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80. 마침내 예스 (3)
자연스레 기억을 더듬어 본 은수는 마트에서 장을 볼 때 현재가 했었던 말을 자신이 지금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샌가 자신 또한 그때의 현재와 같은 마음이 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이 같아지니 자연스레 같은 말이 나오게 되는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스스로가 우스워져서 속으로 웃고 있는데, 그런 은수를 현재의 목소리가 깨웠다.
“은수 씨가 좋다고 하면 매일매일 이렇게 올 수 있어요.”
“에이, 매일매일은 됐어요. 아예 바다 근처에서 살면 모를까.”
“바다 근처에서 살고 싶어요?”
“네.”
그녀가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냥, 옛날 추억 때문에요. 언젠가부터 계속 육지에서만 살아서 그런가. 바다를 앞에 낀 멋진 집에서 살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은수 씨가 원하면 그렇게 해요.”
“나만 좋으면 안 되죠. 현재 씨가 바다 근처에서 살기 싫음 어떡해요.”
은수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던 현재의 표정이 티 나게 굳었다. 그러나 뒤에 있던 은수는 현재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사실 바다 앞에 사는 게 좋지만은 않대요. 창에 소금기도 끼고, 건강에도 별로 안 좋다 그러구…….”
은수는 계속해서 말을 조잘조잘 이어 나가고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더 이상 어떤 말도 들어오지가 않았다.
방금 전 은수의 말은 그의 맘에 퐁당 돌을 던진 것과도 같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와의 미래를 그리는 그녀. 지금껏 늘 꿈꿔 온 순간이었는데…….
그는 그것이 어느샌가 당장 제 앞으로 다가와 있음을 깨달았다.
“……은수 씨.”
“네?”
은수는 방금 전 제가 어떤 엄청난 말을 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갑작스런 그의 부름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
이 남자는 왜 불러 놓고 말을 안 해.
그는 여전히 계속해서 그녀를 이끌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잠시, 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은수를 불렀다.
“은수 씨.”
“……네에.”
그 뒤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다.
“아직도…… 결혼이 무서워요?”
……어.
이 또한 언젠가 한번 들었던 것도 같은 질문. 저편으로 넘어가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방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이나 지금 이 질문이나 액면상으로는 같은 말이었지만, 마찬가지로 그때 그녀의 마음과 지금 그녀의 마음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
“…….”
무슨 이유에선지 현재와 은수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바짝 다가온 바닷물에 발을 살짝 담그면서 걸으니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잠깐 동안 괜히 딴 짓을 하며 머뭇거리던 은수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은수의 조용한 대답이 파도 소리에 묻혀 들어갔다. 그러나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던 덕에 용케 알아들을 수 있었던 현재는 슬며시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미적지근한 대답에 실망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은수에게 ‘예전만큼은 아니다.’ 라는 말은 곧 ‘좋아지려고 한다.’ 쯤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란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혹시,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요?”
하도 많은 말을 해서 어떤 말을 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말……?”
“막무가내로 결혼하자고 했었잖아요.”
“……아.”
당연히 기억한다.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지.
“네. 기억해요.”
그때, 서툴게 고백하던 그의 모습까지도 생각이 나는 걸.
그때는 나나 이 남자나 참 많이 서툴렀었는데…….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상념에 빠진 채로 실실 웃고 있던 은수의 귓가로, 웬일인지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거, 뭣도 모르고 그냥 막 했던 얘기들이니까…….”
“…….”
“다 잊어버려요.”
“…….”
……이게 무슨 말이지?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말이 담고 있는 진의를 알 수가 없는 탓이었다. 은수는 급격하게 당황했다.
방금까지 결혼 얘기를 했었는데, 그 다음에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이제는 나랑 결혼하기 싫어졌다는 의미인가?
당면한 현실이 믿기지가 않아서 그녀는 잠시 동안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 말고는 도통 연결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결혼을 늘 부정해 온 입장이었다. 오히려 그가 결혼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 둘 다 편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자신이 바라 왔던 방향대로 입장을 선회한 듯한 그의 말을 막상 듣고 나니, 은수는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물결처럼 막 밀려들어 왔다. 결국 그도 자신에게 질려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아무리 멘탈이 보살급인 현재라고 해도, 시종일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해 온 그녀를 견뎌 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눈물이 차오르는 뜨거운 눈가를 겨우 억누른 은수는 애써 차분해지려 노력하면서 입을 떼었다.
“……그래요. 어차피 우리는 결혼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
“이제는 내가 현재 씨 마음 알고, 현재 씨도 내 마음 아는데…….”
“…….”
“그거면 됐죠……. 결혼 같은 거야, 뭐…….”
물론 서운하기는 해도 이 말만은 정말 진심이었다. 솔직히 말해 결혼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와 제 마음이 통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런데 은수가 말을 마치자마자, 앞서 가던 그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은수 씨 지금, 뭔가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
“…….”
“어쩌죠.”
