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70. 이번엔 실수가 아니야 (1)
어느새 기어코 눈물이 흐르고 있었나 보다.
“네? 뭐 때문에 그래요. 나 때문에 그래요?”
“…….”
이런 순간에마저 잔뜩 당황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살피는 도현재의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그것에 또 짜증이 났다.
씩씩대며 눈물을 흘리던 은수는 눈물을 닦아 주려는 듯한 현재의 손길을 매섭게 뿌리치고는 한이 맺힌 듯 목소릴 토해 내었다.
“……싫어서요!”
“…….”
“현재 씨 손길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도 싫고…… 현재 씨를 만지고 싶고 현재 씨가 날 안아 줬으면 좋겠는데, 그 모든 게 임신 때문인 건지 아니면 현재 씨가 좋아져서인지! 분간도 못 하고 헷갈리고 있는 것도 싫어요.”
“…….”
“또, 결혼은 싫다고 누누이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꾸만 현재 씨와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내가…… 끔찍해요.”
“…….”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서, 이런 적 처음이라서 정말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런데도 현재 씨가 내 옆에 있어 줬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 없는 내 마음이!”
“…….”
“다 싫어요, 너무너무…….”
뭐가 이렇게 싫은 게 많은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은수는 저도 모르게 그의 품에 고개를 박은 채 엉엉 울었다. 이렇게 울어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갑작스런 임신으로 인한 우울감, 그리고 그 때문에 이제껏 억눌려 있었던 억울함, 서러움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이렇게까지 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제 품에 안겨 떠나가라 울고 있는 은수가 안쓰러워서, 현재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 토닥였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씨, 괜찮긴 개뿔이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품에 좀 더 파고들게 되는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현재는 은수의 울음이 좀 그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점차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히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현재는 은수를 조심스럽게 놓아 주었다.
눈, 코가 빨개진 채로 훌쩍이는 은수는 평소 보던 ‘팀장님’답지 않게 무척 어리게만 보였다. 그리고 귀여웠다.
저도 모르게 나오려는 미소를 참은 그가 짐짓 물었다.
“그렇게 모든 게 다 싫어요?”
“…….”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긍정의 의미일 것이었다.
미소를 지은 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나는요.”
“…….”
“나도…… 싫어요?”
“…….”
무슨 소리냐는 듯이 은수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현재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녀는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응?”
“…….”
“싫어요?”
은수의 눈동자에 자그마한 지진이 일었다. 은수는 곤란한 질문인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안…….”
“…….”
“아, 안 싫어요…….”
대답 사이로 훌쩍거리는 소리가 추임새처럼 들어가 있다. 그게 왜 이리 귀여운지. 현재의 입꼬리에 미소가 어렸다.
“그럼요.”
“…….”
“…….”
“……좋……아요.”
여전한 울음기로 인해 소리가 기어들어 가고, 문장의 이음새가 뚝뚝 끊어졌다.
자상한 눈길로 은수를 쳐다보던 그가 살풋 웃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뭐라고요?”
분명 다 알아들어 놓고도 놀리려고 다시 묻는 것일 테다.
순간적으로 화딱지가 난 은수가 가열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씨, 좋아한다구요!”
“…….”
“좋아해요. 좋아서 죽을 것 같아요…….”
“…….”
……그리고 지금은 부끄러워 죽을 것 같구요.
너무 충동적인 고백이었지만, 말해 놓고 보니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이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어느샌가 은수의 얼굴은 울음과 부끄러움이 범벅되어 발개져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 제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하며 아득해졌다. 꼭, 제 맘을 받아 달라 울면서 고백하는 어린애 같지 않았을까.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쪽팔림에 뒤돌아 손등으로 눈가와 볼을 벅벅 닦아 내려는데, 그런 은수의 손목을 현재가 잡아챘다. 마디가 불거진 손이 은수의 손목을 꽤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은수의 붉어진 눈이 그를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
“…….”
순간이었다.
그 손목을 그대로 끌어당긴 현재는 미처 은수가 깨닫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짧은 키스. 나비가 앉았다 가는 것 같은 가벼운 입맞춤.
찰나 같았던 키스가 끝난 뒤 입술은 떼어졌지만 여전히 현재와 은수의 입술 사이 거리는 겨우 손톱 만큼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은수가 눈물조차 멈춰 버린 눈을 치켜뜨자 희미한 미소를 지은 현재가 은수의 입술 위로 숨결을 뱉으며 작게 속삭였다.
“어떡하지.”
“…….”
“이젠 내가 하고 싶어졌어요.”
“…….”
“그래도 돼요?”
그가 토하는 더운 열기가 입술을 감쌌다.
묘하게 야한 그 말에 물기로 잔뜩 젖은 은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갑작스런 상황이 당황스러운 나머지 눈이 자동 타이머마냥 깜빡깜빡거렸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녀보다 더한 답정너 기질이 있는지도 몰랐다.
“…….”
“…….”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얼굴 앞에서 이렇다 할 생각은 사치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그렇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그렇게 물어보면……
내가 싫다고 할 리가 없잖아요.
