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65. 세 번째 키스
그는 마치 굶주린 짐승이 된 것처럼 그녀에게로 무너져 내렸다. 그가 움켜쥔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었고, 허공에 떠 있던 그녀의 손은 방황하며 그의 가슴께를 간질였다. 역으로 그가 입술을 부딪쳐 오자마자, 제가 먼저 당돌하게 입을 맞췄던 것은 금방 잊어버린 채였다.
그는 이내 남은 한 손으로 은수의 어깨를 꼭 움켜잡았다. 그 움직임이 왠지 모르게 간절해 보였다면 우스울까. 그런데 진정 그랬다. 그리고 그 손길이 묘하게 은수를 안심시켰다. 약간 아플 정도로 꽉 조여드는 어깨의 느낌이 이유 모를 만족감 같은 것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덕분에 은수는 곧 긴장을 풀고, 그가 선사하는 꿈결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다. 상상하던 일이 다시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감읍해서인지, 아니면 일어날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키스에 경황이 없어서인지. 꼭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펄펄 끓는 찻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처럼 뭉근하게 피어오르고 녹진해지는 느낌이었다.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점차 풀어지고, 은수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은 조심스레 옮겨가 그녀의 볼을 감싸 쥐었다. 바깥에서 실내로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아 약간은 서늘한 손의 온도가 발갛게 달아오른 은수의 볼을 식혔다.
그는 입맞춤마저 도현재스러웠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맘과 몸은 달아 있는 게 보이는데도 그걸 자제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평소 그의 성정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욕적인 섹시함이 은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입맞춤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제 욕구에 급급하지 않고 은수를 먼저 배려하는 그의 키스는 매우 부드러웠다. 혀를 섞는다거나 하는 이렇다 할 큰 움직임은 없었지만, 그는 간간이 입술을 벌리면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듯 은수의 입술을 약하게 머금었다. 그러한 행동에 그녀는 또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뻐근하게 저렸다.
죽을 맛이었다. 그에게 너무 홀딱 빠지게 된 것 같아서.
홀몸이 아닌 은수를 고려해 나름 자제를 하고 있어서인지 성적인 어필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 키스임에도, 아래쪽 어딘가가 천천히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모아 앉은 허벅지 안쪽이 부르르 떨리고 턱 끝에선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의 가슴 언저리에 올려놓았던 손은 어느새 그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고 있었다.
순간, 은수는 아까 전 맘 카페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녀는 제가 했던 생각도 다시금 떠올렸다.
‘나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야, 완전 취소.
그와 입을 맞추고 나서야 은수는 지금 자신이 그를 향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으스러져도 좋으니, 정말 그럴 수 있을 때까지 안기고 싶은 거였다.
물론 여기서 안긴다는 의미는, 본래 표현의 뜻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그와 입을 맞추고 있다간 금방이라도 일을 칠 것만 같아서, 은수는 조심스럽게 현재의 가슴팍을 밀어내었다. 눈을 감고 있던 현재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뜨며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자, 듣기 민망하게 축축한 소리가 났다. 마찬가지로 꼭 감겨 있던 은수의 눈꺼풀도 스르르 쌍꺼풀을 만들며 말려 올라갔지만, 차마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으므로 말리다 만 눈꺼풀 사이로 까만 눈동자만 또르륵 굴렸다.
“…….”
“…….”
이제…… 뭘 해야 하지? 뭐라고 해?
따뜻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 같았다. 시베리아 벌판이라도 이만할까.
먼저 입을 맞춘 죄가 있는지라 이 상황에선 제가 조용히 있어선 안 될 것 같은데, 도저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좋은 머리를 몇 초 안 되는 시간 동안 열심히 굴려 댄 은수는 고개를 숙인 채 현재의 눈치를 살살 보며 더듬더듬 말을 뱉어 냈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땐 최후의 보루, 별이 핑계를 대는 수밖에.
“방금, 또 발로 찼어요, 별이가…….”
“……그래요?”
“네.”
“…….”
“……싫은가 봐요.”
당연히 개뻥이었다. 순도 100퍼센트. 평화롭게 유영하고 있는 듯 뚜렷한 요동은 없는 별이였다. 하지만 어쨌든 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그녀는 별이의 발차기와 같은 무언가가 절실했다.
어차피 그가 배에 손을 대지 않는 한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꽤 괜찮은 핑계였다고 자찬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은 곧 현재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로 인해서 깨어졌다.
왜냐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웃음기 띤 얼굴에 ‘참 애쓴다.’라고 씌어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은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초밥, 미지근해지면 맛없는데.”
“아.”
그런데 이건 꽤 효과가 있었다.
은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재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지더니, 주춤주춤─아니, 약간 어기적거린단 표현이 맞을까.─원래의 포지션으로 돌아가 은수 앞으로 초밥과 간장을 밀어 주는 것이었다.
그가 ‘초밥’ 소리에 바로 반응을 해 오자 은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진작 이걸 말했어야 하는데. 이 남자는 지금 날 어떻게든 잘 먹이고 싶어서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고작 발차기 핑계 같은 걸 댔으니…….
이미 식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는 방금 전까지 키스를 하던 것도 잊은 것처럼, 바로 은수에게 초밥을 먹이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좀 더 지나기 전에 얼른 먹어요. 불고기도 해 줄까요? 아님 갈비?”
