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74. 이대로도 괜찮을까요? (1)
그날 저녁.
은수는 임산부에겐 금지 구역이나 다름없는 일본식 선술집에 실로 오랜만에 발을 들여놓았다. 여자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한 장소를 찾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술집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술만 입에 대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박 과장이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은수는 윤정과의 통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연락은 계속 하고 있고?”
[……어.]
“오올, 그래도 괜찮았나 보네?”
[괜찮기는. 순 뺀질거리게 생겨서 바람둥이 같더라.]
“야, 그래도 이 대리 정도면 괜찮지. 인물도 그만하면 상위권이고, 사람도 좋고.”
[……쳇.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면 네가 사귀지 그랬냐?]
윤정의 빈정거림에 은수는 잠깐 멈칫했다.
얘는 뭘 당연한 걸 이렇게…….
“나한테는…… 현재 씨가 있잖아. 알면서 왜 물어봐.”
……헐.
졸지에 닭살이 돋아 버린 윤정에게서 곧바로 고통스러운 듯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우! 싫다, 싫다 할 땐 언제고. 토 나와, 진짜.]
“야, 넌 나이가 몇인데! 말 좀 예쁘게 해!”
[내 말투가 어디가 어때서. 속 시원하고 좋기만 하구만, 뭘. 그 남자도 특이해서 좋다던데?]
“……이 대리가?”
[어.]
“……어휴, 진짜. 이 대린 또 왜 그런대.”
너무나 당당한 윤정 때문에 은수는 할 말을 잃었다. 둘을 소개시켜 준 건 나지만, 이런 앨 맘에 든다고 하는 거 보니 이 대리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구나.
은수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때, 저 멀리 테이블로 돌아오는 박 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발견한 은수는 황급히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
“야야, 나 이제 끊는다. 암튼 잘 좀 해 봐.”
[그 남자가 잘해야지, 내가 뭘 잘해. 암튼 또 전화해.]
“어, 어. 끊어.”
마침내 박 과장이 자리에 앉자 은수는 폰을 얼른 집어넣고 배시시 웃었다.
“계속하셔도 되는데. 통화 중이었는데 방해한 거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제일 친한 친군데, 그냥 잠깐 얘기하느라…….”
물론 박 과장과 은수 둘 다 이 대리에 대해서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만큼, 시간이 괜찮으면 그쪽으로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겠지만…… 은수는 제 얘기를 하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랄 듯해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다.
그녀가 거두절미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박 과장님.”
은수와 달리 음주에 자유로운 몸인 박 과장은 사케 한 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부름에 박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저기…….”
……일단 현재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지. 그게 맨 첫 단추니까.
그런데 사실대로 얘기하려니 박 과장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얘기일 것 같아서, 은수는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렇게 바로 얘기해도 괜찮은 걸까?
“왜. 얘기하세요, 팀장님.”
“어…….”
“…….”
“사실은, 저…… 제 뱃속의 애기 아빠 말인데요.”
일단 운은 떼었지만, ‘도현재’의 디귿 자도 꺼내기가 힘들다. 은수는 속으로 어쩌지,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그때 예기치 못한 박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요, 애기 아빠가 도현재 씨라고요?”
“……네…….”
네, 맞아요. 그 사람이에요…….
너무나 당연한 이름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일순 깜짝 놀란 눈으로 박 과장을 쳐다보았다.
……바, 방금…… 뭐라고 하신 거지?
“네에?”
박 과장은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인 것처럼.
“현재 씨가 애 아빠잖아요. 아니에요?”
“어…….”
그, 그건 맞지만…… 박 과장님이 그걸 어떻게……?
한순간에 혼란스러워진 은수의 표정을 본 박 과장이 픽 웃었다.
“놀랐죠? 나도 처음엔 놀랐어요. 하도 감쪽같이 숨겨서.”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 데도 얘기한 적 없고, 아는 사람도 몇몇뿐인 이야기였다.
언젠가 그와 같이 있는 걸 들키기라도 했던 걸까. 설마 혹시 다들 알고도 쉬쉬하고 있는 건…….
순간 은수는 별별 생각이 다 들면서 두려워졌다.
“안심하세요. 나 말곤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박 과장은 그런 은수를 뻔히 안다는 듯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현재 씨가 팀장님을 유달리 챙기니까 ‘일방적으로 좋아하는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근데…….”
“…….”
“어느 날 우연히 현재 씨 휴대폰을 언뜻 보게 됐는데…… ‘내 사람’이라고 저장된 번호로 온 전화가 있더라고요.”
“……아.”
“모르는 번호였음 그냥 지나쳤을 텐데, 내가 팀장님 번호 접한 것만 몇 년이에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아뿔싸. 그런 식으로 탄로가 났을 줄이야.
그러게 각별히 주의하라고 일러 뒀어야 하는 건데…….
이제 와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순간 그의 부주의가 살짝 미워졌다.
“그럼,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거예요?”
“음, 잘 모르겠네. 근데 얼마 안 됐어요. 최근이었던 것 같은데.”
“…….”
“걱정 붙들어 매시라니까. 나 빼고 아무도 몰라요.”
