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 마침내 예스 (1)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현재는 곧바로 덧붙였다.
“은수 씨에게 상처를 준 분이라는 건 유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저에게도 기회가 생긴 셈이니까.”
“…….”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
“……그럼.”
그러면서 그는 지훈을 향해 꾸벅,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한 번 하더니 뭐라 대꾸할 새도 주지 않고 그곳을 떠 버렸다.
고맙다는 얘기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찌 보면 은수 대신 그가 엿을 먹인 느낌마저 들었다.
“……하.”
현재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지훈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제대로 당했네.
* * *
“……갔어요?”
현재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은수가 꺼낸 질문이었다. 궁금해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서, 현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갔을 거예요.”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린 은수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먼저 들어와 놓고도 바깥 상황이 걱정돼 미어캣처럼 계속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현재가 제 옆자리에 앉자 은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미안해요. 괜히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이건 당신이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닌데. 현재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았다.
“내가 오히려 더 미안해요. 은수 씨 일인데, 내가 괜히 끼어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은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황급히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무슨 소리예요.”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 몸을 살짝 비비 꼬며 덧붙였다.
“처음엔 좀 당황하긴 했는데…… 현재 씨가 와 줘서 좋았어요. 엄~청 든든했어요.”
“…….”
“타이밍을 어쩜 그렇게 잘 맞춰요? 등장이 너무 멋있더라.”
“…….”
잠시 기분이 울적하다가도, 반짝 눈을 빛내며 조잘대는 은수를 보고 있으면 금방 또 웃음이 나곤 했다.
지훈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오면서, 혹시 은수가 제 일에 괜히 나선다고 생각했을까 봐 기분이 꿀꿀했던 현재였다. 그런데 은수의 말을 들으니 비로소 기분이 풀리고 안심도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적어도 은수의 일에 제 일처럼 나설 수 있는 입장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실례한 걸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잠시 뒤, 환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나 들어오고 나서 무슨 얘기 했어요?”
“……그냥, 왜 은수 씨가 결혼을 싫어하게 됐는지…… 뭐, 그런 거요.”
“아아…….”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짐작하긴 했는데.
현재는 순간 은수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지는 것을 캐치했다.
“내 멋대로 말해서 미안해요. 그 사람은 모르는 눈치던데.”
“……말해 준 적이 없거든요.”
그쪽에서 궁금해한 적도 물론 없지만.
물어보지도 않는데 굳이 먼저 말을 해 줄 필요를 못 느꼈던 것뿐이었다.
“일부러 숨길 만큼 비극적인 가족사도 아닌데요, 뭐. 그냥…… 궁금해하지 않아서 말해 주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 얘길 내가 먼저 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
“그러니까 그런 걸로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나는.”
언젠가부터 괜찮다는 말만 줄곧 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현재만 옆에 있으면…… 그녀는 모든 것이 괜찮다는,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는 어떨지 몰라도.
“근데 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고.”
“혼자 간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맘이 놓이질 않아서요. 대충 시간 맞춰 와 본 건데 그러고 있는 게 보여서…….”
“……그, 그럼, 나 소리 지르고 그러는 것도 다 봤겠네요?”
……아, 어떡해. 완전 미친년처럼 달려들었던 것 같은데.
아까 전의 제 모습을 떠올리던 은수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모습에 현재는 설핏 웃었다. 정작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렇게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고 있으면 귀여워서라도 가만히 있고 싶은 맘이 들었다.
“……그건 잊어버려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우리 별이가 은수 씨 닮으면 사나이 중에 사나이겠어요.”
“……뭐라구요?”
은수의 얼굴이 또 한 번 구겨지자 현재가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하여간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농담이에요.”
“……아니면서. 그리고 별이는 나 닮으면 안 돼요, 현재 씨 닮아야지.”
“왜요?”
“아들이잖아요. 내 얼굴 닮으면 너무 여성스러워서 안 돼요.”
그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예전에는 입술 한 군데라도 닮길 바라면 다행이었는데, 어느새 은수는 별이가 그의 모든 것을 닮았으면 좋겠는 모양이었다. 정말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현재가 새삼 그 사실에 겨워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은수는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아, 맞다. 원래 큰아들은 엄마 많이 닮는다던데.”
“그래요?”
“네. 첫째는 보통 딸이면 아빠 닮고, 아들이면 엄마 닮는대요. 특히 머리는 거의 엄마 유전이라던데.”
“……그럼, 우리 별이도 나중에 최연소 팀장 하는 거 아니에요?”
현재의 농담 아닌 농담에 은수가 픽 웃었다. 그러고는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했다.
“……뭐, 못 해도 대학 조기 졸업쯤은 하겠죠.”
자만 섞인 그 말에 현재도 픽 웃고 말았다. 그렇게 잠시,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웃었다. 잠깐이나마 모든 상념들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지훈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까지도…….
지금은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말자.
저도 모르게 다시 떠올려 버린 생각들을 그만 떨쳐 버리려, 은수는 괜히 볼멘소리를 냈다.
“근데 오늘도 우리 집이네요. 진짜 지겹다.”
비밀 사내 연애의 비애. 현재도 이해하는 바였다.
“그러게요. 요새는 여기 있는 시간이 워낙 많긴 했죠.”
“현재 씨는 안 지겨워요?”
