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72화 (72/128)

# 72

72. 각성 (1)

“……네? 이 대리가요?”

감자탕의 뼈를 거의 발골하듯이 헤집고 있던 은수가 한껏 놀란 눈을 한 채 소리쳤다.

반면 현재는 아주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어쩔 땐 나보다 더 적극적이시더라고요.”

“허, 참나…… 나만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네.”

이른 오전의 감자탕 집은 매우 한산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에 딱 좋을 정도로.

두 사람은 그간 못 다한 이야기들을 지금에서야 조금씩 풀어놓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른 것은 단연 현재를 지원 사격 해 주었던 이 대리에 대한 내용이었다.

가만 있자. 요즘 이 남자가 나한테 어떻게 했더라……?

지난 일을 곰곰이 곱씹는 은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 그럼, 그렇게 먹을 거 사다 바치구 그랬던 것도…… 다 이 대리가 시킨 거였어요?”

“…….”

“신발 사 준 것도? 마사지도?”

……맞기는 맞는데…… 이렇게 들으니까 어째 내가 혼자서 한 건 하나도 없는 것 같네.

은수에게 줄 고기를 열심히 발라내고 있던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다는 아니에요. 이 대리님이 시킨 것도 있었지만, 내 자유 의지로 한 것도 많았어요.”

“……그래도 어쨌든, 최근엔 이 대리 입김이 엄청나게 작용했단 얘기잖아요.”

철저하게 속은 기분.

은수는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은 눈앞의 남자를 밉지 않게 흘겼다. 왠지 도현재의 탈을 쓴 이 대리에게 구애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건 이 남자에게 큰 실례일 테지만.

“어쩐지…… 내가 알던 현재 씨 같지가 않다 했어.”

“……은수 씨가 알던 나는 어땠는데요?”

“네?”

별생각 없이 한 얘기였는데, 막상 질문을 받으니 은수는 할 말이 없었다.

음, 내가 알던 도현재는…….

“그냥…….”

“…….”

“조금 모자란 구석도 있고, 그냥 무식하게 열심히 들이대는데 그게 번번이 사람을 설레게 하는 스타일이었다고나 해야 할까?”

“……‘무식하게’요?”

다소 곱지 않은 표현에 그는 이마에 내 천 자를 그었다. 그러나 은수는 그의 반응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맞잖아요. 작정하고 무식하게 들이댔으면서, 뭘…….”

그래서 내가 이렇게 코 꿰인 거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그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게 문제였다. 스스로 그의 마수에 사로잡힐 용의가 충분할 정도로.

그녀의 대답에 한껏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남자는 계속해서 살점을 발라 은수의 앞 접시에 올려 주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런 게 도현재스러운 거였다.

“…….”

어차피 그런 거창한 공세보다는, 오히려 이런 소박한 배려 하나하나가 내 맘을 움직였던 건데.

안타깝게도 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고, 은수는 그것을 새삼 그에게 일깨워 주고 싶어졌다. 제 맘이 바뀐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지고지순한 마음 덕분이었다고.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나 꽤 오래전부터 현재 씨 좋아했어요.”

“…….”

“그러니까…… 이 대리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오늘처럼 고백했을 거라구요. 내가 내 감정에 못 이겨서.”

“…….”

퉁명스러운 투로 꺼내진 그녀의 말은 상당히 뜻밖이었지만, 덕분에 그의 기분은 한없이 좋아졌다. 하룻밤 만에 그녀는 놀라울 만큼 솔직해져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의 머릿속에는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 생각난다.”

“언제요?”

“은수 씨가 임신했다고 나한테 처음 말했던 날이요. 삼계탕 집.”

“아…….”

“……그날도 꼭 이런 분위기였는데.”

비록 지금은 감자탕 집이긴 하지만. 뭐, 무드라곤 약에 쓰려도 없는 곳이라는 측면에선 비슷하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저런 고백을 아무렇지 않게 해 대는 그녀의 엉뚱함은 늘 그를 웃게 만들었다.

그래도 아무렴 어떤가. 철벽만 치던 사람에게 이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것을.

“근데 이젠 아예 대놓고 얘기하네요, 좋아한다고.”

“……이제 숨길 필요도 없으니까. 나 원래 이런 성격인 거 알잖아요, 현재 씨도.”

