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 삼자대면 (2)
예의 있는 말투 속에 숨겨진 가시가 느껴졌다.
뭐라고 대꾸하려던 지훈은 잠시 입술을 꼭 다문 채 현재를 쳐다보았다.
키나 체구는 저와 비슷한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신입 사원인 데다 어리고 유순해 보이는 타입이라 그다지 위협적인 상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아이의 아빠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남자에게선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들었다.
하기야, 저번에 그 한 팀장 일도 그렇고, 결코 만만하게 볼 놈이 아닌 것 같기는 했다.
“……미안합니다. 실례를 범했네요.”
“아시면 됐습니다.”
현재의 올곧은 대답에 지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확실히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그런데 그쪽이,”
“도현재입니다.”
제 이름 아시지 않습니까.
현재는 또 득달같이 서늘한 목소리로 호칭 정정을 요구했다. 아무래도 이런 사소한 데서도 주도권을 뺏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라고, 옆에서 지켜보는 은수는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지훈은 어쩐지 한풀 꺾인 듯한 목소리로 현재에게 다시금 물었다.
“그래, 그런데 도현재 씨가 정말로…… 아이 아빠가 확실합니까?”
“…….”
“그때는 나랑 은수가 사귀고 있었을 때인데요.”
“지훈 씨, 그건…….”
그건 애저녁에 이미 다 해명한 사실이지 않은가.
억울한 마음에 다시 한 번 은수가 개입하려 했지만, 현재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것을 잘라 냈다.
“네. 확실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지훈이 재차 묻자, 현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답지 않게 불손한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 날짜를 기억 못 하는 바보는 아니니까요.”
“…….”
“그러는 서 팀장님은 기억하십니까? 마지막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
그때, 은수도 이런 식으로 질문을 했었다. 그리고 지훈은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으니까.
지훈의 표정을 면밀히 살피고 있던 현재는 힐끔 은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조바심 때문인지 은수가 잔뜩 경직된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처음부터 이 상황에 개입하려던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웬일로 혼자 가겠다고 선언해 버린 은수가 걱정되는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선 길이었다. 은수가 집에 무사히 귀가하기만 하면 그것까지만 확인하고 다시 발걸음을 돌릴 생각이었는데.
웬 남자가 은수를 향해 큰소리를 내고 있는 걸 보자마자 머릿속의 퓨즈가 나가 버렸다. 엿들으려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자연스레 듣게 된 것뿐.
서지훈. 현재도 이미 그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그녀와 자신의 첫날밤, 그러니까 그가 졸지에 그녀의 샌드백이 되어야만 했던 그날 밤. 은수가 정말로 베개 세례를 퍼붓고 싶었던 남자는 제가 아니라 바로 눈앞의 이 남자였다는 걸, 현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가 결혼이 싫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이별을 선언해버린 개자식─적어도 그 입장에선 그랬다.─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본래 누군가를 쉽게 미워할 정도로 못난 성정은 아니었다. 질투엔 오히려 무딘 편이었고. 거기다 사람이 누군가를 싫어할 때는 꼭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던 그였지만, 이 남자는 이상하게 처음부터 이유 없이 싫었다. 물론 지금은 은수를 막 대하는 것만으로도 싫어할 이유가 아주 충분했다. 다소 그답지 않은 합리화.
“좀 어때요. 많이 놀란 거 아니에요?”
“괘, 괜찮아요…….”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밤공기가 생각보다 쌀쌀해서 그런가 봐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지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제 앞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그들은 영락없는 커플의 모습이었다. 철저하게 존댓말을 쓴다는 점을 뺀다면.
그런데 존댓말이 두 사람을 덜 친밀한 사이로 보이게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간에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금슬 좋은 부부처럼 보이게 했다. 거기에 지훈은 뚜껑이 확 열렸다.
“또 감기 걸리면 어떡해요. 얼른 들어가요.”
“……네.”
낯빛이 좋지 않은 은수가 각별히 신경이 쓰였다. 얼른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내야 했다.
따뜻하기만 하던 현재의 눈길은 금세 식어 다시 지훈을 향했다.
“은수 씨가 임신을 한 뒤로 늘 감기 기운이 조금씩 있어서, 얼른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네요.”
“…….”
“은수 씨 먼저 들어가요. 나도 나중에 뒤따라 올라갈게요.”
“……나도 좀 이따 같이 올라가도 되는데.”
“얼른요. 고집 부리지 말고.”
사실은, 그를 지훈과 함께 남겨 두고 올라가는 것이 편치 않은 마음이었다.
은수는 현재의 눈치를 슬슬 보며 금방 들어가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그럼, 빨리 와요.”
“알았어요.”
빨리 오겠다는 답을 받고서야 은수는 할 수 없다는 듯 미적미적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그곳엔 두 남자만이 남은 채였다.
그들의 침묵을 먼저 깬 건 현재였다.
“여기서 하기엔 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
“자리를 옮기시죠, 서 팀장님.”
매우 깍듯한 말투였지만, 그의 눈빛은 깍듯하지가 못했다.
“네, 그러죠.”
그리고 어김없이, 지훈의 눈에서도 현재의 것과 비슷한 불꽃이 튀었다.
은수를 둘러싼 두 남자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인 셈이었다.
* * *
두 사람은 그 근방의 카페로 향했다.
