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64. 한 번 했는데 두 번 못 하리란 법 있나
이젠 그가 전화를 거는 것이 더 이상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에게서 전화가 올 때면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은수는 그의 번호를 눌러 통화를 시도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화는 거의 바로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현재 씨, 전화했었네요?”
[아, 네. 지금 집이에요?]
“네.”
[저녁 먹었어요?]
“아뇨, 아직……. 또 오려구요?”
[싫어요?]
언젠가부터 거의 전담 영양사급으로 식사를 직접 챙겨 주는 그였다. 남 눈이 무서워 외식은 무리인데, 이렇게나마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런 건 아닌데…….”
그녀는 괜히 손가락으로 젖은 머리칼을 빙빙 꼬았다.
[싫은 거 아니면 금방 갈게요. 배고파도 조금만 기다려요.]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우면서도, 그녀가 거절의 말을 하지도 못하게끔 단호했다.
처음엔 엄청나게 예의를 차리던 그도 이제 이런 약속 정도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성사시켜 버리곤 했다. 물론 그때마다 별다른 약속이 없었긴 했지만, 그가 집에 오는 것이 편한 일은 아니었기에 단번에 알겠다 하지는 않았던 은수였다. 그럼에도 그는 번번이 그녀의 허락을 받아 내는 데 기어코 성공하고 말았다. 진정 포기를 모르는 남자, 의지의 사나이라고밖엔.
“알았어요. 언제쯤 도착해요?”
[나도 지금 집이니까 언제든 갈 수 있어요. 은수 씬 언제가 편해요?]
“한…… 한 시간 정도 뒤에요.”
[알았어요. 그럼 그때 봐요.]
“네, 끊어요.”
그렇게 전화가 끊겼고, 은수는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옷장을 열었다. 그가 오기 전에 최소한의 준비는 해 놓아야 했다.
옷장을 열자마자 얼마 전 새로 구입한 임부복이 바로 보였다. 나름 임부복 같지 않으면서도 활동성이 있어 보여서 맘에 들었던 옷.
‘오늘 한번 입어 봐야지.’
개시의 날이라는 느낌이 팍 오네.
그러나 한껏 기대하면서 옷에 몸을 끼워 넣은 은수는 잠시 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
……영 이상한 것 같은데. 뭐가 문젤까…….
개중에 특별히 제일 예뻐 보이는 걸로 골라 산 옷이건만, 불룩 튀어나온 배 때문인지 전혀 태가 나는 것 같지 않았다. 얼굴은 왠지 찐빵처럼 빵빵해 보이고, 피부도 푸석해 보였다. 모델이나 연예인들은 임신해도 똑같이 예쁘기만 하던데, 난 뭐지?
‘하여튼 맘에 안 드는 거 투성이야.’
이렇게 된 이상, 체념을 하는 게 여러모로 맘이 편한 방법이었다.
달관의 경지에 오른 은수는 거울 앞에서 벗어나 화장대에 앉았다. 상태가 좋지 않은 머리에 그나마 자극이 덜 가도록 손에 헤어 에센스를 덜어 바르고, 드라이어를 켜서 찬바람으로 머리를 말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머리카락들은 또 일사분란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무슨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머리카락만으로 그녀가 어떤 경로로 나다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그녀는 한바탕 우울한 기분으로 준비를 마쳤고, 그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남짓 뒤에 그가 찾아왔다.
은수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으레 그랬듯, 오늘도 그는 손에 바리바리 무언가를 싸 들고 온 채였다.
“이게 다 뭐예요?”
“저번에 보니까 은수 씨가 고길 좋아하는 거 같아서 갈비 재운 거 있길래 조금 들고 왔어요. 두고 먹어요.”
“그럼 이건요?”
“초밥이요. 은수 씨 연어 좋아하잖아요. 일부러 연어 많은 걸로 골라 사 왔어요.”
“…….”
……이걸 다 어떡하지, 진짜?
