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60. 이상 신호 (1)
주륵, 차가운 액체가 배 위를 타고 흐른다.
이 느낌은 항상 유쾌하지가 않았다. 가뜩이나 이제 막 산봉우리처럼 솟아오르고 있는 배도 익숙하지 않아 죽겠는데, 그 위를 둥글리고 있는 기계의 감촉 또한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검정색 바탕에 흰색 점들이 무수히 찍혀 있는 모니터를 보며, 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초음파 검사는 언제 하든 불편했지만, 오늘은 저 흰자 가득한 커다란 눈까지 보고 있다 생각하니 더 긴장되었다.
저 남자 앞에서 이렇게 배를 까놓고 있어야 한다니. 같이 가겠다고 약속은 했었지만, 지금은 그 약속을 매우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꼭 다문 그녀의 입술 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은수가 신경 쓰는 것과는 다르게, 남자의 눈은 그녀의 배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모니터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입술이 슬쩍 벌어져 있는 게 꼭 신기한 장난감을 마주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렇게 신기할까. 하기야, 나도 처음엔 신기하긴 했지. 처음에는 너무 쪼그매서 도대체 어느 게 별이인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남자를 힐끗 쳐다본 은수가 훌렁 까져 있는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여기 있네요.”
의사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다리가 제법 길어졌어요. 이제 거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얘가 이렇게 커지니까 이제 슬슬 위와 장이 눌리기 시작하고, 그래서 속이 답답해지는 거예요.”
역시, 최근 들어 은수가 부쩍 위장 장애를 많이 호소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현재는 학구적인 자세로 의사의 한마디 한마디를 경청했다. 잘 모르는 분야일수록 더더욱 공부해야 성미가 풀리는 그의 성격은 예외가 없었다. 거기다가 지금 이 공부는 사실 자신보다는 은수를 위한 것이니만큼 그 중요성이 너무나도 컸다.
“여기가 머리예요. 주수에 맞게 잘 크고 있고…… 다리는 조금 더 빨리 자란 편이에요. 다 정상이네요.”
꼬물꼬물 움직이는 태아의 모습이 모니터를 통해 중계되고, 그걸 감상하는 은수와 현재의 입술은 짠 것처럼 나란히 벌어졌다.
아기를 사진으로 익히 많이 보기는 했지만 움직이는 걸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현재는 그 경이로움을 이제야 느낀 듯 새삼 감동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 은수는 상대적으로 많이 본 광경이라 약간 덤덤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기의 모습이 그저 놀라울 뿐이라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한 달에 한 번 받는 검사 때마다 별이는 몰라볼 정도로 크고 있었다.
그래 봐야 달라질 게 없는데도 현재는 아기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얼굴을 모니터에 더욱 가까이 들이밀며 중얼거렸다.
“……신기하다, 진짜.”
배에다 대고 이것저것 대화를 시도하면 늘 자그맣게 진동하며 응답하는 듯했던 별이가, 지금은 눈앞에서 바닷속을 유영하듯 꼬물거리고 있었다. 아직 손에 쥘 수도 없는 아기의 존재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현재의 눈길이 절로 애틋해졌다.
별이가 공주 드레스를 입고 아장아장 걸으면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쁠까. 벌써부터 상상만 해도 즐거운 현재였다. 물론 별이가 딸이라고 판정이 난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난번 은수에게서 들은 바로는 이번에 오면 성별을 알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작 의사는 다른 것만 설명할 뿐, 성별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었다. 자잘한 의사의 설명들을 듣고 있던 현재가 조바심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선생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예?”
“……우리 별이, 딸인가요?”
그런데 의사는 웬일인지 놀란 얼굴이었다.
“어? 내가 지난번에 얘기 안 했어요?”
자기가 다음에 말해 준다 해 놓고 자기가 까먹냐. 하긴, 이 병원을 찾는 산모만 몇 명인데. 그럴 만은 하네.
의사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은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아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 의사가 말꼬리에 뜻 모를 웃음소리를 남겼다. 그는 다시 한 번 모니터를 가리켰다.
“여기 보세요.”
“……그게 뭐예요?”
희끄무레한 모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가 없어서, 현재와 은수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알 만하다는 듯 의사가 웃으며 재차 말했다.
“뭐가 달려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뭐가 달려요? ……아!”
그제야 의사가 말한 의미를 파악한 은수와 현재는 서로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게…… 그러니까 그…….
은수와 현재를 번갈아 보던 의사가 웃음기 띤 얼굴로 물었다.
“이제 알겠어요?”
난 저게 또 그거……인 줄은 몰랐네.
비록 상상이었기는 했지만 현재는 아들인 별이에게 제멋대로 공주 드레스를 입혀 버린 스스로가 왠지 민망했다.
“……네.”
“공주님이 아니어서 어떡하나. 아버지가 서운한 것 같네.”
“……아, 아닙니다. 딸이든 아들이든 똑같이 소중한데요.”
말만 그렇게 하면 뭐 해. 표정은 안 그러면서.
