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6. 삼자대면 (1)
“……이제 와?”
“…….”
그건…… 또 망할 서지훈이었다.
돌아서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은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어야 했다. 평소 그의 얼굴을 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건만, 오늘만큼은 유독 산산이 부서졌다고 생각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사납도록 머릿속에 박혀들었다.
……일진 한번 드럽게 사납네. 어쩜 반갑지 않은 일들이 이리도 하루 만에 몰려오는 거지.
은수의 마른 입술이 아프게 꾹 깨물렸다.
하지만 그런 은수와 달리 지훈은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쁜 모양이었다. 그녀가 건물 앞으로 다가서자 그는 기다린 것처럼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좀 늦었네. 일찍 올 줄 알았더니.”
“…….”
……상대하기 싫으니까 제발 좀 갔으면 좋겠는데, 차마 말을 내뱉을 힘도 없다.
그녀는 그를 애써 외면하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번처럼 은수를 억지로 제 쪽을 향해 돌려세웠다.
“뭐 하는 짓이야?”
“……오늘은 저번에 못 다한 얘기 좀 하자. 응?”
남자의 눈빛이 퍽 애절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애써 외면했다. 속에선 부아가 끓었다.
“……싫어. 난 할 얘기 없어.”
“난 있어.”
“난 없다고.”
“은수야.”
“그만 좀 해, 지훈 씨.”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가관이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머지 날카롭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진짜 갑자기 왜 이래? 난 이미 지훈 씨한테서 정 뗀 지 오래야. 근데 갑자기 몇 개월 만에 와서는 나를 아직도 사랑한다고? 나한테서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잠시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던 지훈은 이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야. 네가 다시 나한테 되돌아오는 거.”
“……그게 지금 가능하다고 생각해?”
“불가능할 것도 없지. 어차피 넌 그 아이 혼자 키울 거라며. 아이를 지우라고 했던 건 나도 많이 반성하고 있어. 어쨌든 내가 옆에서 도와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퍽이나 문제가 없겠다. 은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지훈 씨가 무슨 마더 테레사야? 자기 핏줄도 아닌 애를 같이 키워 주게?”
“……할 수 있어. 믿어 줘.”
“믿어 주건 말건 이미 다 끝난 얘기야. 그만 돌아가.”
“민은수!”
역시, 상대적으로 매달리는 입장에 있음에도 그의 다혈질적인 성미는 어디로 가지 않은 채였다.
지훈은 결국 자리를 벗어나려는 그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날 쉽게 지울 수 있었어? 3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야?”
“…….”
화들짝 놀라 커진 그녀의 눈에는 이내 예리한 날이 섰다.
하, 지금 누가 할 소릴 하고 있는 건지. 웃기지도 않아.
“아무것도 아니었냐고?”
“…….”
“아니, 어떻게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었겠어? 결혼 안 하겠단 한마디에 그렇게 날 내팽개쳐 놓고 간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3년’이나 만난 사람이라고 짜증나게 미련이 남더라. 억울하기도 하고.”
“…….”
“근데, 이해하기로 했어. 난 어차피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결혼도 못 해 주는 형편없는 애인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다 잊어 주기로 했어. 근데, 그게 다 내 잘못이니?”
그녀는 이제껏 눌러 왔던 화를 모조리 쏟아부을 각오로 냉철하게 말을 이었다.
“말 나온 김에 확실히 하자. 난 분명히 결혼할 생각 없다고 3년 전부터 누누이 말했었어. 근데 그걸 무시한 건 당신이었지.”
“…….”
“결국 딴 여자 만나 결혼하겠다고 홀랑 내뺀 건 서지훈! 너였잖아. 애초에 네가 노력해서 날 바꿔 놓을 생각이나 있었니?”
“……뭐? 너?”
“그래, 너. 결혼해 주지 않으면 싫다 그래서 곱게 헤어져 줬잖아. 구질구질하게 안 붙잡았잖아! 옳다구나 하고 간 건 넌데, 왜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러는 건데!”
그녀의 머릿속으로 그 때문에 괴로워하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임신을 한 뒤로는 정말 오랜만에 소리를 질러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보다 두 살 많은 지훈을 ‘너’라고 부르는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한참 씩씩거렸다.
지훈은 이처럼 머리끝까지 화가 난 은수는 처음 보는 것 같아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
너무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임신 탓에 약해져 버린 이를 꼭 깨물고 있었나 보다.
그녀는 혀를 통해 피가 스미는 듯한, 찝찔한 쇠 맛을 느꼈지만 한번 터져 버린 입은 계속해서 한을 토해 내듯 말을 씹어 뱉었다.
“……은수야.”
“내 이름 부르지 마. 너 같은 놈이 부르라고 있는 이름 아니니까.”
“……그래, 미안해. 그러니까 좀 진정해. 너 도대체…….”
그는 그녀와 싸움을 벌이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화를 억누르는 것처럼 목소리를 깔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드는 지훈을 향해, 은수는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늘 너만 이성적이고, 너만 똑똑하지. 질린다, 정말.
“…….”
“…….”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아이에게 좋을 리가 없으니까.
