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75. 이대로도 괜찮을까요? (2)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고해 성사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썩 나쁘지 않았다. 마음의 짐을 하나씩 덜어 내게 되는 느낌이어서.
은수는 박 과장의 온화한 표정에 힘입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될 만큼 그 사람한테 가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는데, 결혼이 싫고 무서운 건…… 쉽게 바뀌지가 않는 것 같아요. 그게 저도 너무 답답해요.”
“…….”
“내가 참 여러 번 상처 주고 마음 아프게 했는데도…… 정말 한 번을 안 흔들리더라구요. 그런 사람이라면…… 내 평생을 맡겨 봐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
“겁이…… 나요. 난 그 사람처럼 흔들리지 않을 자신도 없고…….”
어느샌가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휴, 유난이다, 진짜. 바보 같은 게.
은수는 서둘러 제 눈에 있는 물기를 슥슥 닦아 내었다. 맞은편의 박 과장은 그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팀장님, 알고 보니까 은근히 상처가 많은 분이었네.”
“…….”
“일부러 애쓰지 마요. 괜찮아요.”
보다 못한 박 과장이 은수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다 꼭 잡아 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현재 씨도 물론 진짜 답답하겠지만, 그래도 팀장님 본인이 제일 답답하겠지.”
“…….”
“조바심 낼 필요 없어요. 아기가 당장 내일 나올 것도 아닌데, 아직 생각할 시간은 많지, 뭐.”
박 과장의 너스레 덕분에 은수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과장님.”
“응?”
“……제가 지금, 현재 씰 너무 힘들게 하고 있는 걸까요?”
“…….”
은수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박 과장이 이내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팀장님 똑똑하시잖아요. 알면서 뭘 물어요.”
“…….”
“내가 말했듯이, 급하게 결정할 필욘 없어요. 하지만 팀장님 마음이 어떤 곳으로 향해 있는지 알고 있다면, 부정하지 말고 그냥 그 길로 밀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게 맞는 길일 테니까.”
“…….”
그렇지. 그렇겠지.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사실 어느 누구보다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감정을 이렇게까지 질질 끌게 된 것도 여지없이 모두 제 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쩜 그리 어리석었는지.
“현재 씨라면 팀장님이 무슨 선택을 하든 한결같이 지켜봐 주겠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말아요. 따로 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둘 다 고생 그만할 때도 됐잖아.”
“…….”
비로소 약간의 깨달음을 얻은 듯한 은수를 보며 박 과장은 빙긋 웃었다.
“달라질 건 하나도 없어요. 키는, 오직 팀장님이 쥐고 있는 거예요.”
* * *
정말 박 과장의 말처럼, 그에게 마음을 고백한 이후에도 실상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자상하게 은수를 잘 챙겨 주었고, 은수는 여전히 표현에 다소 서툴렀다. 그래도 그는 기꺼이 이해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얼마 전 윤정은 은수를 보자마자 ‘너, 임신해서 그런지 인상이 좀 달라졌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건 윤정뿐만이 아니었다. 인사하고 슥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그녀를 보면 꼭, 요즘 얼굴이 좋아진 것 같다고, 행복해 보인다고 한마디씩 했을 정도니까.
물론 은수가 그렇게 변하게 된 데는 별이의 영향이 꽤 있었다. 이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뱃속에서 신나게 뛰노는 통에, 압박된 갈비뼈가 자꾸만 비틀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허리가 아프고 배가 무거운데도, 제 뱃속에 별이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즐거울 만큼 은수는 아기의 존재로 인해 행복했다. 하지만 그 외의 행복은 결국 모두 현재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내 아이를 임신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 주고 싶어요.”
멋있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밥 먹으면서 지나가듯이 한 말이었는데, 그게 또 뇌리에 강하게 남아 버렸다.
“후회하지 않아요. 행복해요.”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그 말에 그는 밝게 웃었지만, 사실 그것은 정말 제 기분을 최소화시켜 표현한 말이었다.
사실은 너무너무 행복해서 두려울 정도라고, 이런 행복은 처음이라서 도저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라면 거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비록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산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요즘 그들은 말만 아니라고 할 뿐이지, 실제로 연애나 다름없는 것을 하고 있었다. 중단했었던 카풀도 다시 재개했고, 일주일에 너덧 번은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물론 요리해 주는 역할은 현재였고, 그녀는 유일한 보답인 것처럼 그것을 남기지 않고 다 먹는 역할이었다. 가끔은 바깥에서 데이트도 했다. 그렇게 현재와 함께하는 나날들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심지어 고달픈 출퇴근길에서마저도.
“…….”
그러나 오늘은 은수 혼자였다.
지하철 안은 늘 그렇듯 인산인해였다. 사람들은 임산부 배려 좌석이 떡하니 있음에도 양보를 해 주지 않았고, 그녀는 꽤 오랜 시간을 서서 버틴 후에야 어떤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다.
마치 임신한 사람을 처음 보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 은수는 더더욱 시무룩해졌다. 기분은 저 밑바닥으로 처박혔다.
