사실 위조하는 것까지는 쉬웠는데, 문제는 그걸 엄마에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건네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수는 현재 못지않게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쪽에 속했다.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잘 알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물론, 은수가 제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당연히 엄마였고.
그래도 어찌어찌 위조한 성적표를 들키지 않고 잘 전달할 수 있었다. 엄마는 늘 그랬듯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은수를 칭찬했다. 그제야 안심이 된 은수는 이제 됐다, 하고 한숨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며칠 뒤, 엄마는 은수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은수가 성적이 좀 많이 떨어졌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과도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여 주시던 열정적인 담임선생님이었다. 이제 곧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갑자기 성적이 이렇게나 떨어진 것이 이상하다며 혹시나 하고 엄마에게 그 원인을 물어보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모든 것이 허무하게 탄로 나 버렸고, 은수는 엄마와 개인 면담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다행히 엄마는 당시 은수의 상황을 참작해 주어 크게 실망을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때는 어찌나 선생님이 밉던지. 내가 그 위조한 성적표를 전달하면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이렇게 맥없이 들켜 버리나 하는 치기 어린 마음이 있었다.
은수는 그 시절이 그리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까짓 성적표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어린 시절. 훌쩍 시간이 흘러, 서른두 살이 된 은수는 그때와는 또 다른, 보다 엄청난 이유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차라리 성적표를 백번 위조하고 그걸 들키는 것이 지금 이 말을 한 번 하는 것보다야 훨씬 덜 힘들 거라고, 그렇게 부질없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안 아퍼. 글쎄, 걱정 말라니까. 정 그렇게 걱정되면 얼굴이나 좀 비치든가.]
“아니, 나도 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통 안 나니까.”
핑계였다. 아무리 바빠도 엄마를 만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이 중대한 사태를 먼저 알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모습으로 엄마를 만날 수 없었다. 어쩌면 충격으로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얼른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입술이 풀 붙여 놓은 것처럼 딱 붙어서는, 말이 통과하지를 못하고 입 안에서 맴맴 돌았다. 이건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몇 마디 하고서 또다시 정적.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오려는데, 곧바로 엄마의 의심스러운 목소리가 귀신같이 들려왔다.
[근데 요새 정말 왜 이래? 틈만 나면 먼저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내, 내가 언제…….”
[지금도 그렇잖아. 벌써 10분째네. 평소엔 5분을 채 못 채우더니……. 별로 할 얘기도 없는 것 같구만.]
……아, 역시 우리 엄마.
은수는 정말 중요한 용건이 있지 않은 이상 전화를 잘 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엄마였다. 확실히 요즘 들어서는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만큼 엄마에게 전화를 많이 하고 있기는 했다. 워낙 감감 무소식인 딸이었다 보니, 갑작스레 연락을 자주 한다 해도 엄마로선 그것이 놀랍기보단 반가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딱히 부정적인 소리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의구심이 오늘에서야 정점에 이른 듯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민은수가, 할 얘기도 딱히 없으면서 괜히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는 게…… 엄마 입장에선 좀처럼 이해가 안 될 테니까.
“아니, 자주 해도 뭐라 그래, 엄만?”
[아니…… 영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러지. 무슨 일 있어? 고민 있는 거야?]
고민? 엄마의 물음에 은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어찌 보면 고민이다. 절대 쉽사리 말할 수는 없는 고민. 다른 고민 같았으면 진작 엄마에게 털어놓았겠지만 이것만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임신했어, 라는 말을 꺼내기라도 할라치면 마치 댐을 가두기라도 하듯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목구멍을 콱 막아 버리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기필코 말할 거라고, 전화를 하기 전 굳게 다짐한 은수였다. 미적거리면서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가 지금까지 왔다. 이제는 산달이 채 3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말을 해야 하는 게 당연지사.
하지만…….
“……엄마.”
[응.]
“……있잖아…….”
[응, 왜.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의 끝으로 무심한 대답이 들려오자마자,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갈 자신이 스르륵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잔뜩 긴장해서 겨우겨우 운만 떼면 뭐 하냐고. 본론을 말할 용기는 도통 안 나는걸.
아…… 진짜 미치겠네.
은수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헝클였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머리에서 자잘한 물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마치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그녀의 마음처럼.
굳건하게 다짐했다고 생각한 마음이 금세 또 물거품처럼 사그라지고 있었다. 이래가지고는 출산 전에 말할 수나 있을까?
삑삑삑삑삑삑.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하던 중, 그녀는 별안간 도어 록을 해제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누가 들어올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현재를 바라보며, 은수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은수야.] 하며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통화 중이에요?’
