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59. 기대고 싶어져 (4)
“오렌지, 갈아 줄까요? 주스가 먹기엔 더 편하죠?”
“…….”
이 남자는 무슨 오자마자 주스를 만들겠다고…….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녜요. 새벽에 번거롭게…….”
그의 입술이 심각한 듯 일자로 다물렸다.
“은수 씨 갑자기 며칠 전부터 계속 밥도 안 먹고 그런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아요? 안 그래도 무슨 일인가 했었는데.”
“…….”
“갈아 줄 테니까 먹고 자요. 그러다가 속 버려요.”
물론 요 며칠 꿈자리가 사나워서 잘 못 먹은 건 맞지만, 고작 며칠 그런 것일 뿐 여전히 잘 먹는 건 마찬가진데…….
남자의 태도가 너무나 강경해 보여서 뭐라 변명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럼,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아침에 먹을게요. 지금 말고.”
“……그럴래요?”
“네.”
절충안이 나름 먹힌 모양이었다.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아침에 시간 별로 없으니까 미리 갈아 놔야겠다.”
“……아니, 그럴 필요까진…….”
“주방 좀 써도 되죠?”
그건 통보였지, 허락을 묻는 말이 아니었다.
제 집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에게 은수가 대뜸 말했다.
“술은 구경도 못 하고 여기서 오렌지나 갈고 있으니까…… 싫겠어요.”
그는 어느새 오렌지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은수의 말에 피식 웃은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싫긴요. 내가 자처한 건데.”
“…….”
“말했죠. 난 아빠로서의 책임을 다할 거라고. 은수 씨와 우리 아기를 위해서 하는 일이잖아요. 근데 뭐가 싫어요.”
“……진지하긴.”
일순 할 말이 없어진 은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은수는 그가 오렌지를 깨끗이 손질하고 믹서에 넣고 가는 과정까지를 찬찬히 지켜보았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부엌에 서 있는 남자는 생각보다 제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러웠다.
꽤 많은 양의 주스를 뚝딱뚝딱 만들어 병에 넣어 놓은 그는 금세 은수에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소파가 아닌, 소파 앞에 깔아 놓은 러그 위로 털썩 앉았다.
“어, 왜 거기 앉아요. 여기 앉지.”
은수가 당황해서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자 그가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할 게 있어서요.”
“……뭘……?”
“아기랑 대화하기.”
“……네에?”
자세를 편하게 고치며, 그녀의 배에다 대고 의사소통을 준비 중인 현재를 본 은수는 경악했다.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그녀의 반응에도 현재는 천연덕스러웠다.
“저번에 태동 듣고 확신이 섰어요. 이제 때가 된 것 같다고.”
“…….”
“남자 목소리는 음파가 낮아서 여자 목소리보다 더 잘 들린대요. 아직 좀 이를 수도 있기는 한데, 얼른 해 보고 싶어요.”
“……나도 책에서 보긴 했는데,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요?”
“인터넷이요.”
그럼 그렇지. 항상 아주 당연하게, 인터넷이 만물의 보고라도 되는 양 대답하는 남자의 말에 은수는 살풋 웃었다.
어쨌든 그는 아직까지도 틈틈이 육아 지식을 공부하는 모양이었다. 은수는 여러 가지 일이 겹쳐 최근엔 공부에 다소 소홀했던 자신을 새삼 반성하게 되었다.
은수가 반성하거나 말거나, 그는 “아, 아.” 하며 목소리를 잠깐 고르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아기를 불렀다.
“아기야.”
“…….”
남자의 따뜻한 숨결과 함께 듣기 좋은 중저음성이 배에 닿았다. 그러나 그는 영 석연찮은 얼굴이었다.
“이거 뭔가 좀…… 느낌이 안 난다.”
“왜요?”
“뭔가…… 친밀함이 덜한 것 같지 않아요?”
“……그런가?”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조금 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은수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우리, 태명 지어요.”
“태명……이요?”
“아기들한테 다들 그런 거 지어 주잖아요. 애칭같이.”
“아…….”
그러고 보니 항상 ‘아기’, ‘아이’라고만 불러 왔지, 이름 비슷한 것으로 불러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제야 은수는 제 배를 내려다보며 아이에게 어떤 이름이 어울릴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음…….”
그도 고민을 시작했는데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지, 미간에 잔뜩 주름이 졌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은수는 갑자기 그가 꿨다는 태몽 생각이 났다.
“……별이.”
“네?”
“별. 태명으로 별, 어때요?”
“별?”
“현재 씨가 태몽에서 별을 품에 안았다면서요. 그러니까, 별.”
“별이…… 별이…….”
잠시 소리 내어 불러 보던 그는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오, 예쁘다, 별이.”
“맘에 들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반짝 빛날 아이의 태명으로 딱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약간 중성적인 느낌이라 아들이든 딸이든 둘 다 어울릴 것 같고.”
“그럼, 이제부터 그렇게 정하는 거예요?”
“네, 그렇게 하죠 뭐. 지금부터 ‘별’이에요, 우리 아기.”
흡족하게 웃은 현재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아기를 다시 불렀다.
“별아, 아빠야.”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배를 간질였다.
“오늘도 잘 있었지? 엄마 너무 괴롭히지 말고 얌전히 있어.”
“…….”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그때그때 말 좀 하고, 인마. 그래야 아빠가 사다 주지.”
화답이라도 하듯이 배가 둥둥 하고 작게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현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은수는 태아 주제에 아빠를 알아보기라도 하는 건가 싶어 웃음이 났다.
그렇게 아기와 대화를 하던 그가 갑자기 막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근데 오늘 나 왜 부른 거예요?”