티를 내진 않았어도 꽤 딸을 기대했구나 싶어, 은수는 급격히 현재가 안쓰러워졌다. 어차피 딸이든 아들이든 현재라면 성별에 관계없이 바보라도 된 것처럼 아낌없이 사랑해 줄 테지만, 그럼에도 왠지 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은수조차도 조금 아쉬웠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진료가 끝나자 현재는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고 있었다. 병원을 빠져나오며 은수는 넌지시 현재를 떠보았다.
“별이가 아들이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그러게요.”
“실망스럽지 않아요?”
“전혀요.”
“에이…….”
표정은 아니던데.
은수가 덧붙이는 말에 현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를 돌아보는 현재의 얼굴엔 생각이 많은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많이 실망한 것같이 보였어요?”
“……조금요?”
“…….”
은수의 대답에 그는 곤란하다는 듯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고, 그녀는 그것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현재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별이 보는 앞에서 그랬으면 안 되는데.”
“네?”
“안 그런 것 같아도 다 보이고 다 들렸을 텐데, 걱정돼서요.”
……난 또 뭐라고.
허, 하는 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하지만 보이지도 않는 아기에게 지레 미안해하는 저런 태도가 참 예쁘고, 또 어딘지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수는 픽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차피 아무것도 몰라요, 얜.”
“왜 몰라요.”
“얜 지금 아빠고 뭐고 헤엄치느라 정신없는데요, 뭐.”
그렇잖아도 요새는 힘이 좋아졌는지 꿀렁거리는 횟수가 늘어 가고 있었다. 은수의 우스갯소리에 살짝 미소 지은 현재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근데 은수 씨가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뭘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까는…… 계속 딸이 아닐까 기대를 해 와서 그런지, 조금 놀라긴 했는데요.”
“조금……이요?”
그렇게 딱 잘라 물어볼 것까지 있나. 그가 민망한 듯 대꾸했다.
“아니요. 실은 좀 많이.”
“……하여튼 진짜 거짓말 못해.”
코가 길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남자는 참 빈말도, 거짓말도 잘하지 못했다. 아마도 천성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행여 거짓말을 한다 하더라도 얼굴에서 다 티가 나 버려서, 거짓말을 하는 의미 자체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부분들 하나하나마저 어쩜 그리 도현재스러운지.
픽 웃음을 터뜨리는 은수를 향해, 명불허전 도현재는 여전히 미소도 짓지 않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난 별이가 왕자님이어도 소중해요. 그러니까 혹시 실망한 거 아닌가, 그렇게 오해하지는 말라고요.”
“어유, 알았어요. 내가 현재 씨 성격을 모르나.”
하여튼 별걱정을 사서 하는 타입이야.
“그럼 다행이고요.”
그제야 좀 안심이 되는 듯 미소를 지은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우리 별이, 귀 막아.”
그러면서 그는 정말로 귀를 틀어막아 주듯이 은수의 배에 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탁!
“……!”
잔뜩 당황한 은수의 손이 그의 손을 매섭게 쳐 내었다.
예상치 못한 불시의 일격에 당황한 것은 현재뿐만이 아니었다. 은수 스스로조차 자신의 행동에 놀라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손을 쳐 낸 자세 그대로 얼어 있던 은수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현재의 눈치를 살피고는, 애써 자세를 바로 하며 머리를 빗어 냈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입술을 움직였다.
“……미, 미안해요.”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는데, 많이 놀랐을까.
“……갑자기 그래서 놀란 거예요?”
“어…….”
그녀가 잠시 입술을 감쳐물었다.
“놀랐다기보다…… 방금 검사하고 나와서 그런지, 좀 예민해서…… 그랬나 봐요.”
“아…….”
다행히도 현재는 처참히 바람맞은 제 손을 슥 한번 쳐다보곤 대수롭지 않게 씩 웃었다.
“미안해요. 장난이었는데.”
“……현재 씨가 왜……. 아니에요.”
그러면서 곤란하다는 듯이 손가락을 모아 만지작거리는 은수를, 현재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손을 쳐 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은수의 심리 상태가 어쩐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쯤은 그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은수가 더 이상 민망해하지 않도록 이 상황을 잘라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얼른 가요. 배고프죠?”
“……네.”
“차 빼 올 테니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릴래요? 금방 올게요.”
“네, 갔다 와요.”
주차장으로 향하는 현재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은수는 내내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폭 한숨을 쉬었다. 아, 이제 살겠네.
‘거기서 그렇게 반응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은수는 제 무의식에 화가 나서 애꿎은 땅을 한번 걷어찼다. 혹시나 방금 전의 제 행동 때문에 그가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그렇게 걱정은 되면서도, 그의 스킨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요즘은 그가 제 몸에 손을 댈 때면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걸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으니까. 만약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제가 어떤 반응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스스로조차 무서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
……이게 다 그날 때문이야. 메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은수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건, 그는 아마도 전혀 모르고 있을 바로 그날부터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