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63화 (63/128)

# 63

63. 이상신호 (4)

예기치 못한 칭찬을 들은 그가 자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남자의 성격상 티 내려고 일부러 한 행동이 아닐 것이기에, 그 웃음에 뿌듯함 같은 것은 어려 있지 않았다. 그저 겸손해 보이기만 할 뿐.

뭐 이런 사기캐가 다 있어?

잔뜩 설레면서도 또 한편으론 탓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멋있는 그가 짜증이 나서, 그녀는 그를 살짝 째려보았다.

“이거 나중에 어떻게 하면 돼요?”

“신랑이 직접 해 주려고?”

“네.”

“대단하네. 그거 그냥 프라이팬에 기름 조금 두르고 볶으면 돼. 쉬워.”

“오, 쉽다…….”

거기다 이 남자는 한술만 더 뜨는 게 아니라 두 술 더 뜨네, 완전.

은수는 한 소리 하는 대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잠자코 고기를 한 점 더 먹었다.

한편 현재는 아주머니와 죽이 잘 맞아 대화를 끝마칠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근데 저기, 이거 조미료 많이 안 들어간 거 맞아요? 조미료 최소 사용이라고 적혀 있긴 하는데…….”

“당연하지. 조미료도 별로 안 쓰고, 오늘 아침에 갓 한 거야.”

“아…… 아주머니, 혹시 다른 건 추천해 주실 만한 거 뭐 없을까요? 이왕이면 유기농이나, 좀 좋은 게 들어간 거면 좋겠는데.”

“색시가 입덧 많이 했어?”

“네. 좀 고생했어요, 입덧 때문에.”

“아이구, 그러면 이제부터라도 영양가 높은 거 많이 멕여. 가리지 말고 뭐든 다 잘 먹어야 돼. 잉어 같은 거 푹 고아 먹으면 좋은데.”

“잉어요?”

“응. 여자한테는 잉어가 최고지. 요즘은 잉어즙 같은 것도 많이 팔어.”

“아, 그래요…….”

‘잉어’ 소리에 표정이 비장해지는 게 내일 당장이라도 잉어를 잡아서 고아 올 태세인데, 이거…….

“……현재 씨.”

아주머니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듣고 있다간 정말로 그럴 것만 같다. 은수는 불안해진 나머지, 이제 그만 가자는 뜻으로 현재의 팔뚝을 끌어당겼다.

그런 그들에게로 아주머니는 결정타를 한 방 날렸다.

“남편이 색시를 증말 많이 좋아하나 봐. 지극 정성이네, 아주.”

……하하하, 그저 웃음만.

“안녕히 계세요!”

아주머니께 꾸벅 인사를 마친 은수가 현재를 잡아끌고 얼른 걸음을 옮겼다.

죄송하지만 남편이 아니라서 문제예요, 아주머니…….

* * *

타닥타닥.

한가로운 주말 저녁, 은수의 손가락이 신중하게 키보드 위를 두드렸다.

[임신 중 성욕]

조심스럽게 엔터키를 치자마자, 눈앞에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가 쭈루룩 나타났다.

그녀는 조금씩 스크롤을 내리며 모니터를 예의 주시했고, 그러다 심상치 않은 제목을 하나 발견했다.

[[고민 상담] 임신하고부터 성욕이 너무 강해졌어요. ㅠㅠ]

출처는 ‘xxx 대표 임신, 출산, 육아 커뮤니티 <맘스터치>’.

그녀는 홀린 것처럼 그 글을 클릭했다.

[안녕하세요^^ 신입맘입니다. 고민이 있어서 글 올려 봐요..

다름이 아니고, 글 제목처럼 임신 중 성욕에 대한 고민입니다. ㅠㅠ

지금 중기인데요. 제가 원래는 성욕이 많은 편이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목석같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성욕이 주체가 안 됩니다. 남편만 보면 자꾸 만지고 싶고 관계도 하고 싶고.. 저도 제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입니다.

초기부터 지금까지는 계속 조심하느라 관계할 생각을 못 했는데, 이제 안정기도 되었으니 조금씩 시도해 봐도 될는지요? 그리고 관계를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하는 게 좋을지요?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너무 힘드네요... ㅠㅠ]

……왠지 모를 위화감. 길지 않은 글이라 쭉쭉 읽어 내려간 은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날 이후로 그 남자 입술만 보면 기분이 이상해지고, 몸이 닿을 때마다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아직은 욕구 불만도 아니고, 키스하는 꿈 정도는 일반인들도 한 번쯤 겪어 보는 일이 아닌가.

책상에 팔꿈치를 괸 그녀가 삐딱하게 귀 뒤를 긁었다.

어쨌든, 그 밑으로는 상당히 성의 있는 답변이 몇 개 달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성박사’라는 사람이 남긴 글은 유독 전문가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임신 중 성욕이 늘거나 줄어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태아가 안정기에 접어드는 중기부터는 성욕이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니 전혀 걱정하실 것 없고요. 만약 관계를 진행하실 거라면 산부인과 의사의 소견을 반드시 들어 보시고, 산모에게 적절한 체위를 공부하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그리고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면, 임신 중 적당한 부부 관계는 오히려 아이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답니다. 예전에 본 TV 프로그램에 의하면, 아이에게 기분 좋은 흔들림을 준다고 하더군요.]

……기분 좋은 흔들림?