불고기란 아직도 냉장고에서 버티고 있는, 마트에서 사 온 양념 불고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가 꽤 많은 양을 담아 주었는지, 두 번 정도 해 먹고도 2인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이 상황에 둘 다를 먹는 건 무리일 것이다.
테이블에 놓인 초밥 세트를 내려다보던 은수는 현재의 눈치를 보며 턱짓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먹을까요?”
“여기서 먹기 불편해요?”
은수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현재는 “그럼 그렇게 해요.” 하면서 얼른 그것들을 식탁으로 옮겨 주었다.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현재를 보며, 은수는 방금 전 상황이 설마 자신의 꿈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부끄러워서 며칠간 얼굴도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예상보다 너무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것 같았다.
쭈뼛쭈뼛 몸을 일으킨 은수가 식탁 의자로 가서 앉았다. 반대편으로 가 앉은 현재는 아까 전 은수가 뜯어 놓은 나무젓가락을 건네주며 직접 손에 끼워 주기까지 했다. 그의 친절이 평소에는 그저 고맙기만 했는데 지금은 왜 이리 불편한지. 이래 가지고는 정말 불고기는커녕, 눈앞에 있는 초밥이나 잘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제대로 체해서 손을 딴다거나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겠지.
그런 그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현재는 예의 그 큰 눈으로 똘망똘망 은수가 초밥을 입에 넣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
아…… 부담스럽다. 너무너무.
남자의 눈길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얹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은수는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를 억지로 풀려고 노력하면서, 연어 초밥 하나를 집어 입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또 곧바로 한 개를 더 집어넣었다. 그가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것도 막 미어터져라 넣고 싶은 걸 간신히 참은 거라고.
“천천히 먹어요. 맛있어요?”
햄스터처럼 양 볼이 빵빵해진 채로 초밥을 씹는 은수를, 현재는 마냥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은수가 초밥 두 개를 다 먹을 때까지 현재는 단 한 개도 먹지 않은 채였다. 그저 은수가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마지막 밥알을 꼭꼭 씹어 넘기고 나서야 은수는 좀처럼 젓가락을 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현재를 채근했다.
“현재 씨도 얼른 먹어요.”
“난 사실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그럼 나 혼자 이거 다 먹으라구요. 저녁 안 먹은 거 아니었어요? 아까는 같이 먹자면서요.”
“아까까진…… 배가 좀 고팠었는데.”
“…….”
“지금은 배가 안 고프네요.”
……왜 배가 안 고픈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녀도 피차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뿔싸. 또다시 아까의 키스가 떠오르려고 했다.
“……그, 그래도 얼른 먹어요.”
“네.”
“빨리빨리!”
“알았어요.”
부채질하듯 손을 펄럭거리면서까지 빨리 먹을 것을 채근하자, 그가 담백하게 웃더니 생선 초밥 한 개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그 와중에 또 잘 먹는 모습이 흐뭇하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현재가 초밥을 먹는 모양을 감상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 오물거리는 도톰한 입술이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그러자 아까의 그 섹시한 표정까지 덤으로 떠오르면서…….
‘어우, 진짜. 어뜩하냐……. 정신 차려, 민은수!’
현재가 눈을 내리까는 사이 그녀는 비둘기처럼 머리를 파드득 흔들었다. 아무래도…… 일부러 노력하지 않는 한 당분간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은 있을 수 없을 듯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저녁을 같이 먹을 때면 보통은 그대로 쭉 잠까지 이 집에서 해결하곤 하는 그였는데. 오늘도 그렇게 할 생각인지 궁금했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은수가 열심히 초밥을 먹고 있는 그를 나지막이 불렀다.
“현재 씨.”
“네?”
“오늘…… 자고 갈 거예요?”
“……아.”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가 씹던 초밥을 꿀꺽 삼키곤 아쉬운 듯 대답했다.
“오늘은 힘들 것 같아요. 요즘 외박이 잦다고 좀…… 뭐라고 하셔서.”
“어머님이요……?”
“네. 아직도 악몽 꾸고 그러는 건 아니죠?”
“……아뇨, 악몽은 이제 안 꾸는데…….”
그냥, 보통 이런 날은 자고 가기에…….
목소리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이 티가 났을까. 현재가 젓가락으로 초밥을 괜히 툭툭 건드리고 있는 은수의 얼굴을 넌지시 올려 보았다.
“……가지 말까요?”
“……어머님이 걱정하신다면서요.”
“말씀드리면 되죠.”
“……아니에요. 그럴 것까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당연히 그를 보내고 싶지 않다. 맘 같아선 포근한 그의 품에 쏙 안겨 그 특유의 향기를 맡으며 잠을 청하고 싶었다. 잘 자라는 토닥임도 받고 싶고, 나지막한 자장가도 듣고 싶었다. 그리고…… 또…… 또…….
……콜록, 콜록!
불현듯 또 엉뚱한 곳에 생각이 닿는 바람에 물을 마시다 말고 사레가 걸린 은수는 아저씨처럼 기침을 하고 말았다.
난데없는 기침 소리에 놀라 눈이 왕방울만 해진 현재가 은수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