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66. 감기 혹은 상사병 (1)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콜록, 아, 아니에요! 사레가, 콜록, 걸려서……!”
“그러고 보니까 얼굴이 빨간데. 열 있는 거 아니에요?”
“……네? 아, 아니, 열은 없을 텐데…….”
이건 아파서가 아니라, 내 몹쓸 생각 때문에…… 아니, 근본적으로 도현재 당신 때문인 건데……요.
남의 속도 모르고, 현재는 은수의 이마에 제 손을 덥석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은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비껴 앉았다. 이런 행동이 안 그래도 불타고 있는 고구마를 더 불타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은수의 소리 없는 외침이 들리지 않는 현재는 제 이마에 손을 올려 비교까지 해 가며 불필요하게 인간 온도계를 자처하고 있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갛지.”
“거 봐요, 괜찮다니까…….”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 놓은 건가?”
“……아니에요. 별로 안 틀었는데…….”
안 되겠다. 대충 둘러대야지. 이러다간 끝이 없을 남자임을 은수는 잘 알고 있었다.
“임신하면 원래 기초 체온이 올라간대요. 더워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성화를 잠재우려던 은수의 변명에, 그는 오히려 더 극성이 되었다.
그녀가 ‘덥다’고 한 것 때문이었다.
“그래요? 그럼 빨리 에어컨 틀어야죠. 왜 덥게 있어요.”
“아…… 요즘 전기세가 너무 비싸서…….”
“임산부가 몸을 먼저 생각해야죠. 그깟 전기세 얼마나 한다고. 틀고 올게요.”
“저기, 현재 씨……!”
현재는 은수의 만류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더니, 알아서 에어컨을 조작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졸지에 은수는 뾰로통해졌다.
아주 내 집이 아니라 님 집이세요. 그렇다고 이렇게 막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깟 전기세라니. 혼자 사는 직장인의 설움을 모르시는구만, 아주…….
불만을 표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현재 앞에서 돈에 구질구질해지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돈이 좀 더 들더라도 그의 말대로 시원하게 지내는 게 별이에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했고.
“이 온도로 쭉 유지해요. 알겠죠?”
“……밖이랑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니에요?”
“안에 있을 때라도 시원하게 지내야죠. 나도 들었는데, 임신한 사람한테는 더운 게 정말 안 좋대요. 이 정도면 딱 좋아요.”
“아니, 뭐…… 나야 괜찮긴 한데요. 전기세 많이 나오면 엄마가 자꾸 뭐라고 해서…….”
어차피 돈은 은수가 내는 것이었지만, 엄마는 집에 올 때마다 일일이 고지서들을 확인하며 사사건건 참견을 하곤 했다. 제발 전기 코드 안 쓰는 것들은 뽑아 놓으라는 둥, 온수는 되도록 온수 전용으로 쓰라는 둥…….
엄마는 본인이 생활에서 겪은 팁들을 은수에게 풀어 놓기를 좋아했지만, 은수는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다. 그래도 제가 전기나 가스 등을 헤프게 쓰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아, 어머니가요?”
“네. 참, 현재 씨는 울 엄마 얘기 처음 듣는 거죠.”
“네.”
하긴, 얘기할 필요가 없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초밥을 집어 들려던 은수의 귀에 조심스러운 현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은수 씨 어머님은 알고 계세요?”
“……뭘요?”
“우리 별이요.”
저 말은…… 임신에 대한 사실을 엄마에게 알렸냐고 물어보는 것일 테다.
언질도 한 번 주지 못한 은수는 찔린 나머지 젓가락을 살짝 물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아뇨. 아직 말 안 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렇구나.”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약간 머뭇거린 뒤 덧붙였다.
“그럼, 어머니께는 얼른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우리 부모님한테는 좀 나중에 말씀 드린다 쳐도…….”
“……네?!”
그의 말에 놀란 은수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 버렸다.
덕분에 현재는 초밥을 씹다 말고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의 표정을 본 은수는 그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특히, 아버지에게 말할 생각까지 있는 줄은…….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갖고 있어서 전혀 왕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 그러니까…… 부모님한테 말씀드릴 생각이었어요?”
“…….”
“나는…… 음, 현재 씨 부모님이 아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우리 일이잖아요. 어차피 아셔 봤자 만날 일도 없을 거고…….”
자신이 내뱉은 말임에도, 묘하게 선을 가르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것 같아 은수는 흠칫했다.
현재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더니, 다행히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다시 초밥으로 젓가락을 옮겼다.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덤덤했지만, 얼굴엔 살짝 어두운 기가 돌았다.
“……그렇기는 하죠.”
“…….”
“그래도 은수 씨가 앞으로 계속 일하려면 육아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우리 엄마든, 은수 씨 어머님이든. 물론 내가 도와주긴 할 거지만, 많이 부족할 테니까요.”
“…….”
……아, 그런 깊은 생각을…….
은수는 급격히 민망해지면서 그에게 미안해지고 말았다.
“……미안해요. 별 뜻은 없었는데…… 그냥, 놀라서…….”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좋지가 않았다.
은수가 계속해서 그의 얼굴을 살피는 동안, 락교에 젓가락을 가져다 댄 그가 머뭇머뭇 덧붙였다.
“가끔은.”
“…….”
“은수 씨가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까먹을 때가 있어요, 나도 모르게.”
“…….”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먹어요. 괜찮아요.”
애당초 그들 사이에 미래에 대한 약속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켕길 것도 결코 없었지만, 어쩐지 이렇게 자신의 입장이 그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는 이상야릇한 감정이 번번이 올라왔다. 이건 단순히 미안함이라 하기에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네. 현재 씨도요.”
