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61. 이상 신호 (2)
그날은 현재와 처음으로 함께 잠을 청한 날로부터 얼마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그날도 은수는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다만 그 꿈은 이전에 꾼 악몽들과는 매우 판이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보였다. 눈이 내린 것같이 하얀 모습이었지만, 또 그것들은 눈과는 느낌이 약간 달랐다. 눈이라기보다는 뭉게뭉게 피어오른 솜사탕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마저도 분위기가 너무나도 따뜻한 나머지 금방이라도 모두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은수는 그 속을 산책하듯이 걸어가고 있었다. 시작과 끝이 어딘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던 은수는 잠시 뒤 누군가가 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빠른 걸음도 아닌데 그것은 어째 단숨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사방이 온통 희뿌연 가운데, 어리둥절해 있던 은수는 제 앞으로 불쑥 내밀어진 남자의 손을 발견했다.
바짝 내밀어진 그것은 그곳의 배경만큼이나 하얬지만, 대신 선이 굵고 남자다웠다. 은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마치 공주가 왕자의 댄스 요청을 수락하듯 부드럽게 그 위로 손을 얹었다. 정체 모를 남자는 은수의 것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남자는 은수를 능숙하게 이끌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보니 솜사탕들 사이로 드문드문 햇빛 같은 것이 새어 들고 있었다. 남자를 따라 걷던 은수는 공기가 꽉 들어찬 풍선마냥 제 마음이 부유하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행복감이 은수를 사로잡았다. 이게 꿈이라면 결코 깨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그렇게 마냥 그를 따라 걸어갈 때였다.
걸어가던 남자가 별안간 멈춰 섰다. 은수는 남자가 자신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의 얼굴이 제 얼굴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어느 정도 가까워진다 싶더니, 천천히 은수의 얼굴 가까이로 더운 기운이 끼쳐 왔다. 그것은 남자의 달큰하고 따뜻한 숨결이었다.
온기를 담은 말캉한 입술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은수의 아랫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남자의 입술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문 듯 달콤하고 보드라웠다.
본래의 그녀라면 응당 거절을 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얼굴도 안 보이는 남자의 입맞춤에 은수는 저도 모르게 응하고 있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남자의 목덜미에다 팔을 두르기까지 했다.
가볍게 시작했던 키스는 이내 그 농도가 짙어졌고, 끝을 모를 만큼 이어지고 있었다. 은수는 정신없이 그 키스에 빠져들었다. 남자가 누군지는 결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누구이든 당장이라도 사랑에 빠져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키스였다.
얼마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은수는 감겨 있던 눈을 스르륵 떴다. 그런데 스위치를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안개 같은 장막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얼굴이 어느새 드러나 있었다.
멍하니, 잠시 이게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던 은수의 머릿속이 이내 탄산이 폭발하듯 펑 터졌다.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엄청난 사실.
방금 전 자신과 진한 키스를 나눈 남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도현재’였다는 것.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모든 것이 쪼그라들고 말았다.
“……!”
갑작스레 잠이 확 깨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까스로 눈을 뜨자 현재는 온 데 간 데 없었고, 보이는 거라곤 늘 그렇듯 오직 허연 천장뿐이었다. 몸이 젖은 솜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단번에 현실을 깨달은 은수는 허무해졌다. 역시 그건 꿈이었다. 그것도 그냥 꿈이 아니라, 민망하리만치 야릇했던 꿈.
시작은 완전히 순수했는데……. 어떻게 그런 결말과 주인공으로 끝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악몽을 꾸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지만, 어쩐지 깨고 난 뒤에 남는 찝찝한 느낌은 비슷한 듯했다. 물론 거기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뒤따른 것은 크게 다른 점이었지만.
꿈은 왜 그렇게나 생생했으며, 또 입맞춤은 왜 그리 부드럽고 달콤했던지. 그리고 마지막에야 드러났던 남자의 얼굴은 왜 하필 도현재였는지. 단지 꿈일 뿐인데도 아랫배 부근이 아릿했고, 얼굴에 열이 몰렸다.
급기야 은수는 ‘남자들이 몽정을 하면 이런 기분인 걸까?’라는 생각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현실로 돌아온 후인데도 그 감촉은 여전히 두려울 정도로 생생했다.
시각은 확인하지 않았지만 분명 알람이 울리기 전일 것이었다. 창문 너머의 바깥이 이제 막 새벽을 벗어나는 듯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으니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곱씹던 은수는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일찍 깬 김에 준비를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꿈은 꿈일 뿐, 이런 허상은 얼른 잊어버리는 편이 나으니까.
그렇게 다짐하고 나니 갑자기 요의가 느껴졌다. 임신 중기를 지나면서 부쩍 화장실에 가는 횟수가 늘어나 있었다. 자궁이 무거워지면서 방광이 압박되는 탓이었다.
안 되겠다. 이제 일어나야지.
생각을 마친 은수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억!”
그녀는 예기치 못한 반동으로 인해 도로 눕고 말았다.
은수는 그제야 제 목을 받치고 있는 팔과, 제 허리께를 감고 있는 것의 무게를 느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던 이유는 이상한 꿈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 맞다. 어젯밤도 현재 씨랑 같이 잤지.’