“알았는데……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요즘은.”

……하긴, 요사이는 내 감정을 알면서도 부정하느라 답답이가 따로 없었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에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요즘은 너무 나답지가 않았어요. 안 그래도 지금 한참 반성중이에요.”

“…….”

“암튼 그 얘긴 이쯤 하기로 하고.”

“…….”

“……자요.”

살짝 쑥스러워진 은수가 그의 얼굴 앞으로 다짜고짜 고기를 내밀었다. 나름대로 부끄러움을 상쇄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제 앞으로 내밀어진 젓가락에 눈을 끔뻑거렸다.

“……?”

“먹어요. 아까부터 계속 나한테만 주고, 현재 씬 하나도 못 먹고 있잖아요.”

……내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네.

오매불망 바랐던 날이건만, 그는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오는 이 상황이 무척 어색했다. 늘 일방적으로 주는 데만 익숙해져 있던 탓이었다.

“아, 난 괜찮은데…….”

“스읍, 빨리요.”

그가 도통 먹을 생각을 않자 그녀는 팔 아프다는 시늉까지 해 대며 그를 종용했다.

“…….”

……이렇게까지 하는데 하는 수 없지.

현재는 살짝 입을 벌려 은수가 내민 고기를 넙죽 받아먹었다. 그녀의 얼굴은 흡사 새끼 제비에게 먹이를 나눠 주는 엄마 제비 같아 보였다.

“맛있어요?”

“……네, 맛있어요.”

당신이 먹여 줘서 더 맛있다, 같은 낯간지러운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곧바로 터져 나올 그녀의 반응이 불 보듯 뻔했으므로.

씹던 고기를 꿀꺽 삼켜 낸 그는 다시 고기를 발라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보답을 하긴 해야 할 텐데…….”

“보답? 무슨 보답이요?”

“생각보다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아서요. 따로 사례라도 하는 게 맞겠죠.”

“……아아, 이 대리 말하는 거구나.”

덩달아 고기를 열심히 씹고 있던 은수는 머릿속에 이 대리의 능글맞은 얼굴을 떠올렸다.

“사례라…… 사례…….”

그런데 별안간 그의 얼굴 옆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러더니 예상치 못한 퍼즐 조각이 딱 맞춰 들어갔고, 순간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그거야! 내가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지?

속으로 유레카를 외친 그녀가 성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방금 좋은 생각났어요. 그것도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는 걸로.”

“……그래요? 그게 뭔데요?”

“…….”

후후후. 그녀의 입가에 왠지 모를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저 미소가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건 왜일까.

현재는 갑자기 불안해진 얼굴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 * *

“야, 넌 무슨 이런 데서 만나자고 하냐.”

[아, 왜. 가끔은 좀 고상하게 차도 마시고 그래야지.]

“우리한테 고상한 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응. 넌 몰라도 난 어울리지.]

“이게, 진짜.”

[아, 하여튼 조금만 기다려. 곧 도착하니까.]

“알았어. 빨리 와, 이 기집애야.”

아참, 얘 지금 임신한 상태지. 고작 빨리 오는 것 따위가 문제가 아닌데.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던 윤정은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하며 황급히 덧붙였다.

“아, 아니. 야, 빨리 안 와도 되니까 조심해서 와. 괜히 또 사고 치지 말고.”

[오오~ 허윤정 많이 컸네. 언니 걱정도 다 하고.]

“……헛소리 하지 말고 오기나 해. 안 오면 나 혼자 간다?”

[아, 알았어. 끊어. 좀 이따 봐.]

“오오냐.”

통화를 마친 윤정은 가방을 옆자리에 던져 둔 채 무료하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은수가 일방적인 약속 장소로 잡은 이곳은 커플들이나 올 법한, 아기자기한 개인 카페였다. 뭐, 말로는 커피도 맛있고 인테리어도 예뻐서 골랐다는데, 별 같잖은 이유였다. 인테리어야 그렇다 치고, 커피는 어차피 아기 때문에 마시지도 못하는 주제에 맛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다.

묵묵히 폰만 보고 있던 그녀는 문득 카페 내부를 샅샅이 두리번거렸다. 테이블도 편안하고 조명도 적당한 게, 이제 보니 소개팅을 하면 딱 괜찮을 것 같은 곳이었다.

