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69. 한 번만 할래요, 나랑?
그녀는 차오르는 숨을 애써 삼키며 입을 열었다.
“……현재 씨.”
“네.”
복도 중간 반쯤 열린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이상하게 몸이 달달 떨렸다. 춥지도 않은 날씨이건만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마 떨어지질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제가 입을 열지 않으면 그가 정말로 가 버릴 것 같아서, 은수는 기를 쓰고 입술을 떼어 내었다.
“오해는 말아요. 현재 씨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난 지금 누군가가 옆에 꼭 필요해서 그런 거예요. 아프기도 하고…….”
“…….”
“그러니까…….”
찢어질 듯 건조해진 입술을 혀로 한번 축이고, 그녀는 마침내 덧붙였다.
“……가지…… 마요.”
그 여자한테. 아니, 어느 여자에게도…….
실은 그렇게 덧붙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쪽팔리고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방금 전까지 가라고 하더니, 사실은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는 걸 스스로 밝혀 버린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은수를 빤히 바라보던 현재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난, 은수 씨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요.”
“…….”
“어느 곳도.”
* * *
간밤엔 쉬이 잠에 들 수 있었다. 숨쉬기도 한결 편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따끔따끔하던 목도 어느새 니스 칠을 한 듯 매끄러운 느낌이었다. 아마도 현재가 만들어 준 배숙이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다.
훨씬 가뿐한 컨디션이 된 은수는 다행히 오늘은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운 것을 보니 아직 새벽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다른 무엇이 아닌 제 쪽을 바라보고 잠들어 있는 현재의 얼굴이었다.
지난 밤, 은수가 잠들고 나면 간다고 말했던 그였다. 잠결에 느끼기에 훨씬 상태가 좋아진 목과는 달리 몸은 어딘가 갑갑하다 싶었더니, 그건 현재가 그녀의 몸을 안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자연스레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바로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
휴일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더욱 좋아져서, 그녀는 새벽과 맞지 않게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는 가지 않았다. 다른 어느 곳도, 그리고 다른 여자에게도…….
어젯밤 그가 어느 곳도 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은수는 그가 꼭 다른 여자에게 가지 않겠다고 대답한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귀가 어떻게 된 것도 아니면서 착각도 아주 가지가지였다.
어쨌든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은수가 죽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은수를 품에 안아 잠을 재워 주기까지 했다. 그의 자세한 심중은 알 수 없었지만, 저가 가지 말라고 한 이후로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진 것 같았다. 설거지를 할 때는 심지어 콧노래까지 부르고.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지난밤의 선택은 무척 탁월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근데 인간적으로 너무 꽉 안고 있는 것 아냐? 내가 무슨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악력이면 뱃속의 별이마저도 답답하다고 호소할 것만 같다.
포즈가 너무 불편했던 나머지 그녀는 무심코 몸을 움직였다.
“……으음.”
그 바람에 현재도 덩달아 잠이 깨 버렸다.
눈가를 몇 번 움찔거린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어요?”
“네. 몸은 좀 괜찮아요?”
아침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다소 허스키했다.
“네. 덕분에요.”
“다행이다. 아, 깜빡 잠들었네…….”
“……밤에 간다면서요.”
아직 잠에 취해 목소리가 잔뜩 잠긴 그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은수 씨 자는 거 보고 가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 봐요. 지금 몇 시죠.”
“음…….”
은수가 침대 맡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했다.
“다섯 시요. 좀 더 자요. 오늘 토요일이에요.”
은수의 속삭임에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들어가 봐야 돼요.”
역시 부모님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어제 그렇게 붙잡지 않고 그냥 가게 두었으면 그가 외박을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괜히 미안해졌다.
“그럼, 얼른 가 봐요.”
“네. 조금만 이렇게 있다가요.”
짤막하게 대답한 현재가 은수의 허리를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이제 배가 꽤 튀어나와서 완전히 밀착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런데 허리에 감겨 있던 그의 손이 갑작스레 은수의 허리를 꾹꾹 누르며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
그 손길에 놀란 은수가 허리를 움직이려 하자, 현재가 그녀의 허리를 꼭 붙잡았다.
“왜, 왜…….”
“가만있어요. 이렇게 있는 김에 안마 좀 해 주게.”
……지금 이 판국에 안마는 무슨!
“아, 안 해 줘도 돼요.”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허리를 꾹꾹 누르고, 부드럽게 지분거리는 손길엔 단순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지만, 은수에게는 그것이 너무나도 불순한 손길로 다가왔다. 그는 지금 본인이 은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자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는 당연히, 그저 책에서 본 것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중일 것이었다. 아마도 아기가 커갈수록 허리에 통증이 생기니 각별히 신경 써 주라는 글을 읽었을 터.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성실한 학구열이 지독하게 미웠다. 왜 이런 걸 배워 와서는……. 그의 손길이 닿는 허리 군데군데가 다리미가 지나다니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렇게 마사지를 받던 중, 어제의 일이 주마등처럼 은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말할까 말까 고민은 했지만 일단 뱉고 보니 적어도 후회는 없었다. 만약 후회를 한다 해도 말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말하고 후회하는 편이 훨씬 나은 것이었다.