“……그래도…….”
덮어 놓고 안심을 하기엔, 이미 들킨 곳이 두 군데나 되는 걸요…….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이 대리와 박 과장만이 그들의 사이를 알고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 대리야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으니 이 일을 다른 데 퍼트릴 것 같지는 않았고, 박 과장도 그런 부분에선 마찬가지였지만…… 문제는 알고도 모른 척할지 모르는 다른 팀원들이었다. 음침하게 자기들끼리만 쑥덕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경우의 수를 셈해 보고 있는 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 과장은 오뎅 하나를 집어 들며 무심하게 말했다.
“근데 내가 볼 땐 팀장님도 좀 조심하셔야 될 거 같은데.”
“……네? 왜요?”
내가 뭘 어쨌다고……?
은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박 과장은 오뎅을 질겅거리며 명쾌하게 말했다.
“사실 나 방금 전에 팀장님 약간 떠본 거예요. 그냥 직감적인 느낌으로 물어본 건데, 운 좋게 들어맞은 거지.”
엥. 그럼 방금 전에 한 말은 뭐지?
“……그치만, 현재 씨 폰을 보셨다면서요?”
“그야…… 현재 씨가 아무리 팀장님을 그런 식으로 저장해 뒀다고 해도, 그냥 혼자 그렇게 저장해 놓은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애 아빠가 아닌데 그냥 사귀는 걸 수도 있고……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 여러 가지잖아요. 그것만 보고 애 아빠인 줄 어떻게 알아.”
“…….”
“진짜 숨길 작정이었으면 내가 그렇게 말해도 아니라고 잡아떼야죠. 맞다고 고개나 끄덕이고 있으면 되나?”
“…….”
“누가 또 이런 식으로 떠보면 곧이곧대로 이실직고할 것 같아서 불안한데.”
……아.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 은수는 차마 뭐라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과장님께는 처음부터 밝힐 생각으로 왔기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실 그 말에 수긍을 한 건 거의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그러게요. 듣고 보니 그러네.”
“…….”
“휴, 자꾸 이렇게 어설퍼요. 나름 잘 숨긴다고 하는데도 자꾸…….”
박 과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은수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했다.
사케를 마신 건 자신이건만, 오히려 앞에 앉은 은수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어린 팀장의 모습.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팀장이 아닌 그저 사랑에 빠진 한 여자로만 보였다. 이렇게 어설픈 허점을 드러내는 건 확실히 매사에 프로페셔널하던 민 팀장답지 않은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또 그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인간적으로 느껴져서, 박 과장은 직책을 떠나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한 명의 언니로서 그녀를 매우 흡족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참 좋을 때다.
어쩐지 귀엽고 풋풋한 게, 잊고 있던 옛 생각을 떠오르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세상에 절대로 숨길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게 기침이랑 사랑이라고. 좋아하는 맘을 숨긴다는 게 쉬울 리가 없지.”
“…….”
“근데 팀장님도…… 현재 씨 많이 좋아하나 봐요.”
은수는 괜히 빈 술잔을 손에 쥐고 둥글리고 있었다. 제 감정을 누군가에게서 진단받는 건 처음이라 다소 어색한 탓이었다.
“그래 보이세요?”
“네, 좀.”
술은 한 방울도 먹지 않았지만 장소와 분위기 때문일까, 은수는 어쩐지 제가 취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 한 번도 꺼내 놓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렇게 술술 풀어놓게 되는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었다.
“맞아요. 근데 실은, 제가 그걸 인정한 지가 얼마 안 됐어요.”
“…….”
“현재 씬 저보다 너무 어리고, 또 아직 앞길이 창창하잖아요. 물론 아이 아빠는 그 사람이 확실했지만, 스물일곱밖에 안 된 남자한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랑은 절대 안 어울리는 상대다, 그렇게만 단정하고 계속 밀어냈거든요.”
“…….”
“그리고 무엇보다 전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괜한 사람을 잡아 두기 싫었어요.”
아, 언젠가 들었던 것 같지만 미처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아참, 팀장님 결혼할 생각 없다고 했지.”
“…….”
“그때는 이유를 못 물어본 것 같은데, 왜 결혼할 생각이 없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게…….”
……에라, 까짓 거. 이제 알 사람들은 다 알게 된 이야기인데 숨길 것도 없지.
그녀는 별 거리낌 없이 박 과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이 얘기를 이렇게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잠시 뒤, 모든 걸 알게 된 박 과장은 이제야 은수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었던 줄은 몰랐네.”
“…….”
“그럼 팀장님은 지금도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어쩌면 그것은 지금 은수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본질적으로 꿰뚫는 질문이었다.
사실은 은수 스스로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자문했던 질문.
난 지금……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걸까. 이제는 그럴 수 있게 된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답답한 건 못 참는 그녀의 성미답지 않게.
“……진짜 그것 때문에 미칠 것 같아요.”
“…….”
“전 정말, 제가 누군가와 가정을 꾸려서 아이를 낳고 같이 살아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요? 근데…….”
“…….”
“그 사람을 만나고…… 너무 많은 게 달라져 버렸어요. 너무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