그것 땜에 왔으면서 참 일찍도 물어본다…….
그러나 은수는 타박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요 며칠 동안 자꾸 안 좋은 꿈을 꿔서……. 실은 오늘도 한 번 꿨어요. 그러고 나니까 혼자 자기가…… 무섭더라구요.”
“그랬어요?”
“네. 그래서, 누가 옆에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 해서…….”
“근데, 생각을 했는데…… 생각나는 사람이…….” 하면서 대충 말을 얼버무리자 그가 알겠다는 듯 씩 웃었다.
“아아.”
“…….”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이거죠?”
“……아니, 뭐.”
그게 그렇게 되나……?
자신의 눈길을 피하는 은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현재가 싱긋 웃었다.
“그래도 나, 아예 희망이 없진 않은 것 같은데.”
“…….”
“아니에요?”
희망은 무슨. 그녀는 저를 끈덕지게 바라보는 남자의 눈길을 애써 회피했다.
화제를 돌려야 해. 하지만 그것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할 말이 도통 생각이 나지 않자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켰다.
“버, 벌써 세 시네요.”
“어…… 그러게요.”
“…….”
“빨리 재워야겠다.”
그제야 남자는 몸을 일으키더니 안방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은수 씨.” 하고 예의 그 말투로 그녀를 불러 왔다.
“네?”
“조금이라도 자야죠. 이리 와요.”
“……네?”
“무섭다면서요. 내가 안 무섭게 해 줄게요.”
안방으로 먼저 들어가는 행동이 거침없었다.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 앉은 그가 제 왼쪽을 탁탁 쳤다. 얼른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은수가 잠시 주저하는 듯하자 현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왜요? 나 여기서 자지 말까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같이 자는 건 좀 민망해서 그렇죠. 은수가 속으로 말을 끝맺었다.
애초에 그에게 연락을 한 건, 같은 침대에서 자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이 공간 안에 그가 함께 있어 주면 덜 무서울 것 같아서였는데, 생각해 보니 손님을 바닥에 재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임신을 한 제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한다면 현재는 스스로 바닥을 선택할 게 분명했고.
……어쩔 수 없네.
은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쭈뼛쭈뼛 침대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눈길을 외면한 채 가만히 그 앞에 섰다. 현재가 푸스스 웃었다.
“설마 그러고 잘 건 아니죠?”
“…….”
은수가 차마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고 있을 때, 현재가 그런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앉혔다. 그리고 그는 마치 은수에게 보란 듯이 먼저 벌렁 누웠다.
살짝 눈을 뜬 그가 은수의 등 뒤로 왼팔을 내려놓고 눈짓했다.
“내 팔 비싸요.”
“…….”
“빨리 안 누우면 후회할 텐데.”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누워 주면 민망하겠지…….
은수는 마지못해 느릿느릿 그의 팔을 베고 정자세로 누웠다. 그러자 그가 은수의 어깨를 감싸 안아 제 쪽을 보게 했다.
얼굴 전체를 그의 따스한 눈빛이 감싸는 느낌이었다. 은수는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눈가가 뜨거웠다.
“오늘도 맨 얼굴이네요.”
“그럼 잘 시간인데, 당연하죠.”
“확실히 민낯이 더 예뻐요.”
“……거짓말.”
“진짜예요. 순수해 보여서 좋아요.”
현재의 손가락이 매끄러워 보이는 그녀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은수는 피부로 와 닿는 그의 손길에 당황했지만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다 현재가 불쑥 은수를 향해 물어 왔다.
“은수 씨.”
“네?”
“아직도…… 결혼이 싫어요?”
약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은수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젠 알잖아요. 세상에 그런 결혼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잘 모르겠어요, 난.”
“32년이나 살았는데, 아직도 모르겠어요?”
“……나이를 헛먹었나 봐요.”
그 말에 현재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난 절대 바람 안 피우고 민은수만 바라볼 자신 있는데. 그래도 안 돼요?”
그렇게 안 할 거라고 하는데도. 도대체 이 남자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인 걸까.
은수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안 돼요.”
“왜요.”
“얼굴값 할 것 같아요.”
“뭐라고요?”
하여튼 은수 씨는 진짜 엉뚱하다니까.
웃음을 터뜨린 현재가 은수의 얼굴을 양손으로 쥐었다가 놓으며 다시 팔베개를 해 주었다. 그러고는 은수의 머리를 제 품 속으로 완전히 끌어당겨 안았다.
“자요, 이제. 진짜 재워 줄게요.”
남자의 조금 빠른 듯한 심장 박동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안 그런 척하지만 그 또한 이 상황이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그의 품에서는 포근한 향기가 났다. 그에게서 늘 맡을 수 있었던 그 냄새. 그의 체구는 단단한 편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은수는 그의 품이 마치 구름 속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밀려 있던 잠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잠이 안 올 땐 숨을 쉬었다가, 참았다가, 그러면 좋아요. 그렇게 계속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들더라고요.”
한 옥타브 낮은 피아노 소리 같은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천천히 울렸다.
잠시 뒤, 이마에 닿는 그의 숨결과 ‘톡, 톡’ 주기적으로 어깨와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은수는 그만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은수 씨.”
“…….”
“……은수 씨, 자요?”
그가 살짝 고개를 뒤로 빼어 은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거의 미동도 없었다.
“…….”
“…….”
“…….”
“……자는구나.”
생각보다 일찍 잠들었네.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꿈속을 맴도는 양 몽롱하게 들려왔다.
“잘 자요.”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멎었을 때,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 무색해지도록, 은수는 거짓말처럼 깊은 잠에 푹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