음료를 받아 온 두 남자 사이에는 잠시 동안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러다 현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서 팀장님에 대해 좀 알고 싶었습니다. 은수 씨가 과거에 어떤 사람을 만났었는지 궁금했거든요.”
“…….”
“하지만 이번 한 번으로 끝내야 할 것 같네요. 두 번 만나 할 짓은 아닌 것 같아서요.”
“……피차일반입니다.”
묵직한 무게가 실린 대답. 입장은 무척 달랐지만, 심리 상태 자체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현재는 먼저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한 가지만 당부하겠습니다. 다신 은수 씨를 흔들지 마세요.”
“…….”
참으로 당돌한 신입 사원이 아닐 수 없었다. 고작 신입 주제에, 타 팀 팀장에게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단 말인가.
지훈은 그의 말에 피식, 코웃음을 쳤다.
“말하는 걸 보니까…… 무서운 게 없나 보네요, 신입 사원이.”
“…….”
“다른 팀이라 미처 몰랐는데, 은수가 고생 좀 했겠어요.”
역시 팀장의 짬밥은 달랐다. 상대의 처지를 이용해 비꼬는 것이 꽤나 수준급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보란 듯 여유롭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그 사람인데.”
……하하, 어지간히 지기는 싫은가 보네. 눈앞의 남자는 볼수록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다.
진지한 눈빛으로 돌변한 지훈이 날카롭게 물었다.
“……방금 전 그거, 명령입니까?”
‘감히 너 같은 신입 사원 주제에 나한테 명령을 해?’ 같은 뉘앙스였다.
“…….”
잠시 그를 조용히 쳐다보던 현재는 묵묵히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아뇨. 부탁입니다.”
부탁?
의외의 대답에, 지훈은 현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현재의 얼굴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늘 맘을 굳게 닫아 놓고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나에게 이제 막 그 문을 손톱만큼 열어 주려고 하는데…… 서 팀장님 같은 사람 때문에 그걸 다시 닫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허, 참.”
어이가 없어진 지훈에게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도현재는 그의 생각보다 더욱 건방진 놈이었다. 감히 네까짓 게 뭐라고. 저런 놈은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 필요가 있었다.
지훈이 이 괘씸한 걸 어떻게 조질까 고민하고 있는데, 현재가 불시에 그 사이를 치고 들어갔다.
“은수 씨가 왜 결혼을 싫어했는지…… 그 이유를 혹시 알고 계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지훈은 잠시 멍하니 현재를 쳐다보았다. 자신에 차 대답하려고 했지만,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는 탓이었다.
은수와는 나름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 봤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은수는 질색을 했지만, 그냥 일시적인 반응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러는 이유를 따로 물은 적은 없었다. 원래 그 나잇대 여자들은 다 그런 편이니까,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그런 이유를 하나하나 다 따지고 드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남자의 말을 듣고 돌이켜 보니, 그녀의 결혼 혐오 정도는 꽤나 심각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지? 왜 그랬던 거지?
지훈은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하려 애쓰면서 현재를 쏘아보았다.
현재는 일관되게 침착한 얼굴이었다.
“은수 씨의 허락도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모르신다면 이해가 되지 않으실 테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
“은수 씨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건 알고 계시죠.”
“……그게 그거랑 연관이 있습니까?”
일단 말은 꺼냈지만, 더 말할 엄두가 쉽게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가 진실을 알게 하려면…… 그래서 더 이상 은수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현재는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는,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생전에 어머님을 두고 외도를 좀 하신 모양이에요. 그런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많이 힘들었겠죠. 남자에 대한 불신과 결혼에 대한 혐오도 쌓였을 테고요.”
“…….”
“그게 일종의 트라우마같이 남은 거죠. 정신적인 이유였습니다.”
현재의 말을 듣고 나자, 지훈은 잠시 무언가에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은수가 왜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할 마음도 없으면서 자신을 갖고 논 거라고만 생각해 분개했었다. 큰맘 먹고 준비한 프러포즈를 단칼에 거절했던 그날의 은수. 저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몹쓸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서, 그래서 그녀를 그렇게 버려두고 나간 거였다.
“…….”
제 아픔만 생각했지, 은수의 사정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헤어져도 은수는 별 타격 없을 거라 생각했고, 심지어 자업자득인 거라는 못된 맘까지 들었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아까 전 은수가 했던 말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3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바꿔 놓기에는 그 정도면 긴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바뀔 것 같았으면 진즉에 바뀌었을 거라고, 그런데도 바뀌지 않았으니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 은수라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가 해 주는 말을 듣자마자, 지훈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유도 정확히 모르면서 사람을 바꾸려 든다는 건 간단히 말해 오만이었다. 3년을 사귀고도 제일 중요한 사실을 몰랐다. 그 이유를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는 게 스스로 놀라울 지경이었다.
은수와의 사이를 갈라놓은 건 결국 은수도, 결혼도 아니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오만함이었다는 것을, 그는 애석하게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것이다.
“……모르셨나 보네요.”
“…….”
“정말 은수 씨를 사랑하신다면 더 이상은 이러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
“서 팀장님이 아니라도, 그 사람…… 이미 힘든 일을 너무 많이 겪었어요.”
지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새파란 신입 사원은 그러길 바라고 이 얘기를 꺼냈을 터였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현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돌아서려다 말고 다시 그를 쳐다본 현재가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
“고맙습니다.”
……갑자기 뭐가 고맙다는 거지.
지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현재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