눈앞에 있는 음식들은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이 남자가 자꾸 이렇게 날 먹여 대는데, 살이 안 찌려야 안 찔 수가 있겠냐고.
물론 줘도 안 먹으면 되는 거지만…… 요즘 들어 성욕과 함께 식욕도 장난 아니게 오르는 바람에 자제도 잘 안 되는 걸 어찌한담.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에 다짜고짜 초밥 상을 마련하는 현재에게 은수는 툭, 질문 아닌 질문을 던졌다.
“요새 나 좀 살찐 것 같죠.”
“……네?”
“진짜 엄청 찐 거 같아…….”
답정너 같은 소리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마 저 남자는 ‘답정너’라는 말이 뭔지도 잘 모르겠지. 은수는 제가 물어 놓고도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살짝 두려워졌다.
현재는 초밥과 곁들일 간장의 뚜껑을 열며 지그시 웃었다.
“……에이, 아닌 거 같은데요.”
“……방금 대답 엄청 느렸던 거 알죠.”
“…….”
들켰다는 듯이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알 만하다. 은수는 부러 흥, 하며 나무젓가락을 뜯었다.
“위로하려고 하지 마요. 나도 눈 있어요.”
“근데 진짜예요. 오히려 먹는 거에 비해서 안 찌는 것 같아서 신기한데.”
“그 말은, 아예 안 찐 건 아니라는 거네요?”
“아니, 물론, 아예 안 찔 수는 없죠. 아기를 가졌는데 어떻게 안 쪄요.”
“……연예인들은 배만 볼록 튀어나오던데.”
“그건 그 사람들이 비정상인 거고요.”
“…….”
역시 그의 사고는 보통 남자들의 것과는 달랐다. 어떤 말을 하면 여자들이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과거에 여자가 많았나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선수냐?’ 하기에는 숙맥 같은 묘한 이질감이 있어서, 그녀는 그의 숨겨진 과거가 궁금해지곤 했다.
아님 누구한테 코치라도 받는 건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은수의 눈길을 뒤로하고, 현재는 초밥 뚜껑을 열며 힘주어 덧붙였다.
“근데…… 그래도 예뻐요, 은수 씨는.”
“…….”
“예전엔 너무 말라서 안쓰러웠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볼살 오른 것도 귀엽고, 좀 더 어려 보인다고 해야 하나.”
“…….”
“은수 씨는 임신을 하든 안 하든, 살이 찌든 안 찌든 그냥 은수 씨예요. 난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은수 씨 모습이 제일 예뻐요. 처음 봤을 때보다도 훨씬.”
“…….”
……이 남자는 참, 감동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하는 습성이 있단 말이야.
감동받았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은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살도 살이지만, 머리도 엄청 빠지고…… 피부도 부쩍 안 좋아지고…… 그런데도요?”
“……난 잘 모르겠는데, 그런 거.”
워낙 거짓말, 빈말은 못 하는 성격이다. 티가 안 나는 걸로 봐선 진심인 것 같은데.
“……정말요?”
“사람 말 못 믿어요? 좀 믿어요. 진짜 예쁘다니까.”
“…….”
“그러니까 이제 이것 좀 먹어요.”
그러면서 그는 은수의 앞으로 초밥을 밀어 주었다.
기분이 꿀꿀해서 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의 젓가락은 저도 모르게 초밥을 향하고 있었다.
‘으, 자존심 상해……’
그래도 저렇게나 예쁘다는데, 뭐. 일단 먹고 보자.
댓 발 튀어나온 입을 하고서도 꿋꿋하게 초밥을 우물거리는 여자를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근데 이제 보니까 배가 제법 나온 것 같긴 하네요. 힘들지 않아요?”
“……처음이라 좀 힘들기는 한데.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아직까진.”
현재는 쑥쑥 크는 별이로 인해 벌써 꽤나 솟아오른 배가 경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임신을 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변화를 굳이 겪고, 또 많은 일들을 그녀가 홀로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미안해졌다.
