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62화 (62/128)

# 62

62. 이상 신호 (3)

코앞에서 새근새근 숨 쉬고 있는 현재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찼다. 무언가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 것처럼 숨이 막혔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순식간에 공황 상태에 빠져 버린 은수는 바짝 붙어 있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절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로 어정쩡하게 떠 있게 된 팔은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 어쩌지.

머리는 그가 깨는 한이 있더라도 이 팔을 풀어야 한다고 열심히 주장했지만, 몸은 그렇게 따라 주질 않았다. 은수의 손은 오히려 제 쪽으로 완전히 돌아 누운 그의 목덜미로 향하고 있었다. 뺨을 만지는 것도 아니고 목덜미를 아예 감싸는 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뺨과 목덜미 사이로 떨리는 손이 다가가 내려앉았다. 엄지손가락이 그의 귓바퀴를 부드럽게 쓸었다.

손바닥을 통해서 규칙적으로 뛰는 현재의 맥박이 느껴졌지만, 이미 그녀의 심장은 그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쁘게 뛰고 있었다.

“…….”

어떡하지, 정말…….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상황이 눈물겹게 좋아서, 억제하기 힘든 감정이 애꿎은 한숨으로 전이되었다. 이제는 스스로를 컨트롤하기도 어려워졌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순간이었다.

다행히 그는 곧 다시 몸을 뒤척이며 그녀를 품에서 놓아 주었지만, 은수는 그렇게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해야만 했다.

바로 그날 아침이었다. 은수가 현재의 스킨십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기 시작한 시점이.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으로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가는 길에 마트 좀 들렀다 갈까요?”

지금 네까짓 게 날 무시해? 하는 것처럼, 그날 이후로 현재가 손이라도 잡을라치면 마치 심장이 시위라도 하듯 쿵쾅쿵쾅거리고 있으니까. 두근거림이 쿵쾅거림으로 변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감정의 동요는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런 걸 보면 일시적인 현상은 아닌 듯한데…….

이대로 가다 보면 아무리 순진한 그라도 눈치를 챌 것이었다. 대체 어떡해야 하나. 어찌하면 예전처럼 자연스러워질 수 있을까, 하는 부질없는 고민만 계속되었다.

원인 제공자인 현재가 저를 힐끗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은수는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은수 씨?”

“…….”

“은수 씨.”

“……네, 네?”

늦게 따라붙는 대답에 그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대답을 하면서도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또 괜한 두근거림이 튀어나올까 봐 조바심이 일어서였다.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운전에 집중하기는커녕 자꾸만 그녀를 힐끔힐끔 보는 남자 때문에 은수는 정수리가 뜨끈뜨끈해짐을 느꼈다. 언제부터 이렇게 감각이 예민해진 건지.

“방금 나한테 무슨 말 했었어요? 미안해요. 잠깐 딴생각해서…….”

“아, 별건 아니고.”

씩 웃은 그는 턱 끝으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시간 괜찮으면 마트 좀 들렀다 가자고요. 며칠 전에 보니까 비축해 놓은 거 다 떨어졌던데.”

“……아…….”

은수의 미적지근한 반응이 영 이상했는지, 현재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배 많이 고파요? 저녁부터 먹을까요?”

“아, 아뇨. 배는 별로 안 고파요.”

“그래요? 그럼 마트부터 가도 되죠?”

“…….”

이 남자와 함께 장을 본다니,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또 얼마나 어색할까.

은수는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다급히 일으켰다.

“어, 저기, 나중에 나 혼자 가면 돼요.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으면요.”

“…….”

전방을 주시하던 그가 단칼에 그녀를 끊어 냈다.

“시간 날 때 가 둬야죠. 안 그럼 또 귀찮다고 아무것도 안 먹을 거잖아요.”

“…….”

“그리고 은수 씨가 그 많은 걸 어떻게 혼자 다 들고 간다고 그래요. 나라도 있어야지.”

그, 그건 물론 그렇지만…….

대충 넘어가지 않고 논리적으로 받아치는 그 때문에 할 말을 잃어버린 은수는 결국 입술을 꾹 다물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탓이었다.

은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현재는 곧바로 행선지를 틀었다.

“마트로 가요.”

“…….”

……예. 일개 팀장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런 와중에도 그의 잘생긴 옆모습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크나큰 문제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큰일이네…… 진짜.

* * *

“요즘 요리는 거의 안 해 먹죠.”

“……하려면 할 수는 있는데…….”

“힘들죠? 허리도 아프고.”

“……네.”

“음. 만날 사는 것만 사기도 그렇고, 뭐가 좋을까…….”

카트를 끌고 마트를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뭘 사야 할지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퍽 진지했다. 반면 은수는 그의 옆에 대충 붙어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은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나온 주부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도 커플이나 부부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제각각 다니면서 쇼핑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보통은 남자가 카트를 끌고 여자가 옆에서 팔짱을 낀 채 꼭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쳐다보는 은수의 눈빛이 착잡해졌다.

나와 이 남자도 저렇게 다정한 자세만 취한다면 영락없는 신혼부부쯤으로 보이겠지. 훤칠한 남편, 그리고 배가 남산만큼은 아니어도 동네 뒷산만큼은 부푼, 임신한 아내. 그 정도쯤이려나.

은수가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현재는 카트에 이미 이것저것을 담아 놓은 상태였다. 말없이 장보기에만 열중하던 현재가 문득 중얼거렸다.

“기분이 좀 이상하다.”

“뭐가요?”

“그냥, 은수 씨랑 이렇게 있으니까요.”