* * *
누군가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녀에겐 무척이나 생소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아빠라는 사람에게선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딸이었다. 은수라는 이름도 엄마 혼자 지은 이름이었다. 온화할 은에 빼어날 수. 이름 뜻 그대로 온화하고 빼어나게 자라라며. 은수를 그렇게 소중히 취급해 주는 사람도,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사람도 엄마 하나뿐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엄마마저도 자신보단 아빠를 먼저 챙긴다는 걸, 어린 은수는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아빠가 죽었을 때 이제는 엄마의 일 순위가 혹시 바뀌려나 했었는데,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당장 곁에 있는 게 딸인 은수뿐이었으니 그래 보였던 것뿐, 엄마의 마음속 일 순위는 언제나 아빠였고 지금도 그렇다는 걸 은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래서 오기로라도 결혼이란 걸 더 증오했던 것 같다. 그놈의 사랑이란 게 뭔지, 그게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진짜 소중하게 여겨 주어야 할 상대는 제쳐 두고 애먼 상대에게 더 정성을 쏟게 되는지, 그게 너무 고깝고 싫었으니까.
몇 번의 연애를 해 보고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새내기 시절, 그냥 서로 마음이 식어 평범하게 헤어진 사람도 있었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려 바람을 피운 놈 때문에 괘씸해한 적도 있었다. 짧게는 무려 일주일을 만난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남들보다는 다소 적은 횟수의 연애를 하고, 성격이 제각각이었던 상대들을 나름대로 경험해 보면서 그녀의 비혼주의는 더더욱 확고해져만 갔다.
그렇게 종잇장처럼 가볍고도 별것 없었던 연애들 끝에 만난 것이 서지훈이었다. 길어봐야 몇 개월쯤 지속되곤 했던 연애를 그와는 결과적으로 3년이나 했지 않은가.
3년이란 시간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래도 결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즉, 시간으로 좌우될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
그는 정말로 결혼을 원하는 남자였고, 그래서 결혼을 거부하는 은수를 존중해 줄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맘이 변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도 없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그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가치관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너무나도 다르며,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니까.
“……무슨 생각 해요?”
어느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나 보다.
첫 번째는 실수였지만 두 번째는 실수가 아니었다. 지금은 훤한 대낮이고, 술이라곤 둘 다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은수의 눈에 저와 똑같은 알몸이 된 채, 자신을 따뜻하게 그러안고 숨을 고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단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땀에 젖은 앞머리가, 그리고 뜨겁게 내뱉는 숨결이 지독하게 섹시했다.
그런 지훈을 떠나보내고 만난 게, 바로 이 사람. 도현재.
처음엔 단순히 재수 없게 잘못 엮였다고만 생각했다. 운이 나빠도 어쩜 이렇게 나쁠 수가 있는지. 원 나잇이 달리 원 나잇인가. 딱 한 번 밤을 보냈으니 원 나잇인 건데, 그 하룻밤에 덜컥 아이가 생겨 버렸다니 은수로선 통탄스러울 노릇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콘돔의 피임률 97퍼센트를 뚫어 버린 신의 아이가 그녀의 뱃속에 들어앉은 이후, 바뀌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행동 패턴이나 가치관, 마음가짐 등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흔들릴 것 같지 않던 결혼에 대한 마음까지도.
언젠가부터 자꾸만 당황스러운 마음이 스멀스멀 치고 올라왔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런 남자와 함께라면 결혼이란 것도 해 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
그의 얼굴이 코앞에 있는데도 부끄러워서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열에 젖어 하던 행위와는 모순되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시선을 점점 떨어뜨리는 사이, 현재가 은수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부끄러워요?”
“…….”
“얼굴 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 말에 더 부끄러워지는 건 왜인지.
결국 그의 손을 의지 삼아 눈을 맞춰 보려던 것도 빠르게 포기하고, 그녀는 그의 너른 품에 쏙 파고들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흥건히 적셨다.
그의 쇄골 즈음에 얼굴을 파묻었다. 향수 냄새일까, 아니면 스킨 냄새일까. 무엇인지 모를 향기가 은근한 땀 냄새와 달달한 체향에 한데 섞여 코를 간질였다.
맞닿은 심장은 마침내 만나게 된 진정한 상대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빠르게 쿵쾅대고 있었다.
“나…… 궁금한 거 있어요.”
“…….”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질문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코언저리에 가 있었다.
관계를 방금 막 마친 후이기 때문일까. 불타오르고 있는 얼굴의 감각은 그의 쳐다보는 눈길이 유난히도 뜨겁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얼굴 전체에 열이 올라 절로 화끈거렸다.
“……내가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그러니까, 현재 씨가 애 아빠인 것 같다고 말했을 때요.”
“네.”
“그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책임지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
“솔직히 나는 현재 씨가 그렇게 빨리 받아들일 줄 몰랐어요. 내가 증거를 들이민 것도 아니고, 현재 씨 애가 아닐 수도 있었고.”
“…….”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수긍했는지.”
……항상 궁금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