진짜 하고 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이런 델 골랐을까. 오랜만에 보는 건데 곧장 밥이나 먹으러 갈 것이지.

“……아, 배고파.”

오늘따라 점심을 너무 일찍 먹어서인지 배가 너무나도 고파 왔다. 그녀가 몸을 움츠리며 주린 배를 감싸 안던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드디어 은수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어, 왔ㄴ……?”

하지만 무심코 뒤를 돌아본 그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윤정…… 씨?”

“……네?”

웬 멀끔하고 똑똑해 보이는 남자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 * *

같은 시각, 은수의 휴대폰에선 현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을까요? 친구분 성격 장난 아니라면서요.]

나갈 준비는커녕,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누워 한창 TV를 보고 있던 은수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괜찮아요. 뭐, 좋은 의돈데 해코지야 하겠어요. 또, 여자 입장에서 이 대리 정도면 싫다 할 상대는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임에 틀림없었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평소에 둘 다 외롭다고 난리를 쳐 댔었는데.

은수가 생각한 아이디어는 바로, 이 대리에 대한 답례 겸 윤정을 위한 선물로 두 사람 사이에 소개팅을 주선해 주는 것이었다. 다만, 그냥 소개팅은 밋밋하고 재미가 없으니 ‘서프라이즈’ 소개팅을 한번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은수는 윤정에게, 현재는 이 대리에게 각각 약속을 잡고 한 장소로 유인해 내기로.

당초 은수의 계획을 들은 현재는 그다지 탐탁지 않은 얼굴을 했지만, 은수는 명불허전 현란한 말솜씨의 소유자였다. 이 계획의 당위성과 성공 가능성을 열심히 피력하자, 어느새 그 또한 금방 그녀와 한패가 되어 있었다.

[근데 이 대리님한테 자꾸 전화 오는데요. 방금 전에 톡으로 어디 있냐고 왔어요.]

“그냥 무시해요. 때 되면 그만두겠죠. 참, 윤정이 이름은 가르쳐 줬죠?”

[네. 보니까 일단 둘이 만나기는 한 모양인데…….]

“그럼 그냥 놔둬요. 아마 이 대리가 알아서 눈치 까고 잘할 거예요.”

[……음. 알았어요.]

이 정도 했으면 주선자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잘되든 안 되든, 남은 건 오로지 그들의 몫이고.

은수는 간만에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딩동.

예상치 못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동그래진 그녀의 눈이 퍼뜩 현관을 향했다.

“어? 잠깐만요. 누구 온 것 같은데.”

[누구 오기로 했어요, 오늘?]

그럴 리가. 아이를 가져서인지 요즘 때 아닌 건망증이 좀 생기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것까지 까먹을 리는 없었다.

“……아뇨? 올 사람 없는데…….”

누굴까.

덜컥 놀란 은수는 문득 옆집을 떠올렸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옆집에 사는 학생이 가끔씩 직접 만든 빵이나 과자 등을 가져왔다며 초인종을 누를 때가 있었으니까. 비록 맛은 별로 없었지만 그 마음이 고마워서 항상 남김없이 먹어치우곤 했었는데. 찾아오는 주기로 미루어 볼 때 얼추 맞는 듯했다.

“옆집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누군지 보고 올 테니까 일단 끊어요, 현재 씨.”

대충 짐작을 마친 그녀의 목소리는 무덤덤했지만, 그녀와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조심해요. 혹시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필요 이상의 당부 멘트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이 남자는 진짜 내가 무슨 일곱 살짜리 앤 줄 아나 봐.

“에이, 그런 거면 내가 절대 안 들여보내죠. 걱정 말고 기다려요.”

[……알았어요. 그럼 바로 연락해요.]

“네.”

하여튼 이 남잔 걱정도 팔자라니까.

전화를 끊고 소파에서 일어난 그녀는 느릿느릿 인터폰을 향해 다가갔다. 누군지 모를 인물은 초인종을 간헐적으로 계속 눌러 대고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신경을 굉장히 거슬리게 하는 건 확실했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인터폰 화면으로 바깥에 누가 서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그녀가 전혀 생각도 못 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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