“……난 잘 모르겠는데. 은수 씨랑 있어서 그런가…….”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누군 안 그런 줄 아나. 그냥 장소가 매번 똑같으니까 한 말이지…….
은수가 불만스러운 말투로 쏘아붙여도 현재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러던 그가 잠시 눈을 치켜뜨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은수에게 불쑥 물었다.
“은수 씨, 우리 여행 갈까요?”
“……여행이요?”
여행이라. 워낙 바빠서 생각한 적도 없던 것이었다. 갈 수만 있으면 가고 싶지.
그러나 그녀가 발리나 하와이 같은 해외를 떠올리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현재는 매우 소박한 대안을 내놓았다.
“거창하게는 말고, 그냥 가까운 데 놀러나 가자고요. 이제 별이가 세상에 나오면 한동안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
원래 여행 같은 걸 별로 가 본 적이 없어서 염두에 둔 적도 전혀 없었다. 여행이란 건 보통 가족끼리 가기 마련인데, 저에겐 변변한 가족이랄 게 없었으니까. 좀 크고 나서, 어느 무렵부터는 워낙 쉴 새 없이 일하고 달리느라 여가라든가 취미 생활 같은 데 쏟을 시간이 딱히 없었고. 그나마 그녀가 했던 여가 활동이라고는 주말 같은 때 TV 시청하는 게 다였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은수는 꽤 괜찮은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거라곤 늘 똑같은 삭막함뿐이었는데, 여행을 간다면 기분 전환도 될 것이고 또 태교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갑작스럽게 확 솔깃했다.
“괜찮은 거 같아요. 재밌겠다.”
“그쵸.”
신나하는 그녀를 보며 물끄러미 웃던 그가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 데나, 생각나는 곳 있어요?”
가고 싶은 곳?
가고 싶은 데야 여러 곳이었지만,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한 가지였다.
“……바다 보고 싶어요.”
“바다요?”
“네. 워낙 안 본 지 오래돼서, 보고 싶어요.”
‘바다’라는 말을 읊조려 보던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바다도 종류가 많은데. 동해, 서해, 남해…….”
“뭐, 그냥 아무 바다나 괜찮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냥 바다면, 차 타고 가면 널린 게 바다죠.”
……아, 그러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현재의 말에 은수는 대번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 되었다.
“우리, 바다 가요!”
“그래요. 어디든 가요.”
남자의 어르는 듯한 말에 은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요! 지금 가요, 바다.”
“……지금요?”
당연히 나중에 가자는 말일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눈을 빛내는 은수 덕에 현재는 잠시 당황했다. 여자는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충동적인 면이 있었다. 그런 것마저도 시원시원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그가 할 생각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녀 덕분에 그는 절로 시계를 찾게 되었다.
“음, 지금 가면 시간이 너무 늦을 텐데…….”
“금방 보고 오면 되죠, 드라이브 겸. 아직 저녁밖에 안 됐는데.”
“……밤바다는 많이 추울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염려하는 현재의 말에 그녀는 아무 걱정 없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갑자기 너무너무 보고 싶어졌어요.”
“…….”
현재가 입술을 다문 채 은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 괜찮을까. 조금만 추워도 금세 골골거릴 것 같은데.
은수는 그런 그를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일단 그의 옷자락을 쥐고 흔들었다.
“가요~ 네? 나 진짜 보고 싶단 말이에요. 못 보면 잠이 안 올 것 같아.”
“…….”
“응? 제발요.”
평소답지 않게 이렇게 치대 오기까지 하면 내 주제에 도저히 가지 말자고 할 수가 없는데……. 은수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고 마는 현재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
에라, 모르겠다.
현재는 어쩔 수 없이 주머니 속의 차키를 집어 들었다.
“그래요. 갑시다, 바다.”
“오! 진짜죠?”
그의 말에 은수는 뛸 뜻이 반색했다.
저렇게나 가고 싶을까…….
“네. 얼른 준비해요.”
“아싸. 빨리 가요. 최대한 빨리 다녀와야지.”
가자는 말에 아이처럼 신이 나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벌떡 일어서는 은수의 모습을 보며, 현재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 버렸다. 은수는 이제 급기야 그의 등을 현관으로 떠밀고 있었다.
천하의 민은수를 누가 말리리.
갑작스레 밀어붙이는 힘에 현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 * *
그들은 결국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바다에 도착했다.
바닷가와는 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주차했는데도 내리자마자 차가운 바다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은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우, 춥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괜히 경고한 게 아닌데.
현재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그녀를 좇았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요. 추울 거라니까…….”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추운 건 사실이었지만, 제가 고집을 부려 오자고 한 것이기에 그녀로선 불평도 사치였다.
어쨌든 추운 온도에도 이 짭짤한 소금기 자체가 좋았다. 한동안 내륙에 사느라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바다 내음은 잔뜩 예민해져 있던 그녀의 코를 한껏 자극했다.
“근데 은수 씨, 배고프지 않아요? 우리 오늘 저녁도 안 먹었는데.”
“아, 맞다. 그러네…….”
너무 급하게 오는 바람에 저녁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그녀는 급격하게 배가 고파 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뱃속의 별이도 굶주려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특정한 기억이 은수의 머릿속을 휙 스쳐 지나갔다.
……아, 맞아.
은수는 그것을 머릿속에 떠올리자마자, 몸에 밴 습관처럼 폰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