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83화 (83/128)

# 83

83. 진짜 데이트 (3)

윤정의 예리한 시선이 훤칠한 남자의 모습을 위아래로 스캔했다.

음. 배우를 닮았다더니, 확실히 잘생기기는 잘생겼네. 딱히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를 본 윤정의 첫 소감은 그것이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와 전체적인 인상은 무척이나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을 주었지만, 다소 곱상한 편이어서인지 약간 기생오라비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결정적으로, 스물일곱 신입 주제에 팀장씩이나 되는 제 친구를 덜컥 임신부터 시켜 버린 놈이 아닌가. 아무리 잘생겼다고 한들 첫인상이 좋게 보일 리는 만무했다.

“…….”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저것의 절친’이라는 명목으로 한바탕 거들먹거릴 수 있었을 텐데.

속으로 아쉬움을 삼킨 윤정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허윤정이에요. 은수랑은 같은 대학교, 같은 과 친구였구요.”

“아, 그러시구나.”

이 정도로 가까운 그녀의 측근을 만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학 동기이자, 10년을 넘게 만나온 친구. 즉, 그녀의 진짜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

어쩐지 그녀에게서 얻어 낼 게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현재는 전에 없이 강한 호기심과 긴장감이 동시에 이는 것을 느꼈다.

“어…… 은수 씨 친구분은 처음 뵙는 거라 좀 떨리네요.”

“무슨. 얘 앞에서 떨 거 없어요. 그냥 편하게 대하면 돼요.”

어차피 허윤정이 튀어 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물론 실상 그녀도 윤정에게 똑같은 신세였지만, 은수는 그것을 결단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뭣 모르던 대학 시절부터.

“그나저나, 두 사람은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 데이트한 거예요?”

빤히 보이는 은수의 물음에, 고기를 질겅거리던 윤정과 이 대리는 문득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잠시간의 침묵. 그것을 먼저 깨고 나선 것은 역시 남자다운 이 대리였다.

“……아, 그게.”

“…….”

남자가 어련히 알아서 잘 둘러대겠거니, 하며 윤정은 차분히 물을 들이켰다. 어차피 처음부터 제가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오늘 만남은 애초에 예정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정말 충동적이었던 결정. 그가 뜬금없이 전화를 해서는, 주말인데 할 일 없이 집에 있는 것보단 나와서 함께 영화라도 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며 은근슬쩍 꼬여 내기에…… 안 그래도 심심하겠다, 못 이긴 척 그냥 한번 나가 준 것뿐이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데이트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이트 맞습니다.”

“쿨럭!”

그를 믿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는 고통스럽게 캑캑거리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은수는 별일이라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정말이에요? 진짜 데이트였어요?”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이 대리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 보였다.

“……예, 뭐. 밥 먹고 영화 보면, 그게 데이트죠.”

……아니, 이 남자가 진짜!

금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윤정이 강하게 따지기 시작했다.

“그게 왜 데이트예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만나서 밥 먹고 영화 볼 수도 있는 거지.”

심상찮은 그녀의 기세에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

“윤정 씨는 아무 생각 없이 나오신 거였습니까? 전 아니었는데요.”

“…….”

“전 맘에 드는 여자 아니면 같이 영화 안 봅니다.”

……이럴 수가.

남자는 단숨에 윤정에게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아니, 이것들은 회사에서 순 사람 엿 먹이는 기술만 배우나. 민은수나 이 남자나 다 왜들 이러는 거야?’

윤정이 열을 내거나 말거나, 현재와 은수는 두 사람의 설전을 그저 흥미로운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투견처럼 투닥거리는 것이 어쩐지 옛날 저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저러다가 정 드는 법인데. 바로 우리처럼.

새삼스러운 생각에 은수에게서 웃음이 튀어나왔고, 그 웃음은 한껏 예민해져 있는 윤정의 심기를 거슬렀다.

“야, 왜 웃냐?”

“어? ……아. 아냐, 아냐. 그냥 딴생각하느라.”

“……암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꺼라?”

“왜~ 둘이 잘 어울리는데. 보기 좋구만.”