물론 이번엔 그냥 후회가 아니라 아마 몇 배 더 큰 후회가 될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딱 한 번만, 정말 딱 한 번만 용기 내서 말해보고 싶어졌다.
마침내 은수는 결단을 내렸다. 은수의 손이 등 뒤로 옮겨 가, 계속해서 허리를 마사지하고 있는 현재의 손을 잡고 앞으로 떼어 놓았다. 그러자 현재는 은수가 부끄러움에 괜히 거부한다 생각했는지 다시 손을 원래대로 옮기려 했다. 은수는 그걸 또 제지했다.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현재 씨.”
“네?”
“이런 거…… 하지 마요.”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은수를 쳐다보았다.
“왜요. 허리 아프지 않아요? 이렇게 해 주면 좋다던데…….”
“……아니, 저기.”
“…….”
“나 사실은…… 요즘 좀, 이상해요.”
“뭐가요?”
운을 떼기는 뗐는데, 이제 뭐라고 해야 하나. 저를 너무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뒷말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을 보니 그녀는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피를 잃고 말았다. 최대한 그가 덜 이상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잠시 동안 고민하던 은수는 결국, ‘성박사’가 했던 말을 인용하기로 했다.
“임신을 하면…… 그 전보다 성욕이 늘기도 한대요. 그래서 예전이랑 달라지기도 하고, 그런다고…….”
“…….”
“실은…… 요즘 자꾸 몸이 예민해져서, 현재 씨가 날 만질 때마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
현재는 아무 말이 없었다.
후우,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숨을 고른 은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누가 그러는데, 임신 중에 적절한 성관계는 아이한테 좋대요. 아이에게 기분 좋은 흔들림……을 준다고 하던데…….”
이 정도면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으리라. 나도 단번에 알아들은 말이니까.
그러나 현재는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현재가 아무 반응이 없자 은수는 조급해졌다. 쪽만 팔리고 아무 소득이 없다면 말하지 않는 게 나았을 것이므로.
“…….”
“…….”
아직도 묵묵부답. 현재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려던 은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을 더했다.
“그러니까…….”
“…….”
“한 번만…… 할래요?”
“…….”
“나랑……요.”
목적어가 빠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몸이 티 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현재는 은수를 제 품에서 잠시 떼어 냈다. 은수는 스스로 말해 놓고도 부끄러운 나머지 그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의미를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현재는 은수를 향해 되물었다.
“지금 은수 씨가 말하는 그 한 번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거, 맞아요?”
잠시 뜸을 들이던 은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걸요.”
아오, 씨. 쪽팔려. 기어코 이렇게 됐네.
차마 현재의 품에 얼굴을 파묻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자책하고 있는 은수의 귓가로 현재의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도 책에서 읽었어요. 임신을 하면 성욕이 주는 사람도 있지만 갑자기 느는 사람도 있다고, 그래서 부부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고요. 그런데…….”
“…….”
“그땐 실수였지만, 지금 내가 은수 씨랑 그런 걸 한다면, 그건 더 이상 실수가 아니에요.”
“……알아요.”
“그래도 하고 싶어요?”
“……네.”
“…….”
“알아요, 나도 아는데…… 내가 지금 무지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아는데요. 근데, 자꾸 현재 씨만 보면…….”
“…….”
“나도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인지, 무슨 감정인지 혼란스러워요. 그러니까 제발 설명하게 하지 말고……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만, 하면 안 돼요?”
둘 사이엔 잠시 동안 정적만이 가득했다.
현재의 허리춤에 올라간 은수의 손이 그의 셔츠 자락을 잡고 꼼지락거렸다. 그 손길에 초조함이 잔뜩 묻어났다.
은수를 가만히 보고 있던 현재가 중얼거렸다.
“나는…….”
“…….”
“은수 씨를 좋아해요. 그래서…… 그렇게 하고 나서 모른 척 지낸다는 건, 나한테 고문과 같을 거예요.”
“…….”
“나도 그렇지만 은수 씨도…… 사랑하지 않는 나하고 다시 그렇게 하고 나면, 괜찮겠어요? 후회하지 않겠어요?”
“…….”
“응?”
은수는 일단 그와 하기만 하면 자신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생각하지 못하고 불쑥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를 마주하면서 내내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인데…….
그런데 지금 그는 그녀를 향해 다시 묻고 있었다. 겉으로 듣기엔 단순히 후회하지 않겠냐는 질문이었지만, 그건 꼭…… 도현재를 사랑해서 그러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확인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은수의 확실한 마음을.
은수는 갑자기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현 상황이 너무너무 싫어졌다. 그리고 억울한 마음까지 해일처럼 밀려왔다. 내가 왜, 내가 대체 왜 이런 걸로 고민을 하고 힘들어해야 하는 거지? 이 민은수가?
너무 억울해서 눈물까지 흘러나오려고 했다. 굳은 심지와 강철 같은 마인드로 회사 생활도 척척 잘 헤쳐 나가던 민은수가. 단 한 사람, 도현재 앞에서는 병아리만도 못하게 약해진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내가 저보다 나이도 다섯 살이나 많고, 직급도 높은데…… 왜 딴 사람 앞에선 안 그러면서 이 인간 앞에만 서면 어린애가 되는 것 같은지……. 생각할수록 서러웠다.
“……은수 씨?”
“…….”
“왜, 왜 울어요, 아침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