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 마침내 예스 (2)
“근처에 식당이 있나…….”
잠시 주변을 살펴보던 현재 또한 저녁을 해결할 만한 곳이 있는지 검색해 보기 위해 폰을 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 행동을 은수의 손이 잽싸게 제지했다.
“왜 그래요?”
은수의 폰에는 이미 포탈 검색창이 떠 있었다. 나름대로 무언가를 검색해 본 모양인데. 벌써 식당을 찾은 건가?
“……나, 먹고 싶은 거 생겼어요.”
“어. 뭔데요?”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하는 건 꽤 드문 일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서 식당 이름이나 메뉴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
그런데 대답은 하지 않고 흥흥거리며 웃기만 하는 게…… 어쩐지 불안했다.
저 미소는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미소였다.
* * *
“…….”
이런 예감은 이상하리만큼 꼭 들어맞는 게 문제다.
현재는 무지하게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은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까 내가 다 검색해 봤어요.”
“……평소에는 안 먹던 거라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
“그래도 좀…….”
현재의 미심쩍은 눈빛이 잘 익어 가고 있는 은수의 컵라면 뚜껑을 향했다.
“참, 괜찮다니까요. 많이 먹는 게 문제인 거지 어쩌다 한번 먹는 건 괜찮댔어요. 아까 보니까 임신 기간 내내 먹었다는 사람도 있던데요, 뭐.”
그래도 그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정말 괜찮아야 할 텐데…….”
편의점 안 간이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둘은 각각 앞에 젓가락이 올라간 컵라면 하나씩을 둔 채였다. 편의점 창밖으로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게 나름의 운치는 있었다.
임신을 한 뒤로 인스턴트식품이나 즉석 식품 등은 입에 대지도 않으며 철저히 관리를 해 온 은수였다. 그 좋아하는 라면을 어쩔 수 없이 단칼에 끊어 버렸으니 이쯤 되면 한 번쯤 먹고 싶어질 만도 했다.
그리고 그도 그렇지만, 썩 내켜 하지 않는 현재를 편의점으로 데려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은수가 대학 시절 MT 간 얘기를 해 준 것 때문이었다.
‘그때 바다 근처에서 컵라면을 먹었는데, 바닷바람 맞으면서 먹는 컵라면이 그렇게 맛있더라구요. 현재 씨랑 꼭 다시 한 번 먹어 보고 싶어요.’
나와 꼭 같이 먹어 보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먹게 해 줘야지…….
현재는 정말 마지못해 은수의 편의점 행을 허락했다.
그래서 지금은 결국 쌍으로 물까지 부어 놓고 앉아 있긴 했지만, 컵라면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영 미덥지가 못했다. 은수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현재 씨! 걱정 마요. 오히려 뭔가를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스트레스가 더 안 좋은 거래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먹지 못하게 할 수 있겠냐고. 더 이상 안 좋은 눈초리를 하고 있다간 그의 눈치를 보느라 은수가 제대로 먹지 못할 게 뻔했다.
할 수 없이 현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요. 그래도 이번만이에요. 알겠죠?”
“네.”
짐짓 웃은 은수는 이제 다 익은 것 같다며 젓가락을 들었다.
컵라면 냄새가 원래 이렇게 향기로웠던가. 입덧할 때 맡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맛깔 나는 냄새. 비록 환경 호르몬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지만, 이 냄새는 정말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뜨거운 면을 후후 불어 얼른 입 안에 넣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
그야말로 무아지경. 감동의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그녀답지 않게 너무 귀여웠다.
현재도 덩달아 라면을 입에 넣고는 천천히 씹으며 은수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와, 진짜 맛있다. 이게 원래 이렇게 맛있었나?”
“다행이네요, 맛있다니까.”
“지금만큼은 이게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 것 같아요.”
이제껏 이걸 안 먹고 버틴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은수는 국물까지 야무지게 들이켰다.
회사에 다녀온 차림으로 컵라면을 들이켜는 여자의 모습은 이질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친근했다. 새삼 제 앞에서 은수의 행동이 점차 편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보는 사람도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게 잘 먹는 게 기특해서, 현재도 열심히 제 몫의 컵라면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
그러자 이제는 반대로 은수가 현재의 먹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그녀가 먹자고 하는 것이면 거절하는 법이 절대 없었다. 그것 또한 그 나름의 배려일 터. 은수는 컵라면을 먹다 말고 괜히 뭉클함을 느꼈다.
“고마워요. 만날 내맘대로 먹고 싶은 거 정하는데, 마다 안 하고 잘 먹어 줘서.”
새삼스러운 감사 인사에 그는 조그맣게 웃었다.
“뭐가 고마워요. 그냥 내가 딱히 가리는 게 없어서 그런 건데.”
그래도 하나하나 다 고마운걸.
은수가 제 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아챈 현재가 씩 웃었다. 그러고는 면발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지나가듯이 말을 던졌다.
“근데 오늘, 왜 혼자 가겠다고 한 거예요?”
……아, 지금은 그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젓가락으로 면발을 잔뜩 집어든 채 은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그것을 입 안에 욱여넣고는 우물거렸고, 그것을 다 삼키고 나서야 대답을 했다.
“그냥…….”
“…….”
“몇몇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의심하는 것 같더라구요. 뭔가 있는 것 같다면서……. 정식으로 밝히기 전까지는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숨기려고 한 게 아니라…… 오늘은, 생각을 좀 정리하려고 그랬어요. 내일 꼭 말해 주려고 그랬어요.”
