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 감기 혹은 상사병 (3)
은수는 눈을 감은 채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벽을 사이에 두고 나는 소리 같진 않았다. 꼭 누군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소리 같은데. 하지만 엄마가 아닌 이상 누군가 와서 부엌을 쓸 리는 없었다.
뜨기 싫은 눈을 억지로 뜨고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열린 문을 통해 잘빠진 남자의 뒤태가 눈에 확 들어왔다.
어?
“……현재 씨?”
“어, 깼어요?”
은수의 부름에 그가 휙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평소 은수조차 잘 하지 않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채였다. 뭘 젓고 있었는지 손에는 주걱 같은 것도 들려 있었다.
“어…… 어떻게 왔어요? 지금 몇 시…….”
“아직 얼마 안 됐어요. 저녁이에요.”
주걱을 놓아두고 앞치마를 풀어 식탁에 올려놓은 현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배고프죠. 죽 만들었어요.”
“……근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현재가 집을 방문할 때는 항상 은수가 문을 열어 주었었는데, 오늘은 그녀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기 때문에 그 혼자서 걸어 들어왔다는 얘기가 되었다. 물론 그녀도 현재가 알아서 들어온 것에 대한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비밀번호를 알려 준 기억은 없는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은수에게, 현재는 변명하듯이 입을 열었다.
“전화해서 물어보려다가…… 은수 씨 생년월일 한번 쳐 봤는데, 되더라고요.”
“…….”
“깨우기 싫어서……. 실례한 거면 미안해요.”
아아, 그렇구나……. 이해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결국 내가 너무 단순한 비밀번호를 해 놓은 게 문제였어. 그래도 설마 예의의 아이콘 도현재가 그걸 쳐 볼 줄은.
앞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현재를 외면하던 은수가 집 안을 감도는 이상한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 여러 가지 냄새들이 섞여 있는 듯한데 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 맛있는 냄새도 아니고…….
“근데 이게 무슨 냄새예요……?”
“아.”
그가 부엌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은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인터넷에서 보고 만든 거라서…… 좀 야맨데.”
“…….”
“배숙 만들어 봤어요. 감기에 좋대요.”
“…….”
이런 걸 보면 참 탄복할 정성이다. 여자인 저도 전혀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배숙을 남자인 현재가 만들어 보겠다고 낑낑거렸을 걸 생각하니, 은수는 아픈 중에도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한번 먹어 볼래요?”
“……네.”
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금방 넓은 그릇에 노오란 빛깔의 음료를 따라서 숟가락과 함께 가져왔다. 그릇을 쥐자마자 손으로 뜨끈한 온기가 전해졌다.
……마셔도 이상은 없는 거겠지?
나름 모양을 낸답시고 배에 통후추를 야무지게 박아 넣은 것도 보였다. 야매라고 하니 마시기가 조금 두려웠지만, 생각보다 냄새나 모양이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를 위해 해 준 성의가 있으니 마셔야 하는 건 당연한 일. 그녀는 주춤주춤 그릇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어때요?”
천천히 들이켜는 은수를 보며 현재는 초조하게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맛있어요.”
“정말요?”
“네. 처음 먹어 보는데 맛있네요.”
누군가 배숙 같은 걸 해 줬어야 말이지. 엄마조차도 감기에 걸리면 약을 주거나 죽을 쒀 주었지, 배숙은 만들어 준 적이 없었다.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것이라 원래의 맛도 모르고 비교도 불가능했지만, 빈말이 아니라 그가 만든 배숙은 달달하면서 약간 맵싹한 게 정말로 맛이 꽤 좋았다.
한시름 놓은 그가 밝게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아직 많이 있으니까 더 먹어요. 이게 감기에 직빵이래요.”
“‘직빵’이요?”
“네. 왜요?”
“……아니에요.”
그녀는 그의 물음에 모른 척하며 남은 배숙을 홀짝홀짝 마셨다. 사실 현재가 워낙 정석적인 사람이라 직빵 같은 단어를 쓰는 건 영 어울리지가 않아서 웃음이 나온 거였다.
그래도 어쩐지, 그의 말대로 정말 직빵일 것만 같았다. 따끈한 배숙이 들어가니 속이 뜨뜻해지는 게 은수는 금방 감기가 나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걱정하는 마음에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해 재료들을 사고, 결국엔 이렇게 완성품까지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 무척 감동이었다.
“고마워요, 이런 것까지 해 줘서.”
“아니에요. 은수 씬 얼른 낫기만 해요.”
은수가 오래 익혀서 한껏 물렁해진 배를 한 숟갈 잘라 먹는데, 그러는 저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박혀들었다. 자연스레 낮의 그 일이 연상되어 떠올랐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될까.
“…….”
“…….”
뜨끈하게 녹아드는 배를 삼킨 은수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현재 씨.”
“네?”
“아까 낮에 그 여자…… 왜 그렇게 보냈어요?”
“…….”
“거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긍정도 아니고…… 영 애매하던데.”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은수가 자고 일어나자마자 그 일에 대해 물어 오는 것이 약간 의외인 모양이었다.
