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81. 진짜 데이트 (1)
“와, 현재 씨, 여기 봐요.”
“뭔데요?”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긴 현재는 덩달아 탄성을 터뜨렸다.
은수가 가리킨 곳에는 가지각색의 유모차들이 일사분란하게 늘어서 있었다. 척 보아도 고급스럽기만 한 자태. 그러나 그것들은 그 위용만큼이나 가격도 유달리 비쌌다.
“유모차도 요즘은 엄청 예쁘게 잘 나오네요.”
“그러게요. 나 땐 좀 촌스러워서 싫었던 것 같은데. 타기 싫어서 난리 피우고.”
탐욕이 담긴 손길과 함께 내뱉는 말끝에는 허세 아닌 허세가 담겨 있었다.
아니, 설마. 유모차 타던 갓난아기 시절을 기억한다는 것일까?
“은수 씨, 그때가 기억이 나요?”
놀라움 가득한 현재의 질문에 은수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두 살 때였나, 사촌 오빠가 장난쳐서 혼자 차에 갇혔었던 거랑, 또…… 네 살 땐가? 마루에서 떨어져서 댓돌에 머리 박았던 거, 그리고 동네 놀이터에서 미끄럼틀 타다가 엎어졌던 거 등등, 인상 깊었던 건 다 기억하죠.”
“…….”
“현재 씬 어렸을 때 기억 안 나요? 내가 이상한 건가?”
좀 신기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상할 것까지야.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유치원 무렵부터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은수 씨가 말하는 것처럼 한두 살 정도였을 때 기억은 너무 어릴 때니까 거의 없죠. 다들 그렇지 않나.”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그럴 만도 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긴, 뭐 내 머리가 보통 머리가 아니긴 하죠. 옛날부터 기억력이 좀 남달랐거든요.”
허세로도 모자라 은근한 자랑까지.
그럼에도 복숭아처럼 볼이 통통해진 채로 조잘대는 여자는 시도 때도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현재는 그만 제가 있던 장소도 잊은 채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물론 곧장 그녀에게서 흘김이 돌아왔다.
“왜 웃어요?”
“큼큼, 아니에요. 유모차도 살까요?”
“아뇨. 이건 좀 나중에 사도 될 것 같아요. 지금 사면 진짜 처치 곤란이에요. 놔둘 데도 없고.”
“아, 그건 그러네요. 그래도 맘에 드는 거 있으면 봐 둬요. 나중에 그걸로 사게.”
“네.”
기분 좋게 웃은 그들은 다시금 매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아기 용품 쇼핑에 나선 길이었다. 마음이 통하게 된 기념으로 현재가 그녀에게 정식으로 첫 데이트를 청했던 것이었다. 지금껏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얼마나 꿈꿔 왔던가. 그만큼 하고 싶은 것도,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았다. 다만 하고 많은 장소 중에 목적지를 굳이 이곳으로 정한 것은, 첫 데이트이니만큼 뭔가 의미 있는 걸 해 보자는 취지에서였다.
의미는 확실하게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고 싶은 것이 과하게 많은 나머지 예산 초과를 너무 쉽게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카트에는 이미 아기 양말부터 배냇저고리, 젖병, 가재 수건 등 아기 용품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지만, 선망 가득한 그녀의 눈길은 쉴 새 없이 이곳저곳을 널뛰었다.
“아, 어떡하지. 좋아 보이는 게 너무 많은데.”
“무슨 걱정이에요. 다 사면 되죠.”
“에이, 내가 원하는 거 다 사려면 현재 씨 거덜 날 걸요.”
은수의 장난 어린 말에 현재는 짐짓 웃으며 말했다.
“이거, 빨리 승진해야지 안 되겠네.”
그러나 그걸 들은 ‘민 팀장’의 표정은 대번 샐쭉해졌다.
“……그게 하고 싶다고 되는 건가…….”
말단 신입이 벌써부터 승진 타령은. 아직 남은 앞길이 구만리구만. 쯧쯧.
저도 모르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그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은수 씨 지금, 본인 팀장이라고 나 무시하는 거예요?”
“……네?”
