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73. 각성 (2)
“……지훈 씨?”
서지훈. 문 앞에 삐딱하게 서 있는 실루엣의 주인공은 바로 그였다.
혹시 몰라 은수는 눈을 힘껏 비벼 보았지만, 그의 인영은 없어지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희미한 인터폰상으로 보더라도 그가 지훈이라는 것쯤은 또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무려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얼굴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 남자가 여기는 왜……?
잔뜩 의아한 얼굴이 된 은수는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띠리리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옆으로 비켜 서 있던 그는 은수를 발견하고 정면으로 바로 섰다.
“……어, 은수야. 집에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그가 이곳에 온 건 모질게 아이를 지우라고 했던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여긴 웬일이야?”
은수의 질문에 대답 없이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던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슬쩍 집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도, 돼?”
“……어?”
무슨 얘기를 할 생각이기에 집 안까지 들어오려고 하지?
그녀의 눈이 대번 혼란스러워졌다.
맘 같아선 바로 가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전 남친이라고 한들, 집 앞까지 찾아온 사람을 문전 박대하는 건 엄연히 예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그에게조차 나름 아량을 베풀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넓어진 상태였다. 물론 그것은 순전히 뱃속의 아이와 현재 덕분이었다.
어쨌든 그는 딱히 위험인물도 아니었고, 어차피 들어와 있는 것도 잠깐 동안일 터였다. 굳이 그를 집 안으로 못 들일 이유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굳은 마음을 먹고 말했다.
“……들어와. 이왕 왔는데 그냥 가기도 그러니까.”
“…….”
밝은 얼굴로 고개를 한번 끄덕인 그는 조용히 은수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내 집 안으로 입성한 그는 임신과 출산 관련 용품들로 가득해진 그녀의 집 안을 신기해하는 눈으로 둘러보았다.
구경났나. 뭘 저렇게 유심히 본대.
하지만 아무래도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과는 많이 다른 광경일 것이기에, 그의 입장에선 퍽 신기할 만도 하겠지.
어수선한 집 안을 대충 정리하며, 은수는 일부러 지나가듯이 물었다.
“근데, 갑자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그녀는 청소에 여념이 없는 척, 일부러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때문에 지훈의 나직한 목소리는 그녀의 등을 타고 들려왔다.
“……지난번에 연락했었는데 답이 없길래. 요즘 회사에서도 통 안 보이고.”
지난번 새벽에 도착했던 문자를 말하는 모양이네. 자고 있냐고 물었었지, 아마.
‘그거 다음 날 아침 되자마자 바로 삭제했는데…….’
그러나 그 사실을 알려 주기에는 왠지 미안해서, 그녀는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아, 미안. 답장한다는 걸 깜빡해서…….”
“…….”
“무슨, 할 얘기 있는 거야?”
은수의 물음에도 그는 잠깐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말이 없지?
등져 있는 상태였기에 그가 뭘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어서, 그녀가 의아해하려던 찰나였다.
뚜벅뚜벅, 그녀에게로 가까이 걸음을 옮긴 그가 내내 뒤돌아서 있던 그녀를 강제로 돌려세웠다. 이 같은 예기치 못한 접근은 무방비 상태에 있던 그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
두 사람의 눈빛이 실로 오랜만에 마주쳤다.
그리고 지훈이 마침내,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은수야.”
그러나 막상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내가, 잘못했다.”
은수를 매우 당황하게 했다.
……무작정 잘못했다니.
그녀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뭐?”
“……내가 잘못했다고.”
그녀는 단번에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지금 몇 달 전 일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 거라면 굳이 지금 와서 사과할 필요가 없는데. 아니면 혹시 다른 것……?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은수가 살짝 뒷걸음질 치고선 물었다.
“저기, 미안한데 지훈 씨, 나 지금 지훈 씨가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거든?”
“…….”
“대체 뭘 잘못했다는 거야, 나한테……?”
“…….”
은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나, 어제 그 여자랑 헤어졌어.”
“…….”
“너 때문에.”
“……?”
‘그 여자’라 함은, 그와 같은 팀이자 연인이기도 한 그 여직원을 이르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은수는 지금 그의 말이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다.
‘나 때문에’ 헤어졌다니. 왜 자기들 이별의 책임을 애먼 나에게 전가시키는 거지?
그녀의 눈썹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왜 나 때문에 헤어져. 내가 뭘 했다고?”
그런데 잠시 뒤,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를 엄청난 충격에 빠뜨렸다.
“내가, 아직도 널…….”
“…….”
“……사랑하는 것 같아.”
그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는 순간, 그녀는 일시적으로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뭐, 뭐가 어쩌고 어째?
“……뭐?”
“널 아직도 사랑하는 것 같다고.”
그는 이제 그녀의 팔뚝을 간절하게 붙잡고 있었다.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처음엔,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내빼는 네가 원망스럽기만 했어. 그런 널 잊기 위해서라도 얼른 다른 여자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다 보면 내 감정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어. 그 여자, 그래서 만났던 거야.”
“…….”
“근데, 억지로 맘을 붙이고 결혼까지 하려니까……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더라. 뭘 하든 네가 생각나고, 네가 그리웠어.”