“잘 어울리긴 뭐가 잘 어울려?! 확, 진짜.”

기집애. 영 싫은 것도 아니면서 튕기기는.

진짜 싫다면 눈빛만 봐도 티가 나는 애였다. 지금 윤정의 눈빛은 적어도 엔간한 남자들을 마주할 때처럼 질색하는 반응은 아니었다. 아마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은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사이, 씩씩거리던 윤정은 대놓고 현재에게 공격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민은수, 너도 어디 맛 좀 봐라. 나만 당할 순 없지.

사실 굳이 그런 게 아니라도,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그닥 맘에 들지 않았다. 경험상 얼굴값 하게 생긴 것들은 다 거기서 거기였기에.

“현재 씨는 나이가 스물일곱이라고 하셨죠?”

“……아, 예. 맞습니다.”

또 불거져 나온 나이 얘기에, 현재의 대답이 살짝 느리게 돌아왔다.

윤정은 진심 궁금하다는 듯 일부러 테이블에 팔을 짚으며 물었다.

“아니 근데, 어쩌다가 애를 임신까지 시키셨어요? 나이도 어리신 분이.”

“…….”

“혹시, 처음부터 흑심 있었던 거 아니에요?”

“……야! 넌 무슨 그런 질문을…….”

쟤는 사람 곤란하게 왜 저래?

무례한 친구를 대신해 사과하며 커버 쳐 주려는 은수를 뒤로하고, 현재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아.”

상황 역전을 핑계로 저를 시험에 들게 하려는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유유상종이라고, 윤정도 친구인 은수 뺨치는 고단수임이 분명했지만 그는 이미 은수의 반응에 인이 박인 나머지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기만 할 뿐.

“예, 맞습니다. 흑심 있었어요.”

“…….”

……뭐지, 이 빠른 인정은?

윤정은 조금 의외라는 듯 현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은수도 마찬가지였다.

현재는 침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거라 예상은 했습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하지만 맹세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걸 빌미로 은수 씨를 잡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요.”

“…….”

“은수 씨 뱃속에서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건 기쁘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 일이 조금 후회도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통한 후에 결혼을 하고, 그 뒤에 아이를 가졌으면 더 좋았을 텐데. 순서가 어그러지는 바람에 은수 씨가 더 힘들었던 것 같은 느낌이 좀 들어서요. 결국엔 제 잘못이죠.”

“…….”

“그래서…… 은수 씨 친구분을 이제라도 만나 뵙게 된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은수 씨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부분들을 알고 계실 테니까, 이참에 도움 좀 받으려고요.”

“…….”

윤정의 눈이 담백하게 웃는 현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옆에 앉아 있는 남자와는 또 다른 의미로 윤정의 입술을 다물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고, 청산유수처럼 말을 늘어놓는데…… 그 모습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듯한 말투에서 진정성이 물씬 느껴졌고, 눈에는 반짝거리는 총기가 가득했다. 그것은 단순히 어린 것이나 패기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요즘은 어린 나이에도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제야 윤정은 깨달았다.

대쪽 같았던 민은수가 이래서 이 ‘어린’놈한테 넘어간 거였구나, 하고. 직접 만나고 나니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졸지에 한풀 꺾이고 만 윤정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 이제 알 만큼 다 아실 것 같은데요. 꽤 오래 만나셨잖아요.”

퉁명스럽기는 하지만, 방금처럼 공격적이지는 않은 말투였다.

현재는 최대한 점수를 따기 위해 더욱 빙긋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단 소리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모르는 게 많은 것 같더라고요. 앞으로 차차 알아 가야죠.”

그 말을 하고 은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꿀이 뚝뚝 흐를 만큼 진득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딱딱하고 차갑기만 하던 민은수란 여자가, 이렇게나 사랑스럽게 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최근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까. 아직 알아 갈 게 더 많을 수밖에.

“…….”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윤정의 얼굴은 뭐 씹은 표정이 되었다.

어우, 눈꼴 시려. 유난이다, 유난.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비록 나이가 너무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남편으로서나 아이 아빠로서나…… 자질은 무척 충분해 보이니까. 일단 안심이었다. 저 정도면 민은수도 큰 고생을 하지는 않겠네.

