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71. 이번엔 실수가 아니야 (2)
물론 그녀 스스로는 현재의 아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전해 듣는 현재로서는 분명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그때는 그가 믿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은 없는 상황이었다. 별이가 누구의 아이이든지 은수는 저 혼자 키울 생각이었고, 때문에 굳이 유전자 검사 같은 걸로 핏줄을 확인시켜 줄 마음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현재는 별다른 의심도 없이 은수의 말을 믿었고, 당연하게 책임지겠다고 말했고, 심지어 결혼까지 하자고 했다. 그는 정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던 걸까. 일부러라도 그의 발목을 잡으려 하지 않은 그녀였다. 그를 괴롭히는 것이라 해 봤자 도덕적인 양심뿐이었을 텐데, 어째서 이리도 충실하게 아빠가 되어 준 걸까.
은수의 질문이 조금 뜻밖인지, 현재는 눈을 내리깔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답하기 민망한데. 너무 당연해서.”
“…….”
그렇게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가에 엷은 웃음기를 띤 그가 덧붙였다.
“은수 씨가…… 내 아이라고 말했으니까.”
“…….”
“그게 다예요. 다른 건 없었어요.”
……아, 묻는 내가 바보였다.
어쩜 이런 남자가 존재할까. 이다지도 바보 같은 남자가.
“……현재 씨 혹시, 사기 같은 거 잘 당하지 않아요?”
“사기요?”
“왜, 학교 앞에서 전단지 돌리면서…… 아니면 막 얼굴이 좋아 보인다면서, 그러는 사람들 있잖아요, 왜.”
“……그런 적 없는데.”
이를 드러내며 웃는 표정이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말을 귀엽다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은수는 진심으로 궁금할 지경이었다. 남자는 대체 어떤 집안에서 어떤 가르침을 받았기에 이렇게 멋진 걸까.
“진짜 사기캐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인터넷을 정보의 창고라 믿고 있으면서도 인터넷 용어 같은 데는 영 관심이 없는 그가 ‘사기캐’란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냥 뭐, 좀…… 너무 완벽하다. 그런 뜻이에요.”
“……완벽하다.”
은수의 말을 한 번 되풀이하며 곱씹은 그가 픽 웃었다.
“아무래도 은수 씨는 날 너무 좋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맞잖아요.”
“아니에요. 사실 나, 대학교 때는 싸가지 없다는 소리도 들었었는데.”
“……정말요?”
이 남자가 어딜 봐서 싸가지가 없다는 거야? 은수의 입술이 떡 벌어졌다.
알 만하다는 듯 웃은 그가 조곤조곤 설명하듯 말했다.
“내가 관심 있는 거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취업하면서는 성격을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력했지만…….”
“…….”
“그러니까 내 말은.”
한 템포 쉬고는, 현재가 은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런다고요. 은수 씨한테만 그래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
“사랑하는 사람한테 잘해 주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요.”
“…….”
이렇게 맹목적인 사랑을…… 내가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 사랑을, 내가 한 번이라도 받아 본 적이 있기는 한가.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에, 은수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의 눈빛이 눈부신 햇살이라도 되는 양 한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그와 이렇게 알몸으로 대화하는 게 처음인데도, 이상하리만큼 친숙하고 포근했다.
은수는 실로 오랜만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맘을 털어놓기를 잘한 것 같다고, 속으로 자신의 선택을 다시 한 번 칭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자꾸 들떴다. 평소 묻지 못했던 것들을 이참에 다 물어보고 싶은 맘도 들고.
팔베개를 내어 준 채, 은수를 말없이 내려다보는 현재의 눈길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이 따뜻했다. 편안해진 그녀는 그의 살결을 피아노 치듯 지분거리고 있었다.
“간지러워요.”
“아, 미안해요. 그냥 무심결에…….”
현재의 말을 의식한 은수가 제 손을 그의 허리춤에 얌전히 올려놓았지만, 그것도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다. 또 궁금증이 도진 탓이었다.
괜히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은 그녀가 다시 대뜸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갑자기 안 하던 질문들을 하네.”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도, 그는 질문을 받는 게 싫지 않다는 듯 맑게 웃었다.
“무슨 날……은 아니지만. 아니다, 무슨 날이네. 내가 고백했잖아요.”
“……그러네. 맞다.”
“아무튼…….”
이건 좀 물어보기 쑥스럽긴 한데, 그래도 너무너무너무 궁금했다.
“현재 씨는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아니다. 왜 좋아했어요?”
이런 걸 물어보리라곤 생각 못 했는데. 그에게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질문이 어렵네요.”
현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그녀의 입술은 저절로 헤 벌어졌다. 눈을 위로 치켜뜨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짜증 나게 잘생겼다. 이런 모습마저 사랑스러우니 정말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고밖엔 할 수 없지만, 뭐, 이제 다 털어놓고 고백한 마당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갑자기 싫어졌어요?”
“아니에요. 생각 중이에요.”
쿡쿡 웃으며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에 무엇으로 기인했는지 모를 미소가 만면했다.
그렇게 그녀가 잠시 군더더기 없는 얼굴을 뚫어져라 구경하고 있을 때 마침내 현재가 입을 열었다.
“그냥 좋은 건데, 은수 씨라서.”