두부의 유통 기한을 확인하던 그가 지나가듯 대답했다.

“마트는 가끔 가다 엄마랑 같이 와 본 게 다거든요. 누군가랑 같이 장 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아…… 나도 마찬가진데.”

그런 사람이 선뜻 이렇게 함께 장을 봐 준다고 나섰다는 것, 그것은 확실히 저가 그에게 특별하단 의미 같아서, 은수는 또 한 번 쓸데없이 설레고 말았다. 고작 이런 게 뭐라고.

현재는 그런 은수를 눈치채지 못한 채 생필품 코너를 보고 있었다. 샴푸들을 살펴보면서 그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은수 씨랑 오니까, 엄마 따라가던 거랑은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좀 더 신경 쓰게 된다고 해야 하나.”

“……가끔 와 봤다는 거치고는 엄청 능숙해 보여요.”

“그래요? 전혀 아닌데.”

“진짜 그래요. 남자들 마트에서 장 보는 거 좀 많이 서툴러 보이던데, 현재 씬 별로 그렇지도 않고. 누가 보면 이렇게 여러 번 와 본 줄 알겠어요.”

“그럴 리가요.”

“…….”

“음, 근데 생각해 보니까 아쉽긴 하다.”

“……뭐가요?”

그가 은수를 향해 씩 웃었다. 그러더니 카트에 몸을 기대 힘껏 밀면서, 한 손으로는 은수의 오른쪽 어깨를 감싸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진작 자주 올걸. 이렇게 좋은데.”

남자의 몸과 밀착한 순간, 은수의 가슴은 또다시 거세게 곤두박질쳤다. 어깨가 불에 덴 듯 화끈화끈했다.

‘또! 또 이러네.’

그러나 이번엔 다행히도 무의식이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티 나지 않게 살짝 움찔했을 뿐.

그는 그녀의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싱글벙글한 얼굴로 쇼핑을 이어 나갔다.

“샴푸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아, 네. 집에 한 통 더 있어요.”

“치약은요.”

“어…… 치약은,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사는 김에 같이 사요. 칫솔도 여분으로 더 사 놓고.”

“……네.”

그는 은수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짚어 주며 나름 실속 있게 쇼핑을 했다. 물론 오래된 자취 생활 짬은 어디로 가지 않아서 나중엔 은수가 자연스레 선두에 서서 주도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대충 필요하다 싶은 것을 다 담고 나자, 그는 마트의 꽃이라는 시식 코너가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무심코 시식대 앞을 지나치던 현재는 고기가 지글거리는 불판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다가 은수에게 물었다.

“은수 씨, 불고기 좋아해요?”

“어…… 뭐, 있으면 먹는 정도……?”

“그럼, 저거 먹어 볼래요?”

현재가 가리킨 시식 코너에서는 간장으로 양념한 불고기를 판매 중이었다.

“……음…… 글쎄요.”

“맛있어 보이는데. 먹어 봐요, 같이.”

“살 거 아니면 안 먹는 게…….”

“이리 와요.”

“…….”

빼는 척했지만, 사실 그녀는 평소 불고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까부터 코 센서에 감지되었던 고기 냄새에 내심 기대하고 있던 은수는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앞서 가는 현재를 뒤따랐다.

시식 코너 앞에 선 현재가 녹색 이쑤시개를 집어 들었다. 잘린 채로 그릇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고기들 중 하나를 날름 찍어 은수의 앞으로 들이밀자 그녀의 눈이 자동적으로 커졌다.

“자요.”

“내, 내가 먹을게요. 현재 씨 먼저 먹어요.”

“빨리요.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눈을 돌려 보니 정말로 몇몇 사람들이 은수와 현재 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은수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기껏 준 걸 거부하면 이 남자 꼴이 우스워지겠지?

할 수 없이 그녀는 낯이 간지러운 걸 참고 현재가 준 불고기를 받아먹었다. 은수가 오물오물 씹는 걸 뿌듯하게 보고 나서야 현재는 같은 이쑤시개로 다른 한 점의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녀가 달콤하면서 짭짤한 불고기의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한창 고기를 볶아서 내놓고 있던 시식 코너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신혼이야?”

“……네?”

“신혼부부 아니에요? 임신한 거 같은데, 배가.”

“…….”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오해하는 상황이 생겨 버린 것이다.

역시 남 눈에는 그렇게 보였구나 싶어, 은수는 한껏 당황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맞다 하기도 그런데,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고…….

“……어…… 그, 그게…….”

그래도 어쨌든 질문에 대답은 해야겠기에, 그녀는 애써 당황한 마음을 감추며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네, 맞아요, 신혼부부.”

그 사이를 현재가 빠르게 비집고 들어왔다.

“……!”

뭐야, 이 빠른 대답은……?

현재의 인터셉트가 너무 재빨라서, 은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유, 배가 제법 나온 거 같은데, 몇 개월이야?”

“이제 6개월 다 되어 가요.”

“6개월? 아직 고생길이 훤하네. 어떻게, 한 봉지 줄까?”

“은수 씬 어때요. 맛있어요?”

“네?”

갑작스런 질문. 그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그럼 한 봉지 주세요.”

남자가 뭐라고 하는지는 알겠는데, 제가 무슨 대답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은수는 당황스런 눈으로 현재와, 현재의 주문에 신나서 봉지에 불고기를 담는 아주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빠른 손놀림의 아주머니는 눈 깜짝할 새 고기를 이중으로 포장해 현재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부러운 눈길로 말을 덧붙였다.

“신랑이 아주 멋있네. 인물도 좋고, 색시 챙길 줄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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