그런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 그렇게 말을 하면 참…… 퍽이나 신경이 안 쓰이겠네.
은수는 어두운 기가 가시지 않은 남자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 * *
“안녕하세요, 고객님. 주문하시겠어요?”
“레몬 티 한 잔 주세요.”
“드시고 가세요?”
“아뇨, 콜록, 테이크아웃이요.”
몇 마디나 했다고 또 기침이지.
침을 넘길 때마다 쎄하던 목구멍은 기침 때문에 더욱 찢어질 듯이 따가웠다. 말이 씨가 된다고, 어쩐지 불안불안하더라니.
병원에 가 보지는 않았지만 증상으로 보아 보나마나 감기 몸살 같았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 어차피 임신 중이다 보니 약이나 주사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그녀가 자가 치유를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택한 방법은 바로 따뜻한 차를 마셔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비타민 C가 가득 담겼을 것 같은 레몬 티.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냥 차보다는 나을 테니까. 나름의 임시방편인 셈이었다.
그녀가 임신을 하고 바뀐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늘 입에 달고 살던 커피를 과감히 끊어 버리고, 그 대신 생과일주스나 차 종류, 에이드 종류를 마시게 된 것. 마시다 보니 그런 음료들도 썩 나쁘지 않아서 적당히 마셔 주고 있었다. 거기에다 몇 가지 변화들을 추가한다면, 수시로 지갑에서 초음파 사진을 꺼내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 것,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느라 그녀의 곁을 늘 떠나질 않았던 병적인 강박이 사라졌다는 것 정도가 있었다.
보통 목감기가 시작되면 며칠 뒤 자연스레 코감기로까지 번지곤 해서 초장에 잡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단은 목에 손수건을 감아 놓은 것이 다였다. 몸이 서서히 달궈지는 것 같은 게 사무실 공기가 더워서인지, 아니면 몸에서 나는 열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결국 은수는 책상에 팔을 올린 채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만약 정도가 심해진다면 조퇴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무리해서 일을 하다간 저뿐만 아니라 아기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 빤하니까.
“아, 머리 아파…….”
머리 아파 죽겠는데 이 와중에 또 화장실은 가고 싶고…….
결국 화장실에 가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데, 책상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한준호 팀장]
휴대폰을 들어 액정에 뜬 저장명을 본 그녀는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
이 인간이 나한테 무슨 일로…….
운 좋게 인사 조치는 면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은수의 무서움을 실감하고 만 그는 몸을 사릴 필요가 있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녀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는 중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전화를 건 걸 보면 아마 일 얘기일 것 같은데. 오늘은 또 어떤 기함할 소리가 나올는지.
잔뜩 메인 목을 레몬 티 한 모금으로 풀어 준 은수가 느릿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민 팀장. 난데.]
“네, 무슨 일이세요?”
[다른 건 아니고, 이번에 신제품 마케팅 기획안 올리기로 한 거 있지.]
“아, 네. 왜요? 그거 다음 달까지 하기로 한 거 아니에요?”
[어, 근데 상부에서 2주 뒤까지 마무리하라고 지시가 들어왔어. 출시를 좀 앞당길 건가 봐.]
“아니, 갑자기 그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다 절차가 있는 건데.”
[우리도 당황스럽긴 한데, 저쪽에서 임산부 제품 관련해서 워낙 벼르고 있으니까. 거기보단 빨리 출시해야 한다고 난리야. 선빵 날릴 속셈인 거지.]
“그건 그렇지만, 아직 개발도 제대로 안 된 제품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아무튼, 좀 서둘러야 하니까 알고 있으라고.]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민 팀장 목소리가 영 아니네. 어디 아파?]
“아,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요.”
[몸 조심해야지, 여자가. 홀몸도 아닌데.]
“…….”
[그럼 그렇게 알고, 수고해.]
“네. 한 팀장님도 수고하세요.”
하여튼, 이 인간은 꼭 잘 나간다 싶다가도 이런 식으로 사람 기분을 잡친단 말이야. 무슨 말만 하면 ‘여자가’, ‘여자가’. 웃기고 자빠졌어, 아주.
버릇이 한번 잘못 들면 도저히 바뀔 수 없다는 걸 친히 보여 주고 있는 사람이다. 에잇, 쓸데없이 또 기분 잡쳤네.
휴대폰을 재킷 안쪽에 신경질적으로 쑤셔 넣은 은수는 나가는 김에 이 사실을 팀원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팀장님, 목 안 좋으세요?”
“네? 왜요?”
“목에 손수건…….”
“……아아.”
너무 내 몸 같았던 나머지 이걸 하고 있었단 걸 까먹고 있었다. 은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수건 끝을 매만졌다.
“아니에요.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그 말에 박 과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고, 요즘 여름 감기 무서운데. 약도 못 드셔서 어떡해요. 그러고 보니까 목소리도 너무 안 좋으시네.”
“괜찮아요. 아직 심각하지는 않아요. 참, 박 과장님. 신제품 기획안 2주 뒤로 앞당겨졌다니까 팀원들한테 좀 알려 주세요. 제가 나중에 따로 얘기할 거긴 한데, 요즘 신경 쓸 일이 워낙 많아서…… 혹시나 해서요.”
“아, 예. 알겠습니다. 말해 놓겠습니다.”
“신제품 시장 조사 누구 담당이었죠?”
“어, 잠시만요…….”
옆에 있던 파일을 잠시 살펴보던 박 과장이 은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현재 씨 담당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