“…….”
“은수 씨는 그런지 몰라도, 난…… 아직 만족 못 하겠는데.”
현재의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시선을 맞추었다. 은수는 그의 행동을 의아하게 지켜보았다.
이제 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민망함에 나려던 눈물도 쏙 들어가고,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방금 전 말도 그렇고…… 그가 이러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이런 뜬금없는 말까지.
“조금 갑작스럽겠지만, 잘 들어 줘요.”
갑자기 이게 무슨 분위기일까. 어리둥절해진 은수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현재가 시선을 모래밭으로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언제가 좋을까, 많이 망설였어요.”
“…….”
“은수 씨를 재촉하기가 싫어서, 실은 좀 더 이따가 말하려고 했어요. 근데…….”
“…….”
“아까 서 팀장님이랑 있는 은수 씨를 보니까 나도 모르게 조바심이 생겨서…… 오늘, 아니,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
“……내 인내심이 이렇게 바닥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나도.”
그 말에 은수의 속눈썹이 달싹였다. 현재의 진중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욱 느리게 이어졌다. 찰싹이는 파도 소리가 그의 목소리에 섞여 들고 있었다.
“그땐 내가 너무 막무가내였다는 생각을 쭉 해 왔어요. 은수 씨뿐만 아니라 나한테도, 시간이란 게 필요했던 거겠죠.”
“…….”
“은수 씨 눈엔 내가 아직도 많이 어리단 거 알아요. 그래서 많이 부족할 수도 있고, 또 살아가다 어쩌면 은수 씨를 힘들게 할 날이 올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은수의 가슴께가 불규칙하게 들썩거렸다.
“…….”
“지금 내가 매순간마다 은수 씨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랑하고 있는 이 마음만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차분한 목소리에서 그답지 않은 자잘한 떨림이 느껴졌고, 은수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었다.
순간, 뭔가를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요?”
갑작스러운 프러포즈였다.
미소를 지은 그가 내내 바지 주머니 속에 있던 반대쪽 손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은수의 눈앞으로 가져왔고, 꽃봉오리처럼 쥐어져 있던 손이 개화하듯 천천히 피어났다.
사방이 어두워서 그게 무엇인지 첫 눈에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그의 손바닥 위로 매끄러운 벨벳 케이스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
그것을 보자마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은수의 볼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그것이 촉매라도 된 것처럼, 지금까지의 일들이 찬란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참 힘든 시간이었다. 그리고 가까운 길을 참 오랫동안이나 빙빙 돌아온 느낌이었다.
“이제, 내가 전에 했던 말들은 다 잊어버린 거 맞죠?”
그는 확답 받듯이 그렇게 묻고는 환하게 웃었다.
“이게…… 내가 하는 진짜 프러포즈예요.”
그녀와 맞잡은 그의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은수에게선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현재는 초조한 나머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심장이 제 페이스를 찾지 못하고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기회를 엿보면서 시뮬레이션을 해 왔는데도 소용이 없다. 조바심에 멋있는 타이밍 같은 것도 따지지 않고, 충동적으로 해 버린 프러포즈. 아무리 은수의 맘이 예전보다 나아졌다 한들,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할지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었다.
혹시나 거절당하진 않을까 싶어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 작게 속삭일 수밖에 없는 소심함을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기를. 말만 거창한, 너무도 형편없는 고백에 그녀가 실망하지 않았기를.
부윰한 달빛이 현재와 은수의 머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고, 파도 소리가 훌륭한 배경 음악처럼 잔잔하게 깔리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건 그만의 히로인, 은수의 대사 한마디였다.
그때, 은수의 입가가 자그맣게 흔들리더니 그대로 호를 그렸다. 은수가 환히 웃자 현재도 덩달아 따라서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서야 현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용기를 얻었다.
기다림이야 지금껏 늘 그를 따라다녀 온 존재였다. 그래도 그것이 싫지 않았던 건, 그 대상이 은수였기 때문에. 더 기다리라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갸륵한 마음이 통한 걸까. 그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돌아왔어도 어쨌든, 결국 지금 그의 앞에는 웃고 있으면서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한 그녀가 있었다.
……이제는, 나도 용기를 내 볼까요? 그래도 될까요?
여전히 살짝 눈물이 고여 있지만 한편으론 기쁨이 서린 것도 같은 은수의 눈이 현재에게 물었다.
그러자 현재도 눈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요, 이제는.
“나랑 결혼해 줄래요, 은수 씨?”
그가 확인하려는 것처럼 다시금 물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둘 중 하나가 먼저 용기를 내지 못했을 뿐.
그렇게, 잠시 흔들림 없이 현재의 눈을 쳐다보고 있던 은수는 눈가에 매달려 있는 눈물을 슥슥 닦아 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화려하지도 않고,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그를 닮아 소박하기만 한 청혼이지만…… 자신에게만큼은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로 멋진 프러포즈라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요.”
마침내, 승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