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67. 감기 혹은 상사병 (2)
“……도현재 씨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은수는 그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은수를 따라 박 과장도 자연히 그의 모습을 좇았지만, 현재는 자리에 없었다.
“어,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아, 맞다. 자료 받을 거 있다고 법무팀인가 간다는 것 같던데요, 아까.”
“그래요……?”
그렇구나…….
박 과장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화장실로 향한 은수는 맘속으로 내내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도현재, 도현재……. 이름은 또 왜 그렇게 예뻐서 자꾸만 입 안에 맴돌게 하는 건지.
일을 본 뒤 손을 씻으면서, 은수는 지난 일주일을 생각했다.
문제의 키스를 했던 그날 이후, 은수는 교묘하게 그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예전처럼 대놓고 피하는 건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그건 이미 현재가 그녀를 ‘팀장님’이라는 호칭 대신 ‘은수 씨’라고 밥 먹듯이 부르게 된 순간부터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이제 은수의 생활에 너무나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가 집에 올 수 없도록 막는다거나, 개인의 프라이버시라는 명목을 내세워 있지도 않은 선약을 지어낸다거나 하는 것뿐이었다. 허나 그래 봤자 현재는 불도저였다.
단숨에 밀고 들어오지는 않지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그녀가 굳건히 쌓아 놓은 철벽을 깎아 내리고 있는……. 그러다 나중에 돌아보면 ‘벌써 이만큼이나 가까워졌어?’ 하고 깨닫게 되는, 무서운 불도저. 현재가 그렇게 나올수록 은수는 나날이 불안해졌다.
임신을 한 뒤 은수에게 온 변화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요즘 가장 크게 부각되는 것은 바로 들끓고 있는 성욕이었다. 이제는 단순히 현재가 신경 쓰이고 그의 손길에 반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꾸만 무언가를 더 바라게 되고, 오히려 그의 몸을 자꾸만 찾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건 무슨 청상과부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 그를 피하는 것은 두 배, 아니 몇 배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맘은 그렇지 않은데 억지로 머리의 결정을 따르려다 보니 자꾸만 삐거덕거리는 것이었다. 이럴 바에야 솔직하게 한번 얘기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의 앞에만 서면 입술이 절로 꾹 다물렸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전 남자 친구들과도 나름 원만한 성생활을 해 왔고, 이제껏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임신 중 스트레스는 독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을 줄 누가 알았겠어.
지금만 해도 그랬다. 마음은 그를 찾고 싶다고 말하는데, 머리는 그냥 빨리 사무실로 돌아가라 하고 있었다. 어차피 몸도 좋지 않겠다, 그냥 현재가 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가 말을 하면 되는 것인데…….
그래도 그녀는 굳이 그를 찾아 나서고 싶었다. 여자의 이상한 육감 같은 것이 발동하는 느낌. 지금 당장 그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아까 전, 법무팀에 갔다고 했었지.
은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법무팀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침내 엘리베이터에서 한 발짝 내린 은수가 대충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들 사무실에 들어가 있는지 복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가 어디 있을지 유추해 보며 모퉁이를 돌려는데, 드디어 낯익은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뒤통수만 보아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사람.
“현재 ㅆ……!”
그러나 현재를 부르려던 은수의 외침은 이내 꿀꺽 삼켜졌다. 누군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던 현재의 앞으로 웬 여자 한 명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네? 저요?”
어리둥절한 현재가 여자에게 손가락으로 저를 찍어 보이며 물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가 본데.
그러나 은수는 이상하게 여자의 모습이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들은 목소리와, 머리를 야무지게 올려 묶은 뒷모습이 왠지 익숙했다. 그리고 잠시 뒤, 은수는 제게 왜 그 여자가 익숙한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네. 도현재 씨 맞으시죠? 저번에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어? 저 목소린…….
‘마케팅 1팀 팀장님 맞으시죠. 민은수 팀장님……이시던가?’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억이 났다. 몇 달 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그 여자!
“왜, 저번에 민희랑 함께 있었던……. 기억 안 나세요?”
“…….”
잠시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눈을 굴리던 남자는 여자를 늦게 알아본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 네…… 반갑습니다.”
멀찍이 선 은수 또한, 현재를 보자마자 헬렐레했던 여자의 얼굴이며, 엘리베이터를 내리면서 자신을 휙 째려봤던 그 눈빛까지 그제야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아니, 저 여자가 왜 저기에……?
그러고 보니 여자가 내렸던 층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 같다. 은수는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고개만 빠끔히 내밀어 그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좀 갑작스러우시죠. 죄송해요.”
“아니에요. 무슨 용무신데요?”
뒷짐 진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던 여자는 그의 말에 그것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제가 만든 쿠키예요. 한번 드셔 보시라구요.”
“이걸…… 저 주신다구요?”
갑작스런 선물에 놀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굴러떨어질 듯이 커져 있다.
“……왜요?”
진심으로, 왜 자기한테 이런 걸 주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한 어조. 이럴 분위기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은수는 그만 픽 웃음이 났다.
반면 현재 앞에 선 여자는 답지 않게 매우 수줍은 얼굴이었다.
“사실은, 저번부터 언제 말을 걸까 고민하다가…… 오늘 저희 층에 계신 거 보고 달려온 거예요.”
“…….”
“저, 꽤 오래전부터 도현재 씨한테 관심 있었거든요.”
“…….”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여자 친구 있으신지 여쭤 봐도 되나요?”
“…….”
그는 굉장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남자의 외모로 보자면 이전에도 이런 일이 꽤 많았을 법한데…… 고백 받을 때마다 저런 얼굴이었던 건가.
은수는 순간 그가 무어라 대답할지 궁금해졌다.