그래서 좋지 않은 생각들은 더더욱 하지 않게 해 주고 싶었다. 그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일 테니까.
“은수 씨는 다 예쁜데, 그중에서도 특히 눈이 참 예뻐요. 너무 맑고, 모든 게 다 들여다보일 것 같은 눈이에요.”
“…….”
사돈 남 말 하시네. 그러는 자기는…… 더한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녀가 작게 입술을 비죽였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은수 씨는 충분히 예쁜 사람이니까 자꾸 안 좋은 생각하지 마요. 임신하면 원래 다들 그런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은수 씬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가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은수는 그게 진짜 그의 진심일 거라고 믿고 싶어졌다. 이런 말이라도 결코 허투루 할 사람은 아니니까.
남자의 큰 눈에 자신의 모습이 오롯이 들어차는 것이 보였다. 마치 그가 제 앞에서 무릎을 꿇던 그날처럼. 은수는 그의 눈에 이렇게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만이 담길 때마다, 이상하게 감격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현재 씨도 그래요.”
“…….”
“눈이 엄청 크고, 예쁘고…… 꼭, 호수 같아.”
“…….”
“……우리 별이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배 위를 쓰다듬던 그녀의 손이 저도 모르게 천천히 옆에 앉은 현재의 얼굴로 향했다. 봉긋한 볼을 살짝 어루만지던 손은 어느새 콧잔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콧대도 이렇게 오뚝하면 좋겠고.”
“…….”
“입술도…….”
지도상에서 목적지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듯이, 은수의 손가락이 콧잔등을 거쳐 이내 그의 입술을 스쳤다. 뜬금없는 은수의 스킨십에 놀란 그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생기 가득했던 눈빛이 불안정하게 이지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은수의 손가락은 꽤 오랜 시간 동안 현재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그날 밤보다 훨씬 부드러운 촉감이었다.
그러는 사이, 은수는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제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도 느려서, 까딱하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은수가 그의 입술을 만지작거리기 위해 더 이상 팔을 쭉 펴지 않아도 될 만큼, 아니, 오히려 팔을 접어야 할 만큼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현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게서 닿는 숨결이 촉촉했다. 사랑하는 여자의 입술을 코앞에 두고도 현재는 제 입술을 혀로 축이며 고민하는 듯했다. 그런 현재의 고민을 접게 만든 건 바로 은수였다.
그날 새벽에도 은수의 감정은 지금과 똑같았다. 그때 만약 현재가 깨어 있었더라면 진작 이런 일이 일어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은수는 남자치곤 붉은 편인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 그 바람에 부끄럽게 촉, 하는 소리가 난 건 물론이었다. 그 소리에 금세 볼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은수는 현재에게서 얼른 몸을 떨어뜨렸다.
“…….”
“…….”
그는 어느새 정색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자신을 답답하다고 탓하면서 화를 낼 때 봤었던 것도 같은 표정.
지레 무서워진 은수는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바, 방금은…….”
“…….”
“……방금 난…… 별이 아빠한테 한 거예요. 현재 씨가 아니라…….”
“…….”
“그, 그게…… 그러니까…….”
“…….”
“너무…… 고마워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냐. 그게 그거지……!
제가 생각해도 너무나 궁색한 변명에, 은수는 자책하며 속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
그러나 그에게선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잠시 뒤, 현재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난…….”
“…….”
“방금 은수 씨랑 한 건데.”
마치 뚫릴 것만 같은, 강렬한 눈빛.
“별이 엄마 말고요.”
은수는 평소 다정하고 따뜻하기만 하던 현재의 목소리가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축축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한 말장난을 똑같이 되돌려 준 것이지만, 그게 어쩐지 장난으로만 들리지 않는 건 왜인지.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서일까.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런 입맞춤은. 그들의 관계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아니,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는데.
그런데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은수는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의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았다.
“…….”
“…….”
천천히 두 입술이 맞닿았고,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전에 없이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입술을 마주하며 온기를 나누었다.
꿈보다 더 달콤한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