아이를 가진 여자의 기세가 생각보다 너무도 대단한 나머지, 지훈도 그녀를 쳐다만 볼 뿐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르고, 그나마 진정이 된 은수가 조용히 읊조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이제 결혼이 무섭지 않아.”
“…….”
“결혼이란 거…… 괜찮은 거 같기도 해.”
……그 사람과 함께라면.
뒷말은 뱉지 않고 삼켰지만, 그 말만으로도 지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이건 지훈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제껏 힘들었지만, 너 이제는 정말 괜찮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어…….
그렇게 주문을 걸듯이.
“그치만 너랑은 아냐. 그걸 너랑 헤어지고 나서 깨달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이 아이가 네 아이가 아니라서, 그것도 다행이고.”
은수가 말을 끝마치자 지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 하는 소리를 냈다.
그의 감정도 물론 복잡할 것이었다. 하지만 은수는 그의 감정에까지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었다. 그저 얼른 집으로 들어가서 쉬고픈 마음뿐이었다.
그 상태로 한참을 가로막고 서 있던 그는 뒤늦게 아주 당연한 질문을 했다.
“너, 그 애 아빠랑 뭐 있는 거야?”
있으면, 있으면 네가 어쩌게?
차마 입 밖으로는 뱉지 못하고 속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이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일상적인 말도 곱게 나가지질 않았다.
“지훈 씨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새끼 대체 누군데.”
“알 바 없잖아.”
“대체 누구냐고, 그 새끼가!!!”
진정을 하던 것도 잊었는지, 또 한 번 서슬 퍼런 지훈의 고함 소리가 그 근방을 울렸다.
아, 이 미친 새끼. 진짜 피곤하게 구네. 이대로 계속 상대해 주어야 하나?
은수의 표정도 덩달아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때,
“접니다, 그 새끼.”
별안간 익숙한 향기가 옆으로 훅 끼쳐 왔고, 부름에 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원체 낮은 편이지만 유난히도 가라앉은 듯한 그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순간, 은수는 또다시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일깨우려는 듯, 듣기 좋은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제가 바로, 아이의 아빠 되는 사람입니다.”
도현재, 그였다.
일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중에도 순간적으로 그의 움직임만은 슬로 모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쪽이 맞든지 간에 그의 등장이 은수의 상황 파악을 매우 굼뜨게 만든 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냉랭했던 분위기가 현재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더욱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불현듯 고개를 돌린 은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제 옆으로 바짝 다가온 현재의 옆모습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당연히 첫째로 현재의 등장이 드라마틱해서였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제 앞에서 욕은커녕 나쁜 말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던 그가 ‘새끼’라는 다소 거친 단어를 내뱉었다는 것. 그리고 목소리가 평소 듣던 것보다 훨씬 착 가라앉아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은 현재가 화가 났다는, 아니, 적어도 기분이 좋지는 않음을 의미했다.
그걸 깨달은 은수는 저도 모르게 현재의 팔을 잡았다. 그의 옷자락은 지금의 분위기만큼이나 차가웠다.
“현재 씨.”
“괜찮아요? 많이 놀랐어요?”
“……뭐야, 당신은…….”
지훈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현재의 얼굴을 인식중인 것이다.
현재는 부러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이제 알아보십니까?”
“……설마.”
마, 말도 안 돼.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던 지훈이 옆에 선 은수에게 다급히 물었다.
“야, 민은수……. 아니지?”
“…….”
“대답해. 거짓말이잖아. 설마…… 이 자식이 애 아빠라고?”
“…….”
내가 애 아빠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지훈을 향하는 현재의 눈빛은 여전히 전에 없이 싸늘했다.
“제가 애 아빠라고, ‘방금’ 전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
“그래도 서 팀장님이신데, 방금 얘기한 것도 기억 못 하실 정도로 머리가 나쁜 건 아니실 테고.”
“……뭐?”
그가 은수 앞에서 누군가를 상대로 이렇게 적의를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온 건지. 은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현재는 몰라도, 지훈에게는 다혈질적인 기질이 있어 괜히 자극했다간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현재 씨, 잠깐만요.”
“은수 씨는 가만히 있어요.”
“그치만…….”
“가만히 있으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든 현재를 말려보려 했지만, 현재의 태도는 너무도 강경했다.
저를 막는 말투와 목소리가 이제껏 들어온 것 중 제일로 단단해서, 은수는 좀처럼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은수를 그도 뻔히 알았다.
안심하라는 듯 은수의 손을 한 번 감싸 쥔 그가 그대로 그 손을 제 팔에서 미끄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도현재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은수 씨 아이의 아빠고요. 또 아시다시피, 마케팅 1팀 신입 사원이기도 합니다.”
“…….”
지훈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굳이 언급하는 건, 제가 아이의 아빠가 맞다는 걸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사자가 나타나 주장하고 있는데도 지훈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은수는 두 남자 사이에서 눈치를 보았고, 현재는 대답하지 않는 지훈을 향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은수 씨 임신한 거 뻔히 알고 계실 텐데, 임신한 사람을 상대로 그렇게 크게 소리를 치면 되겠습니까.”
“…….”
“놀라는 바람에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하시려고요.”
“…….”
“아이 아빠로서 불쾌하네요, 상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