여자 친구가 없는 건 당연히 맞지만, 분명 내가 있고…… 저번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었고. 그렇다면…… 알아서 둘러대지 않을까?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자 친구는 없는데요…….”
현재는 역시나 솔직했고,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
그래,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여자 친구는 아니니까 뭐…….
곧이곧대로 인정하게 되면서도, 은수는 은근히 서운해졌다. 염치도 없지. 그렇게 싫다 할 때는 언제고 막상 딴 여자한테 여자 친구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속상해하는 꼴이라니…….
그럼에도 섭섭해지는 마음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정말요? 그럼…… 연락처 좀 여쭤 봐도 돼요?”
“연락……처요.”
연락처 소리에 그의 이마에 주름이 지는 것이 보였다. 저런 걸 보면 연락처는 주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주려나?
……에이, 설마…….
은수가 혼자서 속으로 열심히 모노드라마를 찍고 있을 때, 난처한 듯이 눈을 깜빡이던 그가 무심코 모퉁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그때, 그들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은수의 눈길과 그의 눈길이 떡하니 마주쳐 버렸다.
“……어?”
“……!”
……부르지 마. 부르지 말라고!
“은ㅅ…… 아니, 팀장님!”
부르지 말라니까! 하여튼 눈치는 더럽게 없어 가지고……!
은수는 그가 제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당장 벽에 몸을 기대섰다.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궁금해 슬그머니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얘기하죠.”
“네? 아니, 그래도 이건 가져가시ㅈ…….”
여자의 목소리가 흩어짐과 동시에 걸음을 재촉하며 이곳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마침내 그가 은수의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까진 웬일이에요. 저 찾으셨어요?”
그의 손엔 쿠키가 들려 있지 않았다. 아마 여자에게 다시 주고 온 모양이었다.
“아…… 다른 건 아니고…….”
은수는 더듬더듬, 원래 현재에게 전하려 했던 말을 내뱉으려 했다. 그런데 현재의 뒤로 그 여자가 은수 쪽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레이저가 발사될 것 같은 눈빛.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왠지 주눅이 들어서, 은수는 잠시 몸을 움츠렸다.
“그…… 현재 씨가 신제품 시장 조사…….”
콜록, 콜록. 공기가 건조해서인지 금방 또 기침이 튀어나왔다.
“어디 아파요? 왜 기침을…….”
아, 이 남자 앞에선 약한 티를 내고 싶지 않은데.
“감기 기운이 좀…… 있나 봐요. 괜찮아요. 아까 레몬 티도 마셨어요.”
“간밤에 춥게 잔 거 아니에요? 덥다더니 냉방병인가, 설마…….”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은수의 이마를 짚으려 했지만,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여기선 좀…….”
재빨리 몸을 뒤로 빼는 은수 때문에 현재의 손은 그대로 허공에 떠 버리고 말았다.
“아…… 그렇지.”
현재는 민망하게 펼쳐져 있는 제 손을 접으며 멋쩍게 씩 웃었다. 둘이 있을 때만 하던 행동을 회사에서 할 뻔하다니. 습관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다.
“신제품이 왜요?”
맞다. 이 말을 하려고 했지.
“아, 신제품 기획안이 2주 당겨졌어요. 그래서…… 시장 조사 빨리 끝내야 한다고 말해 주러…….”
“아아…….”
근데 말해 놓고 보니 정말 너무 아무것도 아닌 이유네.
이 부끄러움을 지우려면 얼른 이곳을 떠야 했다. 손으로 대충 머리를 빗어 내린 은수는 야무지게 입술을 모았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팀장님.”
그가 무의식적으로 돌아서려는 은수의 손목을 세게 그러쥐었다.
“……!”
그러나 은수의 놀란 얼굴을 본 그는 다시 한 번 아차, 하는 표정이 되더니 이내 손목을 놓았다. 마음이 급해서 또 한 번 실수를 한 것이었다.
“같이 가요. 저도 가려던 길이었어요.”
“그럼…… 그래요.”
휴. 결국 혼자 도망가게는 안 놔두겠다, 이거지.
은수는 하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현재의 옆에 함께 올라탔다. 왠지 모르게, 자신이 현재와 그 여자 사이에서 불청객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 * *
결국 은수는 버텨 보려던 마음을 뒤로하고 조퇴를 했다. 오후로 갈수록 기침과 오한이 심해져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는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팀장이 돼서 그런 꼴을 팀원들에게 절대 보여 줄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당연히 현재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당장 은수를 데려다주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그들은 직급 자체가 달랐고, 결정적으로 그는 아픈 데 하나 없이 아주 멀쩡했기 때문에 조퇴는 절대 불가능했다. 그의 도움이 절실해도 할 수 없었다.
실로 정말 오랜만에, 은수는 혼자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은 은수는 곧장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진 공간 안에서 은수는 뜨거운 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뭐든 현재와 함께였다. 같은 회사, 같은 팀이니 일을 함께하는 건 당연한 거였고 밥을 먹는다거나, 주말에 영화를 보는 일, 잠자는 일까지……. 하루가 그로 시작해서 그로 끝나는 느낌마저 들었다. 사실상 남편 노릇이 아닌가.
그 남자에게 그런 걸 바란 건 결코 아니었는데…… 습자지에 먹이 스며들듯 그는 조심스럽게 은수의 일상을 장악해 나갔다. 처음엔 민감하게 굴던 그녀도 갈수록 무장 해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가 이만큼 좋아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 좀 좋아해 달라고, 넘어와 달라고 그렇게나 보채는데 어떻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냐고.
“하아…….”
죽겠다, 정말. 아파서…… 그리고 도현재가 너무 신경 쓰여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이불 밖으로 나오게 된 그녀의 얼굴에 미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자꾸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지. 옆집에서 뭐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