무심코 걸어가던 그녀가 우뚝 멈춰 현재를 쳐다보았다. 불퉁한 표정이 된 그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내, 내가 너무 눈치 없이 말했나……? 난 그냥 사실을 말해 준 건데…….
그녀의 얼굴이 순간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보통 사람은 몇 년씩 기다려도 안 될 수 있는 게 승진이라…….”
“…….”
“워낙 경쟁자도 많고 하다 보니까…… 운도 좀 작용하는 거고…….”
“…….”
“…….”
무마하려고 하는데 어째 갈수록 이상해져만 가는 느낌.
아이 씨. 입술을 깨문 그녀가 황급히 덧붙였다.
“그, 근데, 현재 씨라면…… 빠른 시일 내에 할 수 있을 것 같다구요, 충분히.”
“…….”
하하하.
서둘러 수습을 마친 그녀가 민망한 듯 혀까지 살짝 내보이며 웃었다.
‘못 말려, 하여튼.’
애교스러운 몸짓으로 제게 팔짱을 껴 오는 여자의 속내가 훤히 보여서, 현재는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이제는 그녀에게 져 주는 데 너무나 익숙해진 탓이었다.
30분쯤 뒤, 쇼핑은 어느덧 파장 분위기가 되었다.
쇼핑 말고는 별다른 계획 없이 나온 날이었기에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에 관해선 정해진 것이 없었다.
카트에 담긴 것들을 갈무리하며, 현재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제 살 건 거의 다 산 것 같은데. 우리, 좀 이따 점심 먹고 뭐 할까요?”
“……음.”
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은수가 별안간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뭔가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는 표정.
“맞다.”
“왜요. 뭐 하고 싶은 거 생각났어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묻는 그에게, 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생각해 둔 게 하나 있었거든요.”
“뭔데요?”
“음, 그런 게 있어요. 일단 이거 계산하구 빨리 가요.”
“……예? 어디인지부터…….”
“일단 가면 알게 된다니까요.”
“아니, 저, 은수 씨……?”
은수는 얼떨떨해하는 남자의 등을 떠밀며 계산대로 신나게 걸음을 옮겼다.
‘아빠, 엄마’로서의 데이트는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연인’으로서의 데이트를 할 차례였다.
* * *
[시공을 초월하는 로맨틱 코미디! <초미의 관심사>]
“이거요.”
“……이걸 보자고요?”
“네. 싫어요?”
결국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지난 번 강렬한 추억을 남겼던 문제의 그 영화관이었다.
현재는 은수가 내민 팸플릿을 내려다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녀가 내민 팸플릿에 나와 있는 영화는, 그녀의 취향엔 죽어도 맞지 않을 것 같은 로맨틱 코미디였으니까.
웬일로 먼저 영화를 보자고 해서 오기는 왔는데, 이 사람이 어째서 이런 걸…….
현재가 잔뜩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은수 씨 이런 거 안 좋아한다면서요. 비현실적이라고.”
“네, 맞아요. 기억하네요?”
“……근데 왜 맘이 바뀌었어요?”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는 어쩐지 쑥스러운데. 그녀는 공연히 팸플릿을 동그랗게 말아 접으며 미적미적 대답했다.
“그냥요. 이제는 꼭……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해서.”
“…….”
“얼마 전에 우연히 예고편을 봤는데 재밌어 보이더라구요. 혼자 보긴 좀 그렇고, 현재 씨랑 보면 좋을 것 같았어요. 괜찮죠?”
“…….”
요즘 들어 그녀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여러 번 실감하는 그였지만, 이럴 때는 특히 더 그랬다. 이 세상에 그런 달콤한 일은 없다며 사랑 이야기라면 무조건 판타지로만 치부하던 그녀가, 이제는 로맨스 영화를 자진해서 보겠다고 하다니. 실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이는 그녀의 가치관이 좀 더 유연해졌음을 시사하는 것일 터. 그로서는 그저 반가운 일이었다.
그래서 현재는 별생각도 않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은수 씨가 보고 싶다고 하는데 당연히 봐야죠.”
기대했던 대답에 그녀가 설핏 웃었다.
“그럼, 빨리 예매하고 밥 먹으러 가요.”
“그래요.”