……나참, 이게 무슨 신흥 지랄인지. 언제는 자기처럼 이른 결혼을 원하는 여자라며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그래서? 그래서 뭘 어쩌자고?”
그녀의 말에 지훈은 긴장한 듯 몸을 곧추세웠다. 그가 말하려는 본론은 아마 지금부터인 듯했다.
“은수야.”
“…….”
“……우리 다시 시작하자.”
“……뭐?”
금방이라도 욕이 튀어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내가 너 책임질게. 애 아빠가 누구든 상관없어. 내 아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테니까,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난 도저히 너 포기 못 하겠어.”
허. 이제는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미쳤어, 지훈 씨? 설마 술 취한 거야?”
“아니. 과도하게 제정신이야.”
제정신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눈빛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술 냄새가 나지 않는 걸로 보아 술에 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 설마 진짜 진심이라는…….
갑작스럽게 머리에 스팀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
“……돌았구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
“책임지겠다고? 누가 당신더러 책임지게는 해 준대?”
“은수야.”
그녀는 단박에 그의 손을 힘 있게 뿌리치고는 우렁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장 나가! 꼴도 보기 싫어.”
“……민은수.”
은수는 어느새 서슬 퍼런 눈으로 지훈을 쏘아보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서릿발이 잔뜩 서 있었다.
“이 아이는 당신 아이가 아니라고 했잖아. 근데 지훈 씨가 무슨 권리로 그렇게 말을 해? 게다가 이 아일 지우라고 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지훈 씨였어. 양심에 찔리지도 않아?”
“…….”
“셋 셀 때까지 안 나가면 주거침입죄로 신고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하나.”
“…….”
“두울.”
“…….”
그 또한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은수의 매서운 태도에 결국 한풀 꺾인 얼굴로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다. 오늘은 그만 가 볼게. 다음에 차분하게 얘기하자.”
허, 누구 맘대로? 다음을 기약하는 건 그녀 쪽이어야지, 그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음에 얘기할 것도 없어. 허튼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다신 여기 찾아오지도 마.”
“…….”
지훈의 등을 떠민 그녀는 곧장 현관문을 열고 그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
“은수야, 잠깐만…….”
“잘 가, 그럼.”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그녀는 현관문을 쾅 닫았다. 한바탕 개소리가 지나간 집은 너무하다 싶을 만큼 휑했다.
차라리 문을 열어 주지 말걸. 괜한 일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저 남자와 대화를 나눠 보려 했던 내가 바보지.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허탈함이 온몸을 관통했다. 심경의 변화가 너무나 스펙타클해서 우습기까지 했다.
은수는 현관문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대체 언제쯤이면 이런 일에 면역이 될는지.
* * *
애석하지만, 서지훈이 남긴 여파는 다음 날까지도 쭉 지속되었다. 도저히 일에 집중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매몰차게 이별을 고할 때는 언제고, 심지어 제 핏줄이 아닌 아이까지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붙잡으려 하다니. 지훈의 심리를 도통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지금껏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이제 막 그 남자를 받아들이려고 하기 직전에 이러냐고.
어차피 다 끝난 일이기에 현재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참 얄궂은 타이밍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팀장님.”
“…….”
“……팀장님!”
“……네?”
열심히 설명을 이어 가고 있던 박 과장이 “흠…….” 하며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늘 진짜 종일 왜 그러세요. 무슨 고민 있으세요?”
“네?”
“아까부터 계속 한숨 쉬시잖아요. 딴생각하시고.”
“……아.”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그녀는 파리해진 제 얼굴을 슬쩍 문질렀다.
“죄송해요. 제가 좀 피곤해서…….”
그러나 박 과장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같이 일한 세월이 얼만데, 이런 거짓말 정도는 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혹시, 아이랑 관련된 거예요?”
“……네?”
당황하는 거 보니까 맞나 보네. 박 과장은 설핏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맘때면 한창 궁금한 것도 많고, 고민도 많을 시기죠. 겪어 봐서 잘 알아요. 만약 그런 거라면 제가 들어 드릴 수도 있는데.”
“…….
“이래봬도 임신 쪽으론 팀장님보다 선배잖아요, 제가.”
“…….”
물론 그건 맞는 말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박 과장은 임신, 육아, 출산 쪽으로 경험과 지식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람들과의 관계라든지, 개인 심리 분석에도 매우 능한 편이어서, 은수에게 여러모로 굉장한 도움과 조언을 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박 과장이 이 모든 일의 내막을 전혀 모른다는 데 있었다.
맨 처음 임신을 했을 때,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시절이 왜 이렇게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용기를 넣어 두기만 했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그녀에게 알려 주어도 큰 무리가 없을 만한 시점이었다. 이미 윤정도, 이 대리도 다 알게 된 마당에 박 과장에게만 알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언젠간 모두가 알게 될 일, 그녀가 이 일을 먼저 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은수는 마침내, 박 과장에게도 모든 사실을 오픈하기로 마음먹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실천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
“저기, 박 과장님. 오늘 저녁에 따로 약속 있으세요?”
“아뇨. 왜요, 진짜 고민상담 하시게요?”
우스갯소리 같은 박 과장의 질문에, 은수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매우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릴 말씀이 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