사실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면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이 참 좋았다. 현재가 사 준 임산부 쿠션 덕분에 잠도 푹 자고 일어났고, 든든하게 아침도 먹었다. 상쾌한 마음으로 정시에 출근했으며, 허리에 무리가 오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일도 그런대로 잘 처리했다. 그런데 단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평소 자신에게 살갑게 굴지는 않았어도 적대적이지는 않았던 민희가, 오늘 오전 내내 그녀를 상대로 대놓고 틱틱거렸던 것이다. 제출하라고 지시했던 서류도 동료 유라를 시켜 대신 제출했다.
‘오늘 민희 씨 무슨 일 있나?’
팀원들 모두가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은수만의 착각은 아닌 셈이었다. 현재의 걱정스러운 눈초리가 와 닿자 그녀는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러나 은수는 머지않아 곧, 민희가 왜 자신에게 그런 태도를 취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 진짜 재수 없어, 존나…….”
점심 즈음, 꿀꿀한 기분을 애써 삭이며 사무실로 들어가던 길이었다. 어디선가 욕을 내뱉는 소리가 귓가에 아득하게 들려왔다.
“뭔데. 왜 그러는데.”
“아, 묻지 마. 짜증 나니까.”
뭐지?
의아함에 길을 가다 말고 힐끔 들여다본 휴게실엔 민희와 유라 단 둘만 있는 것 같았다. 배부른 임신부이지만 워낙 재빠른 움직임이었기에 둘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싶었다. 직감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저곳에 발을 들이면 후회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니, 오늘 너 진짜 왜 그러는데. 좀 알기나 하자. 무슨 일 있어?”
“……아이 씨. 우리 팀장 말이야, 민은수.”
그리고 그 생각은 애석하게도 비껴가지 않았다.
“팀장님이 왜?”
“팀장이랑 현재 씨랑…… 분명히 뭔가가 있는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몰라! 나도 소문으로 안 건데, 요즘 둘이 붙어 다니는 걸 본 사람이 있대. 둘만 있을 땐 현재 씨가 엄청 다정하게 얘기하고! 또 둘이 퇴근도 같이 한대!”
“헐, 뭐야……. 진짜야?”
“저번부터 느낌이 좀 이상했는데. 아니, 내가 다른 여자면 말도 안 해. 근데 팀장이잖아! 남자를 꼬시는 것도 유분수지, 어떻게 도현재를…….”
“……근데, 제삼자가 뭐라고 할 건 아니지 않나……. 어차피 자기들 일인데.”
“야, 넌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내 남자를 지금 코앞에서 놓치게 생겼는데?!”
내 남자?
미친. 누가 네 남자야? 누가 네 남자 시켜 준대?
순간 열이 확 끓어오른 은수는 둘에게로 돌진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발자국을 딛고 나서 그 생각을 바로 접어야만 했다.
행여 사실을 밝히더라도 이런 식으로 밝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거짓말처럼 현재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뭔가 불편하다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달라고요.’
‘뭔가를 맘대로 쉽게 결정 내리지도 말고, 나 너무 밀어내지도 말고요.’
‘은수 씬 워낙 혼자 알아서 잘하긴 하지만, 가끔은 나한테 기댔으면 좋겠어요.’
‘그러라고 있는 거잖아요, 나.’
솔직히 말해서 아직 아이의 아빠를 밝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현재를 사랑하게 된 이상, 그건 어쩔 수 없는 통과 의례와도 같았다.
커피를 입 안에 털어 넣고 종이컵을 힘껏 구기는 민희를 훔쳐보며, 은수는 입술을 굳게 감쳐물었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에게 오늘 혼자 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래서였다.
“혼자…… 가겠다고요?”
“네. 일단 오늘만요.”
“불편해서 어떻게 가려고요.”
“괜찮아요. 이제 적응돼서 지하철도 편해요.”
“그래도, 같이 가는 게…….”
“……혼자 가게 해 줘요. 부탁이에요.”
회사를 나오기 전, 그와 나눴던 대화가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았다.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상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라고 운을 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제 우리 관계를 사람들한테 알려야 할까 봐요. 이렇게 해야 하나?
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밝혀야 할 걸 생각하면 그런 고민은 댈 것도 아니었다. 앞뒤 다 잘라먹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의 상상력은 배가 되어 실제보다 더욱 무서운,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 낼 것이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얘기를 하는 것은?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은수 자신만 해도 원 나잇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 그들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현재를 상대로 마음을 품어 왔던 여직원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고.
지하철역을 나와,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서 너무나 어지러웠다. 얼른 집에 들어가 누워서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지만, 느려터진 발걸음은 쉽사리 빨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이제 막 집 건물이 보여서 좋아하던 은수는 누군가 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멀찍이서 대충 봤을 때는 그냥 다른 집 손님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뭔가 익숙한 인영이었다.
약간은 낯설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친숙한 느낌이 드는 뒤통수.
저게 누구지……?
속으로 가까운 인물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는데, 남자는 마치 그녀가 부르기라도 한 듯 스르르 뒤를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