바깥의 냄새를 잔뜩 머금고 들어온 현재가 입모양으로 묻자, 은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수야, 민은수.]
“……어, 엄마.”
[뭐야. 옆에 누구 있어?]
헐. 귀신인가?
“……아, 아니? 있긴 누가…….”
[그래? 뭐, 아니면 말고. 근데 왜. 무슨 할 말 있어?]
하여튼 엄마는 겉보기엔 물러 터진 것 같으면서 눈치 하난 참 백단이다.
은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머뭇머뭇 목소리를 뱉어 냈다. 대충 전개를 보아하니 오늘도 고백하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냥, 엄마 보고 싶다구…….”
[어이구, 증말 이상하네. 왜 이렇게 보고 싶다는 얘길 자주 해? 우리 딸내미 애기 다 된 거야?]
“……애기는 무슨. 나이 먹고 철들어서 엄마의 소중함을 알았나 보지, 뭐…….”
[그런 거면 다행이고……. 정말 아무 일 없는 거 맞지?]
“……응. 없어요.”
이렇게 대답만 해도 엄마가 알아서 내 상황을 읽어 주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적어도 이 말을 못 하겠어서 죽을 것같이 힘든 지금보다는 나을 텐데. 물론 가능성이라고는 1퍼센트도 없는, 해 봐야 소용없는 생각이지만 정말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엄마는 엄마라고. 그 정도 독심술이 있지는 않아도, 은수가 지금 무지막지하게 심란하다는 것만은 알아챌 수 있는 모양이었다. 넌지시 들려오는 물음에 은수는 기함하고 말았다.
[엄마가 언제 한번 집에 갈까?]
“……어?”
[이제 좀 있으면 네 생일이잖아. 오랜만에 엄마가 미역국도 끓여 주고 그러면 좋을 건데…….]
허, 잠깐…….
순간 은수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술이 벌어졌다.
엄마가 불시에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아주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일언반구도 없이 다짜고짜 이 배를 목격하기라도 한다면…….
지금은 절대 안 되지! 은수는 입술을 굳게 앙다물곤 힘주어 말했다.
“아냐, 오지 마! 내가 언제 생일 그런 걸 챙겼나? 새삼스럽게 뭘…….”
[그래도. 얼굴 못 본 지도 꽤 오래됐고…….]
“어? 어…… 그러면…… 내가 언제 날 잡아서 한번 갈게! 엄마가 오지는 마. 먼데 여기까지 뭐 하러……. 알겠지?”
[진짜 가지 마? 이 세상 천지에 지 생일 까먹는 애는 은수 너밖에 없을 거야, 정말.]
“생일이 뭐 대순가. 난 그냥 쉬는 게 최고야. 내가 언제 한번 갈 테니까 걱정 말구 계셔요.”
[……그래. 그럼 그러든가.]
어라. 왜 이렇게 포기가 빠르지? 평소 엄마 성격이라면 반드시 오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것이 분명한데.
그래도 엄마가 강하게 주장을 하지는 않은 건 다행이었다. 은수는 본능적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엄마에게 거듭 신신당부를 했다.
“절대! 절대 오면 안 돼요. 아, 그냥…… 엄마 고생하지 말라고 그러는 거지. 아니, 뭘 또……. 아, 내가 켕기긴 뭘 켕겨……, 응. 또 전화할게. 끊어요.”
그다지 밝지 않은 표정으로 통화를 끝마친 은수를 보며, 현재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척 봐도 은수 또한 그 자신만큼이나 사실을 털어놓는 데 애를 먹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리가 미역처럼 축 젖어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씻고 나오자마자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어머님이세요?”
“네.”
“말씀 못 드렸죠?”
“……네.”
은수가 채 말리지 못한 머리를 마저 말려 주기 위해, 그가 드라이어를 가져와 플러그를 꽂았다. 그 모습이 꽤나 능숙했다. 은수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기대며 현재에게 제 머리를 맡기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 죽겠어요. 이러다가 별이 낳고 얘기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도 그래요. 그래도 그 전에 꼭 말해야죠. 할머니가 되실 분들인데.”
말을 마친 현재가 드라이어를 켜 은수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임신 탓에 숱이 많이 적어지기는 했지만 결 좋은 머리카락이 현재의 손가락 사이를 일사분란하게 빠져나가며 흩어졌다.
이건 요사이 새로 생긴 현재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익숙하다는 듯이 제게 머리를 맡긴 채 드라이 바람을 순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은수의 얼굴을 볼 때면 현재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쁨이 퐁퐁 샘솟았다. 따뜻하면서 약간은 서늘한 바람으로 슬슬 머리를 말려 주면, 은수는 늘 잠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감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은수의 눈꺼풀이 무겁게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