“아참, 저번에 공짜 영화표 하나 받았던 것 같은데, 아직도 쓸 수 있으려나?”
“유효 기간 남았으면 쓸 수 있죠. 한번 확인해 봐요.”
“네. 어디다 뒀더라…….”
그녀가 무심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펼쳤다.
그런데 그때, 현재는 카드 칸 쪽에 노란 무언가가 비죽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그건 뭐예요?”
“네? 어떤 거요?”
쿠폰을 찾는 데만 열중하던 그녀가 그제야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슬쩍 보았다.
“……아.”
그러고는 대번에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은수는 잘못하다간 찢어질 것 같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빼서 그에게 건넸다. 노란 종이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숙했다.
“어? 이거…….”
“……기억나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힘내세요.]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남겼었던 포스트잇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과 대놓고 내보일 수 없었던 진심을 담아, 비타민 음료 병에 조심스레 붙여 놓았던.
깔끔하고 예쁜 노란색이었던 포스트잇은 어느새 살짝 색이 바래고 구겨져 있었다. 새삼 그때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가늠케 할 정도로.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요?”
이것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의외라는 듯 그의 눈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현재의 손에서 포스트잇을 도로 뺏어 가 지갑에 넣으며, 은수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럼요, 내 부적인데.”
“……부적이요?”
그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상하게 이걸 가지고 다닌 이후론 힘든 일이 닥쳐도 결국엔 술술 풀리더라구요. 덕분에 도움 쏠쏠히 받았어요.”
“…….”
그녀가 지갑을 살살 흔들어 보이며 짧게 윙크를 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여자는 이따금씩 이렇게 예상 못 할 행동으로 그를 놀라게 하곤 했다. 물론 그까짓 종이 쪼가리 하나 갖고 다니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별것 아닌 일. 하지만 그만큼 아무렇지 않게 버려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가 준 성의를 생각해서인지 그녀는 기어이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벅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엄마!”
그래서 더 생각할 새도 없이 그만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무수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영화관 한복판에서.
졸지에 은수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현재 씨……! 왜, 왜 이래요!”
“고마워서요. 너무 고마워서.”
그의 품 안에 꼼짝없이 가두어진 그녀는 경황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꼼지락거렸다. 영화관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제게로 파바박 꽂히는 것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아, 아니,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지금…….”
“…….”
“……다 우리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당혹스러운 듯한 은수의 목소리에, 현재는 매서운 눈길로 주위에 선 사람들을 빙 훑었다.
마치,
‘뭘 봐? 눈 안 돌려?’
하고 협박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
안 그렇게 생겨서 되게 무섭게 쳐다보네.
이게 웬일인가 하고 슬쩍슬쩍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기세에 눌려 그제야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 후 불분명한 수군거림이 여럿 들린 후에야, 은수는 그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졸지에 은수는 덫에 걸렸다 나온 사람처럼 숨을 살짝 헐떡였다.
“……두 번 고마웠다간 아주 목 졸려 죽겠네요. 딱히 고마울 일도 아닌데…….”
뭐, 어려운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고마울 일 맞아요, 나한테는.”
“…….”
단호하다 못해 단단하기까지 한 목소리.
물론 이걸 보여 주면 그가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은수였다. 하지만 막상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그녀도 어쩔 수 없이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밥 생각 따위는 단숨에 잊어버리게 될 정도로.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런 은수를 놀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배에서 별안간 천둥 같은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
거기다 뱃속의 별이는 어리석은 엄마를 한탄하는 것처럼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 정정한다. 밥 생각을 잊어버리게 될 정도는 아닌 모양이네.
‘……아가야, 먹고 싶은 게 많은 건 알지만 지금은 이럴 타이밍이 아니란다.’
아무리 뱃속이라지만 분위기 파악 좀…….
모르긴 몰라도, 별이는 엄청나게 건강한 우량아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시종일관 밥을 찾아 대는 걸 보면.
한숨을 폭 내쉰 그녀는 할 수 없이 현재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이제 빨리 예매하고 밥 먹으러 가요, 우리. 뱃속에서 지금 난리 났어요.”
“하하. 네, 얼른 가요.”
다시 팔짱을 낀 채, 그들은 사이좋게 매표소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이 데이트가 그런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