단, 몇 가지 산만 무사히 넘는다면 말이다.

“……그럼, 은수랑 결혼하실 생각인 거죠?”

“네, 그렇습니다.”

“아이 낳고 나서요?”

“아마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은 아무래도 좀 무리일 것 같아서.”

“그쵸…….”

궁금한 것을 묻던 윤정은 마지막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근데, 현재 씨 부모님은 은수에 대해서 아세요? 그리고 아줌마는 임신한 거 아시는 거야?”

촌철살인 같은 윤정의 질문에, 현재와 은수의 얼굴이 순간 어둡게 변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갑갑한 상황.

이것들을 어떡하면 좋냐. 제일 중요한 걸 어쩌자고 아직까지…….

그들을 마뜩찮게 바라보던 윤정이 다짜고짜 물었다.

“……어떡하실 거예요?”

다소 모호한 그녀의 질문에도 현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드려야겠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목소리에 별로 자신이 없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꼭 거쳐야 할 과정이니까요.”

자신이 없다는 말에 에둘러 긍정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진정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 제일 중요한 그녀의 마음을 얻었으니 그걸로 반은 성공한 셈이 아닌가.

그때, 조용히 밥만 먹고 있던 이 대리가 불쑥 대화를 갈랐다.

“잘될 거야. 정 안 되면 이번에도 내가 도와주면 되지, 뭐.”

이 남자는 존재감도 없이 있다가 갑자기 무슨.

윤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쪽이 도와주긴 뭘 도와줘요……?”

“아아.”

윤정 씨는 아직 모르고 있구나. 현재가 픽 웃었다.

“이 대리님이 저 은수 씨랑 잘될 수 있게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두 분 소개시켜 드린 것도 그 답례고요.”

“……뭐라고요?”

아니, 그럼 이 기집애가 지금 고작 ‘답례’를 위해서 나를 이용해 먹은 거였단 말이야?

순간 윤정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

“민은수!”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은수는 뱃속의 아기를 가리키며 태연하게 윤정을 타박했다.

“야아, 조용히 좀 해. 별이 놀란단 말이야.”

“괜찮아요, 은수 씨? 안 놀랐어요?”

……그 옆에 있는 놈도 물론 한패였다.

“네, 괜찮아요. 넌 임산부한테 소릴 지르면 어떡하냐? 잘못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허…… 내가 진짜…….”

‘별이’인지 뭔지, 자기들끼리 속닥대며 애지중지 배를 쓰다듬고 있는 꼴이 어찌나 보기 싫은지.

윤정은 눈앞의 스테이크가 은수라도 되는 듯, 고기들을 팍팍 썰어 입 안으로 구겨 넣었다.

그때, 옆쪽에서 물 잔이 스윽 밀어졌다. 손의 주인공은 당연히 이 대리였다.

“윤정 씨, 이거 마시면서 드세요. 목 막혀요.”

“……됐거든요!”

그러면서도 잔은 홱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켠다.

저 봐, 저 봐. 츤데레야, 뭐야. 저러면서 말은 꼭 싫대지.

모른 척하고 있던 은수가 빙그레 웃었다. 귀여운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 커플에게서도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겠지.

그나저나 우리는…….

“…….”

이제 어떡해야 할까. 그녀의 눈이 문득 옆에 앉은 현재를 향했다.

일단 제일 큰 문제는 엄마였지만, 엄마만이 걸림돌은 아니었다. 이 산을 넘으면 또 저 산이 기다리고, 저 산을 넘으면 또 먼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첩첩산중을 헤매는 기분. 그래도 얻은 게 많기에 지킬 것도 많은 것이라 생각하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머지않아 치르게 될 전쟁을 떠올리며, 그녀는 꿋꿋해지기로 했다. 이젠 정말 단단해져야 했다.

“은수 씨, 얼른 먹어요. 다 식겠어요.”

“……네, 먹을게요.”

소중한 아기를 위해서.

또, 사랑해 마지않는 그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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