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82. 진짜 데이트 (2)
우여곡절 끝에 입성하게 된 상영관 내부는 엄청나게 어두웠고, 또한 조용했다.
오붓하게 붙어 앉은 현재와 은수는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들릴까, 조용조용 둘만의 대화를 속닥거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마디 대화도 하지 않았던 지난번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어떤 것 같아요? 안 지루해요?”
“재밌는데요. 은수 씨는요.”
“나두 재밌어요. 다행이다.”
본인이 먼저 추천을 해서 보는 영화이니만큼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재미있다는 말에 눈에 띄게 안도하는 듯한 여자를 보며, 현재는 빙긋 웃고는 나초를 와작 깨물었다.
주말 낮 이 시간대의 영화관은 다소 한산한 편이어서 영화를 보기에 썩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또한 난생 처음으로 예매한 커플석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일단 자리가 굉장히 푹신한데다가, 팔걸이가 없어서 바짝 붙어 앉은 여자의 체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으므로. 이런 바람직한 문물은 이용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특히 오늘 같은 첫 데이트에는.
“…….”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 끝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영화에 빡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박혀들었다. 스크린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그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이것 봐, 이렇게 예쁜 걸.
요즘 들어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그녀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살에 관해선 유독 예민하게 반응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현재는 괜히 쓸데없는 생각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것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어줍지 않은 위로가 아니라 온전한 진심이었다. 지금 이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그녀는 정말 혼자 보기엔 아까울 정도로 예쁜 사람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 스스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 외모에 관해 푸념을 한다니, 누가 들으면 복에 겨운 소리라고 할 테지.
사실, 별 관심도 없는 인물들이 주야장천 나오는 영상보다는 그녀의 옆모습을 구경하는 쪽이 현재에겐 훨씬 더 재미있었다. 더군다나 밝은 곳에선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통에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도 기왕 함께 온 것이니 간간이 영화를 보는 척하기는 했지만, 그의 눈에 내용은 당연히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를 얼마쯤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녀에게서 불편한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오랜 시간 동안 홀린 것처럼 은수를 응시하고 있던 현재는 그 소리에 순간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장시간 동안 요지부동이었던 그녀의 자세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지난 번 이곳에 왔을 때보다 더 부풀어 오른 배가 그녀를 힘겹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현재가 마땅한 방도를 떠올려 보고 있던 그때,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튀어나갔다. 그가 은근슬쩍 어깨동무를 하며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깜짝 놀란 은수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커다래진 눈이 무척 귀여웠다.
그가 안심하라는 듯,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무 꼿꼿하게 앉아 있지 말고 나한테 기대서 편하게 봐요. 불편하잖아요.”
“…….”
처음엔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란 나머지 몸을 움츠렸지만, 은수는 이내 그가 저를 배려한 것임을 알아챘다. 그렇잖아도 허리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하여간 참 귀신같은 남자란 말이야.
별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자연스레 머리를 그의 어깨 쪽으로 뉘였다.
아득한 향기와 함께, 그의 널찍한 가슴팍이 만주 벌판처럼 크게 확장되어 보였다. 몇 센티미터 남짓 떨어진 거리. 콩닥콩닥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뱃고동 소리마냥 적나라하게 들려오자, 그녀의 심장도 질 수 없다는 듯 그를 따라 콩콩 뛰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안정감과 평온함이 찾아들었다.
우리 사이가 정말 많이 바뀌기는 했구나. 예전 같았으면 이런 포즈는 절대 불가능했을 텐데.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사랑받는 기분은 언제나 새삼스러웠지만, 또 언제나 뭉클했다.
그 와중에, 그들의 시야를 가득 메운 스크린 속에서는 어느새 남녀 주인공의 러브신이 한창이었다. 15금 영화이기는 했지만 사랑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수위가 있는 러브신은 필수 요소일 수밖에 없었다.
타이밍이 참으로 절묘했다. 둘은 그렇게 한껏 밀착한 상태로, 두 주인공이 열정적으로 입 맞추는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
“…….”
음…… 예상 못 했던 건 아닌데, 그래도 좀 민망하긴 하네.
현재는 귓불이, 은수는 볼이 유독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쩐지 정수리 쪽에 열이 올라 뜨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커플석을 맘에 들어 했던 데는 앞서 언급했듯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바로 의자의 양옆으로 튀어나온 큼지막한 칸막이라는 요소였다.
그들이 예매한 커플석은 뒤쪽 외진 구석에 위치해 있어서 웬만하면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닿을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안팎으로 시야를 완벽히 차단해 주는 칸막이는 철통 보안을 가능케 해 줄 고마운 물건이었다.
이 안에서는 무엇을 하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었다. 예를 들면 가벼운 입맞춤이라든가, 키스라든가. 그 비슷한 어떤 것…….
나 참, 또 이런 생각이네.
그의 미간에 언뜻 주름이 졌다.
‘현재 씨가 날 만질 때마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일전에 그녀가 했던 말. 요즘 그는 그때의 그녀가 절실히 이해가 되는 중이었다. 하다못해 여자의 병이 혹시 저에게로 옮겨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이후로 여자만 보면 자꾸만 몹쓸 욕구가 튀어나와 죽을 맛이었으니까.