……에이, 늘 이런 식이지. 한순간 맥이 빠졌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거 말고. 외적인 거라든가, 성격?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불만이 가득한 은수의 말에 웃은 그는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을 이었다.
“멋있었어요.”
“……내가요?”
몸을 떨어뜨리며 의외라는 듯 묻는 은수를 향해, 현재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신기했던 거 같아요. 나보다 다섯 살밖에 많지 않은데 팀장님이고. 근데 또 얼굴은 어려 보이고, 체구도 작고.”
“……그런 거랑 일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알아요, 상관없는 거. 산증인이 여기 있으니까.”
풀어 헤쳐진 머릿결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아기를 보듬는 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일 잘하는 게 멋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눈이 가고 그랬는데.”
“…….”
“그때까지만 해도 내 감정이 뭔지 잘 모르고 있다가, 그날 알았어요.”
“…….”
“…….”
……아.
따로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은수는 이내 ‘그날’이 그와 처음으로 보냈던 하룻밤을 뜻하는 것임을 말의 맥락을 통해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동경’ 같은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
“남자들더러 늑대라고 하는 거, 나한테 하는 소린 아니어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는데.”
“…….”
“꼭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까.”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에게서 풉,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말은, 현재 씨가 늑대란 거예요?”
대답은 않고 싱긋 웃는 게, 듣고 보니 정말 늑대스럽긴 한데…….
“……늑대라. 까짓 거 하죠, 뭐.”
“…….”
“평생 이렇게 있을 수만 있으면.”
아, 또 당했다. 심장 폭행.
이 남자는 어떻게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잘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진~짜 오늘 질문 많이 하긴 하는데요. 이건 지금까지 내내 물어보고 싶었던 거예요. 정말 진심으로.”
“뭔데요?”
“현재 씨, 솔직히 연애 많이 해 봤죠?”
“…….”
“아님 이럴 수가 없어. 아니, 그렇다고 내가 과거의 여자들을 상대로 질투를 한다거나…… 뭐, 내가 몇 번째냐고 묻는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닌데요…….”
“…….”
……솔직히 말하면 질투, 난다. 엄청.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솔직히…… 너무 사기잖아요. 어쩜…….”
이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 정말 억울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난 정말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답변을 하자면요.”
“…….”
“만날 때만큼은 상대방에게 충실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잘해 주려고 노력했고요. 근데, 다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어요.”
“……?”
“재미없대요, 내가.”
“……뭐라구요?!”
아니, 미친 거 아냐? 아무리 세상에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널리고 널렸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도현재를, 고작 재미없다는 이유로 마다하는 여자가 있을 수 있어?
“와, 그 여자들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진짜 호강에 받친 사람들이네. 아니, 현재 씨가 어디가 어때서요?”
“…….”
“아니, 물론 연애할 때 재미 찾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현재 씨가 그렇게 재미가 없지는 않…….”
“…….”
“……지는 않은데…….”
그녀의 목소리가 저절로 기어들어 갔다.
사실, 현재 씨가 재미있는 타입은 아니긴 하지. 그렇지만 그는 분명 단순히 재미 같은 걸로 평가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왜 이런 얘기에 흥분을 하게 되는 걸까. 그가 재미없다며 까였다는 말에 속시원해하기는커녕 왜 되레 발끈하게 되는 건지.
잠깐 멈칫해서 속으로 생각하던 은수는 물끄러미 웃는 현재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적어도 저에게만큼은 완벽한 남자인 그를 감히 흠까지 잡았다는, 이름 모를 여자들이 그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다 지난 얘기잖아요. 그리고 이제는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내 옆엔 은수 씨가 있는데.”
“…….”
“혹시,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무슨 말이요?”
하도 많은 대화를 나눠서 무슨 말을 뜻하는 건지 대번에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잠시 주저하는 듯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내가 좋아지면, 무조건 나한테 와야 한다고 했던 말.”
“…….”
“아직은 너무 일러요?”
“…….”
트라우마에 가깝다고 말할 정도로, 이래봬도 10년을 넘게 가져온 생각이었다. 이미 그가 좋아져 버리긴 했지만, 막상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게 당연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안 되냐고 말해 볼까.
그녀가 속으로 조심스럽게 되뇌는 사이,
“기다릴게요.”
그는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의 끝을 먼저 잘라 냈다.
“조급해하지 않을게요. 생각보다 은수 씨가 더 빨리 마음을 열어 줘서…… 그것만으로도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니까.”
두 사람의 눈빛이 다정하게 맞물렸다.
은수는 마음껏 기쁨을 표출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모든 걸 내어 주어도 좋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이 남자는 지금껏 아등바등 살아온 저를 위해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그렇다면 나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은수는 구구절절한 말보다는 그의 몸을 힘껏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는 진정, 그를 아무 데도 보낼 수가 없었다.
모로 누운 탓에 그와 그녀 사이에 놓이게 된 별이가 뱃속에서 까르르 요동쳤다.
그녀를 꼭 껴안으며 나직하게 웃는 남자의 목소리는, 은수에게 이 세상 어떤 음악 소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감미로웠다.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 힘써서 배고프죠.”
“…….”
“씻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우리 별이 살찌워야지.”
그도 어느샌가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잊어버린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