그날 이후로도 그는 은수가 걱정된다며 종종 외박을 자청하고 나섰다. 처음으로 함께 잤던 다음 날, 그녀가 그 덕분인지 신기하게도 잠을 푹 잘 수 있었다고 말한 것 때문이었다. 정말로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그렇게 입방정을 떨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후로 그는 됐다고 하는데도 번번이 함께 있어 주겠다고 했다. 혹여나 거절이라도 할 시엔 그러다 또 악몽을 꾸면 어떡하느냐며 지레 겁주기까지 하고.
실지로 그의 말마따나 덕분에 취침 시간이 한결 편해지긴 했지만, 악몽 대신 그런 꿈을 꿀 줄 알았으면…… 절대 현재와 함께 잠에 들지 않았을 텐데.
팔이 저리지도 않았을까. 그는 잠들 때와 똑같이 팔베개를 유지한 채 은수 쪽으로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분명 불편했을 텐데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은수는 제 허리께에 놓인 남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꿈에서 보았던 그의 손이 확실했다. 다시 돌이켜 봐도 정말 실제가 아닐까 헷갈릴 정도로 현실 같았던 꿈. 은수는 남자의 손을 조심히 들어 옆에 내려놓고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게 잠시 뒤, 옷자락에 찬 기운을 잔뜩 묻힌 채 돌아온 그녀는 혹시나 잠을 깨울까,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는 현재의 얼굴이 슬쩍 보였다.
……내가 방금 꿈에서 그쪽이랑 이러쿵저러쿵 했다는 걸,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겠지.
고개만 돌려 남자를 빠끔히 쳐다보던 은수는 불현듯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그러고는 마치 대단한 명작을 감상하듯 현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현재는 남자치고 피부가 하얀 편이었다. 아니, 색깔로만 따지면 사실 그렇게 하얗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곱상해서인지 유독 그렇게 보였다.
컴컴한 어둠 속에 달빛이 비추어 매끈한 그의 볼이 대리석처럼 반짝 빛났고, 그 위로는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가지런히 드리워져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광경임은 분명했다.
그렇게 잠깐 보고 그만두려 했는데, 그런데…….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 시원하게 뻗은 코와 그 아래로 이어진 도톰한 입술이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유 없이 돌연 벅찬 감정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그의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거기다 꿈에서 막 깬 터라 현실 구분이 잘 안 되는 것도 있었고.
은수가 깐 달걀처럼 매끈하고 보송해 보이는 그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댄 건, 그야말로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행동이 먼저, 알아챈 것은 그 다음이었다.
“……!”
헉. 어떡하지? 깨는 거 아냐?
그러나 은수의 걱정과 달리 현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보기보단 예민하지 않은 타입인가. 어쨌든 이미 일을 저질러 버린 상황에서, 그가 깨지 않은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닿을 듯 말 듯, 그녀의 손가락이 현재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가 손끝으로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전에도 남자의 얼굴을 만져 본 적은 꽤 있었지만, 현재의 얼굴을 만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촘촘하게 난 까만 눈썹도, 살짝 튀어나온 눈두덩도, 웃을 때면 환하게 벌어지는 예쁜 입술도. 그의 얼굴을 볼 때면 가끔씩 한 번쯤 만져 보고 싶다거나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길 용기는 없었으니까.
고로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회였다.
“…….”
그래, 아주 잠깐인데 뭐…….
마침내, 은수의 검지가 조심스럽게 그의 콧등을 쓸었다. 그러나 잠결에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금세 졸아서 손가락을 거두고 말았다. 다시 평온해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은수는 조용히 키득거렸다. 내가 지금 잠든 사람을 상대로 대체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그는 자신을 군대까지 다녀온 사나이라고 했지만, 잠자는 모습은 스물일곱이나 먹은 남자답지 못했다. 평소엔 짙은 눈썹 때문인지 나름 인상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잠든 모습은 영락없이 덜 자란 소년이었다. 귀엽기도 하고, 좀 사랑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걸렸다. 그의 자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생각보다 즐거웠다.
문득, 이 남자와 결혼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그 여자는 그의 이런 모습을 매일매일 볼 수 있겠지, 하는 생각까지도. 그러고 나니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누군가는 그 감정을 ‘질투’라고 말할 것이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다시 들어 그의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보기엔 촉촉할 것만 같더니 생각보다 까슬한 촉감이 느껴졌다.
“…….”
느낌이 이상해서였을까. 그가 뒤척이며 잠에 취한 듯한 신음을 뱉어 냈고, 그것이 그녀의 손가락을 통해 온기로 전해졌다. 그 소리가 꼭 금방이라도 깨어날 것만 같은 소리로 들려서, 은수는 얼른 똑바로 누우려고 했다. 그런데…….
“……헉!”
잠꼬대인지 뭔지, 그가 몸을 돌리려던 은수의 허리를 꼭 붙든 채 제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거기다 그 여파로,
“…….”
두 사람의 입술은 조금만 움찔하면 닿을 듯이 가까워져 있었다.
오 마이 갓. 이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