숨기려던 게 아니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불필요한 말을 마구 덧붙이는 게 귀엽기만 해서, 현재는 그저 피식 웃었다.
“알았어요. 나도 그냥 물어본 거예요, 무슨 일 있나 하고.”
“……네.”
갑자기 세상에서 제일 맛있던 컵라면이 삼켜지질 않았다. 제가 말해 주지 않는 이상, 현재는 사건의 전말을 전혀 알 길이 없을 테니까. 그런 것까지 꼬치꼬치 말하는 건 유치한 것 같다가도, 그가 하나도 모르고 있을 걸 생각하면 심통이 났다.
그녀는 서서히 식어 가는 컵라면을 젓가락으로 괜히 휘휘 저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인기 많으래요? 질투 나게…….”
“…….”
“임산부한테 현재 씨를 뺏기게 생겼다고, 나 공공의 적 될 것 같던데요.”
라면을 씹고 있던 현재가 그 말에 퍼뜩 은수를 쳐다보았다.
“누가 그래요?”
……누구긴 누구겠어요. 잘난 우리 팀 여 후배님이시지.
“……아뇨, 뭐, 딱히 누가 그런 건 아니고…… 통상적으로…….”
뒤따라 떠오르는 민희의 얄미운 얼굴과 목소리를 그녀는 애써 지워 냈다. 자고로 얼굴이 잘생긴 남자를 만나면 피곤하다고 했다. 게다가 도현재는 잘나도 여간 잘난 게 아니니 더 피곤했다.
한편, 은수의 말을 들은 현재의 얼굴은 자못 심각해져 있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하긴 뭘 해요. 그냥 모른 척 지나갔지…….”
“은수 씨 성격에 그걸 그냥 지나쳤다고요?”
“……내 성격이 뭐가 어떤데요.”
듣고 보니 이상하네. 내가 뭐 어때서? 은수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그러나 현재는 두 가지 일화로 아주 간단하게 은수의 성격을 정의 내렸다.
“삼계탕 먹다가 갑자기 임신 고백하고, 정의롭지 못한 인간은 대놓고 망신 주기도 하는…….”
“…….”
“……한마디로 거침없는 사람이죠.”
“……아.”
……이유까지 들으니 도저히 수긍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데.
은수는 남은 라면을 입에 넣은 채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건 맞는데…… 그냥 그러기 싫었어요.”
“…….”
“……전에 현재 씨가, 혼자서 막 결정 내리고, 맘대로 선언하고…… 그러지 말라면서요.”
“…….”
“그래서 그런 거예요.”
……말하고 나니까 부끄럽네.
은수는 말을 마친 자신에게로 와 닿는 현재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묵묵히 컵라면을 먹었다.
진심을 내보이는 건 언제나 어려웠다. 그래도 이제는 이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은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 가운데 있던 볶음 김치를 그가 자신의 앞으로 슥 밀어 주는 것이 보였다.
“……고마워요.”
무심하게 김치를 밀어 주는 행동과, 그를 뒤따르는 다정한 말의 조합이 영 어울리지 않아서 픽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아니에요.”
“…….”
“현재 씨 라면 다 불겠어요. 얼른 부지런히 먹기나 해요. 바다 보러 가야 되니까.”
“네, 알았어요.”
은수는 MT에서 대학 동기들과 함께 먹었던 그 라면보다, 지금 현재와 함께 먹고 있는 이 퉁퉁 불어 터진 라면이 왠지 모르게 몇 배는 더 맛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렇게 조촐한 저녁을 때우고, 현재와 은수는 산책을 할 겸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간만에 해 본 일탈 아닌 일탈이 너무 좋았다. 당장 내일 아침 회사에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의 손을 잡은 채 검은 바다의 지저귐을 들으며 하는 산책은 은수로 하여금 꿈속에 빠진 듯한 착각을 하게 했다.
매일매일 이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고민과 생각들이 파도와 함께 밀려가 버리고, 현재와 자신만이 남아 행복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모래밭을 걸으며 나란히 발자국을 만들어 가던 중, 은수는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거렸다. 그러자 그의 걱정스러운 눈초리가 바로 날아왔다.
“……춥죠.”
“네? 아, 아니에요.”
그는 곧장 겉에 입었던 제 셔츠를 벗었다.
“이거 입어요.”
그는 이제 흰 반팔 티셔츠만 입은 차림이었다.
저러다 감기라도 들면 큰일인데. 은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녜요. 나 괜찮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얼른 입어요.”
“현재 씨 춥잖아요. 나중에 나처럼 고생하면 어쩌려고…….”
“난 은수 씨랑 다르게 튼튼해서 괜찮아요.”
은수의 거듭된 만류에도 현재는 기어코 자신의 셔츠를 은수에게 입히고 말았다.
“괜찮다니까…….”
“말 들어요. 내가 아픈 것보다 은수 씨 아픈 게 더 고생이에요.”
……하기야, 그 말도 맞긴 하네.
대꾸할 말이 없어진 은수는 어깨에 얹힌 그의 셔츠를 괜히 더 끌어당기며 저보다 앞서 걸어가는 현재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손아귀의 힘을 느꼈는지, 그가 힐끗 고개를 뒤로 돌려 은수를 보았다.
“바다 보니까 어때요.”
“너~무 좋아요.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에요.”
“…….”
“진작 올걸, 이렇게 좋은데…….”
어, 근데 이 멘트 왜 이렇게 익숙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