아이씨. 괜히 물어봤나?
은수는 그냥 입을 다물자고 생각하며 깨작깨작 한 모금씩 배숙을 떠먹었다.
“…….”
잠시 동안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현재가 마침내 침대 끄트머리에 앉으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거절이었어요.”
은수의 미간이 단번에 좁아졌다.
……거절이었다고?
“그게요?”
“네. 은수 씨 보자마자 바로 뒤도 안 돌아보고 갔잖아요.”
“…….”
“그게 나한텐 거절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사실 은수가 보기에 그건 거절이라기보다는 단순 회피였다. 난처한 상황에 반가운 얼굴이 보이니까 상황을 피할 겸 자신을 불렀던 것이 아닐까 하는.
그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넌지시 꿰뚫었다.
“은수 씨가 찜찜하면 다음번엔 확실하게 말할게요. 나 임자 있으니까 쳐다도 보지 말라고.”
은수의 눈이 현재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그녀가 쥔 스푼이 그릇 안을 덧없이 노닐며 달그닥거렸다.
“…….”
다른 여자가 그를 보는 게 싫었다. 그에게 연락처를 묻는 것도, 당연히 싫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자신이 뭐라고 할 처지는 못 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거절을 하든 회피를 하든, 그건 현재의 마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현재 씬 내 남자 친구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내가 뭐라고 할 상황은 아니죠.”
“…….”
“그냥…… 그럴 때 확실하게 말하지 않으면, 여자들은 오해하고 더 달라붙으니까…….”
“…….”
“그래서…….”
나는, 그래서 말해 주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속으로 애써 합리화를 했다.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 시선을 피하고 있는 은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현재가 불쑥 그녀를 불렀다.
“은수 씨.”
“…….”
“……내가 좋아졌죠?”
“…….”
“그래서 지금 신경 쓰이는 거죠, 그 여자.”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돌직구를 날릴 줄이야.
그의 성격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직설적인 질문에 은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히, 괜히 물어본 질문이었다.
은수는 얼른 졸린 척을 하기로 했다.
“나…… 잠을 덜 자서요. 좀 더 잘게요. 현재 씬 이제 그만 가도 돼요.”
은수는 그릇을 얼른 옆에 내려놓고 다시 침대에 누워 등을 돌렸다. 뒤늦게 뒤에서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수 씨 죽 먹는 거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조금 더 있을게요.”
“……아니에요. 현재 씨도 피곤하잖아요. 얼른 가요.”
“정말, 가요?”
“……네.”
“…….”
“어머니가 외박 잦아서 걱정하신다면서요. 그리고…… 감기 옮을 수도 있고…….”
“은수 씨.”
은수의 쓸쓸한 읊조림을, 그가 단칼에 잘라 냈다.
무심결에 다시 돌아누운 은수는 남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
잠시의 망설임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은수 씨는 참 솔직하고, 당당하고,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은수 씨도 알고 있죠?”
“…….”
“그런데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꼭, 맘을 굳게 닫아 놓은 사람 같기도 하고.”
“…….”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은수 씨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
“가끔은 좀 솔직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
남자의 말에는 굵은 뼈가 있었다.
현재를 올려다보는 은수의 눈빛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갈게요. 푹 쉬어요. 죽 꼭 챙겨 먹고요.”
“…….”
뭐지, 이 기분은.
평소 같았으면 고집을 부려 더 있었을 그가, 오늘은 웬일인지 정말로 가려는 듯했다. 은수는 그의 뒷모습을 언뜻 훔쳐보고 있었다.
가려다 말고 은수를 한번 돌아본 현재는 옷가지를 챙겨 든 채 현관 쪽으로 향했다. 사각거리는 그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이윽고 바깥 공기가 잠깐 새어 들더니, 띠리링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잦아들었다. 그가 떠난 것이다.
“……하아.”
아프니까 한숨도 뜨겁네.
은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정말로 가 버렸다, 그 남자가.
평소엔 가라고 가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던 도현재가, 내가 죽을 먹는 것도 보지 않고…… 잠들길 기다리지도 않고…….
방금 전 남자의 눈빛과 표정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마치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던 그 표정.
“…….”
가라고 하지 말걸.
갑작스럽게 엄청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있었던 침대 옆 빈자리가 급속도로 차갑게 식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엄청난 외로움이 그녀를 덮쳤다.
‘……안 돼. 잡아야 돼!’
그녀의 직감이 간만에 소리 내어 외치고 있었다.
결국 은수는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얼른 뛰어나가 현관문을 열어 젖혔다.
벌써 아래층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지 저 밑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은수는 제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무거운 배를 부여잡고 계단을 후다닥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에 있는 이라곤 그들뿐이어서, 다급하게 울리는 은수의 발소리가 건물 전체로 유난히 크게 퍼져 나갔다.
그렇게 한 층을 내려가자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은수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뛰어오는 바람에 헉헉대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한 그가 깜짝 놀라는 것 또한 연이어 보였다. 그가 얼른 계단을 다시 올라와 은수에게로 다가왔다.
“은수 씨?”
“…….”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갑자기 왜 나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