말의 의미를 단박에 이해한 은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뭐, 뭐라는 거야.

“…….”

삽시간에 그녀의 머릿속은 몹쓸 상상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와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였던 어느 금요일 밤의 일은 어느 순간부터 잊혀 가고 있었다. 은수도, 현재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일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때는 정말 자신과 현재가 그러한 관계를 하기는 했었을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 일의 결과가 떡하니 뱃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도.

그도 그럴 것이, 키스를 한 순간까지는 또렷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마치 뒷 장면이 일부러 삭제된 비디오처럼 장면들이 짤막짤막하게 기억나기 때문이었다. 임신 사실을 고백하기 전까지 은수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열에 들떠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내던 그의 모습조차도 몇 개월 지나고 나니 겨우 어렴풋이 떠오를 정도였다.

남자는 그녀와 달리 상대적으로 술을 덜 마신 편이었으니 그 일을 기억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일이 떠오를지도.

솔직히 은수는 그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그날 밤 자신과 남자가 어땠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스킨십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면서부터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분명 콘돔을 사용했다면서 어떻게 했기에 임신까지 하게 된 건지, 그리고 그와 자신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몸을 섞었었는지……. 지금 와서 은수가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그와 다시 한 번 관계를 해 보는 것뿐이었다.

즉, 어쩔 수 없는 일. 아무리 궁금하다 한들, 어떻게 그 남자와 다시 한 번 그런 걸 할 수 있겠는가. 한데 그러면서도 또 몸은 이렇게 솔직하게 반응을 하고 있으니…… 무슨,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로봇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은 은수는 다시 한 번 댓글을 훑어보았다. 그러던 중, 낯이 익은 닉네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별이맘?”

복잡하기만 하던 그녀의 눈빛이 약간 흥미롭게 변했다.

우리 별이랑 태명이 똑같네. 저쪽은 아예 이름이 별이일까?

[별이맘 : 역시 성박사님이시네요. 좋은 말씀 잘 듣고 가요. 회원님들께 많은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0^]

[└ 성박사 : 별말씀을요. 남편분과 즐거운 성생활하시길 바랍니다. ^^]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와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인 듯싶었다. 나도 저렇게 속 시원히 해결될 문제면 좋았으련만. 그녀의 검지가 애꿎은 마우스 위를 톡톡 두드렸다.

가입한 카페가 아니었기에 정보를 열람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디 옆 등급으로 봤을 때 ‘별이맘’은 무려 운영자였다. 그래서 회원님들이니 뭐니 저러는 거구나. 생판 모르는 사람일 텐데, ‘별이’라는 공통점 때문일까. 이상하게 느낌이 낯설지가 않았다.

……뭐,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하아. 죽겠네, 진짜.”

다른 생각은 일절 나지 않았다. 머릿속을 맴도는 건 오로지 도현재에 대한 생각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은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생각이 많을 땐 역시 샤워를 하는 게 최고였다.

* * *

그러나 애석하게도, 샤워조차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지는 못했다.

머리를 감은 뒤 따뜻한 물을 맞으며 몸에 묻은 거품을 지워 내던 은수는 무심코 아래를 내려 보다 기겁했다.

“……헐.”

느끼지 못한 사이, 수챗구멍에 머리카락들이 마치 해조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가득 감겨 있었다. 웬 미역 줄기가 여기 있나 하고 놀랐을 정도로.

“…….”

뭐야…… 무섭게.

물을 끄고 얼른 몸을 굽힌 은수는 좀 더 가까이서 그것들을 확인했다.

원래 그녀는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는 타입이 아니었다. 꽤 긴 머리를 유지해 왔음에도 머리숱이나 머리 빠지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엄청난 자신이 있었는데. 임신을 한 뒤부터는 머리를 감거나 빗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엄청 빠진다 싶더니만, 급기야 이 지경에까지 이른 모양이었다.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겠지?”

뒤엉킨 머리카락 더미를 보고 있자니 겁부터 덜컥 났다. 사람에 따라 임신을 하면 머리가 더 빠지기도 하고, 안 빠지기도 한다는데……. 아마 그녀는 원래가 잘 안 빠지는 타입이다 보니 임신 후에는 오히려 많이 빠지는 케이스인 듯했다.

일단 머리카락들을 모아 휴지로 싸서 버린 뒤, 은수는 다시 샤워기를 집어 들며 거울을 보았다.

평소에는 옷에 가려 덜해 보였는데, 확실히 알몸으로 보니 배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거기다 이전보다 훨씬 커진 가슴과 짙어진 유두, 크기가 불어난 유륜 등이 눈에 쏙쏙 박혀 들어왔다. 이젠 정말 완벽하게 임신을 한 몸이 된 것이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갑작스레 깨닫게 된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게 낯설어 보였다.

서른두 살. 언뜻 들으면 많아 보이기도 하지만, 요즘 추세를 보았을 때 어리다 하면 어린 나이. 그 나이에 예상치 못하게 겪은 임신은 그녀로 하여금 난데없는 우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가뜩이나 자꾸만 현재가 좋아지고, 성욕이 예전보다 조금씩 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정작 제 모습은 예전만큼 예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 더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랄까……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결혼한 유부녀나 할 법한 생각을 하게 되는 내가 너무나도 싫다.

물기 어린 제 몸을 내려다보는 은수에게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잠시 생각을 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나 보다.

평소보다 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은수는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며 폰을 확인했다. 현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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