앙증맞은 이목구비에 빠짐없이 입 맞추고 싶고, 또 부드러운 그녀를 품 안에 가득 안고도 싶었다. 이제는 별 눈치 안 보고도 마음껏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상황이 됐지만, 선뜻 먼저 그러기에는 조심스러운 맘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타이밍에까지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아까 전부터 입술을 맞추고 싶었던 것을 애써 눌러 오던 그로선 이 이상은 한계였다.
현재는 살짝 고개를 숙여, 가지런히 달싹이는 은수의 속눈썹을 내려다보았다. 은수도 왠지 모를 낌새에 고개를 뒤로 빼어 그를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서, 남자의 따스한 눈빛이 햇살처럼 내리쬐고 있었다.
“…….”
한창 뜀박질을 하고 있던 그녀의 심장이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더더욱 거세게 뛰었다. 남자의 입술이 저에게로 다가올수록 그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어떡해,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은수는 별 도리 없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가까워진 두 입술이 맞닿기 바로 직전이었다.
“…….”
딸깍.
미미한 소리와 함께 눈을 감고 있어서 검게만 보이던 시야가 갑작스레 붉게 변했다. 그러더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는 사람들의 부스럭거림이 조금씩 들려왔다.
“……?”
뭐지? 뭔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뜨고 시선을 돌린 그녀가 입술을 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환했던 스크린이 어느새 까맣게 변한 채 엔딩 스크롤을 영사하고 있었다.
“…….”
“…….”
뭐, 뭐야. 설마 벌써 끝인 거야……?
두 사람은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고, 당혹스러운 눈길이 정면으로 맞물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깨달았다. 그 키스신은 엔딩 직전에 유종의 미로 등장한 장면이었다는 것을.
한껏 달아올라 있던 몸이 한순간에 식었다. 그리고 욕정은 금방 부끄러움으로 돌변했다.
……아무리 이 남자에게 정신이 팔렸었기로서니, 영화가 끝나는 줄도 몰랐던 건 좀 심한 거 아니야? 내가 무슨 목적으로 여길 왔는데!
‘내가 미쳤지. 신성한 영화관에서 이게 무슨…….’
이게 다 이 남자 때문이야. 이 남자가 조금만 덜 잘생겼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는다고.
애꿎은 남자를 탓하며, 은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재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이, 이제 그만 가요, 우리도.”
“어…… 네.”
마찬가지로 민망한 얼굴이 된 그도 쭈뼛쭈뼛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지만, 은수는 부끄러운 나머지 그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힘이 들었다.
어떻게든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해.
다급한 마음에, 그녀는 출구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 저거 이 대리 아니에요?”
“어디요?”
우뚝 멈춰 선 그녀가 팔을 뻗어 앞쪽을 가리켰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모습의 두 남녀가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은수를 따라 그쪽을 쳐다본 현재의 입술도 동그래졌다. 저 멀대같은 인영은 틀림없이 이 대리였다.
“어, 맞는 것 같은데요. 근데 옆에 여자분은 누구지.”
은수의 눈초리가 종잇장처럼 가늘어졌다.
애석하게도 그 여자가 누군지는 KTX를 타고 지나가면서 봐도 알 수 있을 듯했다. 10년을 넘게 봐온 뒤통수에, 저 걸음걸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허윤정!”
그녀는 옆에 아직 다른 관객들도 조금 남아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무의식적으로 윤정의 이름을 우렁차게 외쳤다.
예상치 못하게 울려 퍼진 제 이름에, 웨이브 진 갈색 머리의 여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 있던 남자, 아니, ‘이승환’ 대리도 덩달아 놀란 얼굴을 했다.
“……민은수?!”
몇 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서, 그들은 비슷한 얼굴을 한 채 서로를 믿기지 않는다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진정 얄궂다고밖에 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 * *
“확실히 인연은 인연이다. 어떻게 거기서 그렇게 만나냐. 영화가 한두 개도 아닌데.”
“그러게요. 저번 일도 그렇고, 진짜 신기하네요.”
“……하하하.”
“…….”
때 맞춰 터져 준 돌발 상황 덕분에, 은수와 현재는 어느샌가 부끄러움 따위는 집어던진 채였다. 그들은 이제 그저 눈앞의 이 커플을 놀려 먹겠다는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저녁을 먹는 장소는 지난번 이 대리에게 현장을 들켰을 때와 같았지만, 분위기는 그때와 완전히 정반대였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이 대리와 윤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열심히 포크질만 하고 있었다.
자고로 허윤정을 놀려 먹을 기회는 흔히 오는 게 아니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래 보겠어. 은수의 목소리가 절로 들떴다.
“참, 그러고 보니까 우리 아직도 서로 통성명을 안 했네. 아까 진즉에 했어야 되는데. 그쵸?”
“…….”
저 얄미운 년. 건수 하나 잡았다 이거지.
윤정의 눈초리가 은수를 날카롭게 째렸지만, 은수는 전혀 미동도 없이 생긋 웃을 뿐이었다.
“이 대리야 뭐 상호간에 빤히 아니까 됐고, 그럼 둘만 인사하면 되겠네?”
“…….”
“음, 먼저 이쪽은 도현재 씨. 그리고 이쪽은, 내 둘도 없는 친구 허윤정. 인사해요.”
예의와 센스를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그가 먼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도현재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