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 기대고 싶어져 (3)
사방이 깜깜했다. 그리고 고요했다.
은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눈을 빛내며 앉아 있었다.
아마도 병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제가 있는 이곳은 너무나도 검고 어두워서, 순백색이 대다수인 병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그런데도 병원이라 생각되는 이유는 어쩐지 병원 특유의 알싸한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아서였다.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지?’
호기심 반, 무서움 반으로 두리번거리던 은수의 눈앞에 순간 저 멀리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키가 크고 어딘가 음침한 듯한 남자. 아니, 남자라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사람인지, 아님 다른 어떤 것인지 모를 그것은 온통 까만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누군가는 천천히 은수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섰다.
“……누, 누구세요?”
분명 가까이 있는데도, 안개라도 낀 것처럼 시야가 그저 흐릿하게만 보였다. 다만 확실히 알겠는 건,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갑게 씩 웃고 있는 입술이었다.
“같이 가시죠.”
“……어디를요?”
“…….”
남자가 은수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확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가시죠.”
다짜고짜 뭐지, 이 상황은? 가슴이 불안정하게 쿵쾅쿵쾅 뛰어 댔다.
“아니, 대체 어디를요?!”
물어봤자 속수무책이었다. 남자의 힘이 생각보다 더욱 거세었기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손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아귀 힘.
정체 모를 괴한은 어느새 가공할 속도로 은수를 끌고 가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가시가 목에 탁 걸린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그녀의 알량한 힘으로 남자를 제지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에 필사적으로 그 손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은 이미 그녀의 손에 거머리처럼 끈덕지게 붙어 있어서 도저히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시도하면 시도할수록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늪 같았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구!!!!!!”
“…….”
“안 들려? 이거 놓으란 말이야!”
그때, 뱃속에 있는 아기가 힘껏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머지 한 손으로 배를 간신히 감싸 안은 은수는 악에 받쳐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댔다. 아랫도리로는 뭔가 축축한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 왔다. 잠깐, 이건…….
“헉…….”
그녀의 치맛자락에 선홍빛 피가 번졌다. 이건 분명…… 하혈을 의미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안 돼…….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는 그 피를 보자마자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은수는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헌데 그녀가 주저앉자마자, 잔뜩 부풀어 있던 배가 조금씩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별안간 밑으로 뭔가가 쑥 빠져나간 느낌. 불러 있던 배가 갑자기 허해졌다.
온갖 힘이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헉!”
눈을 뜬 은수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깜깜한 것은 방금 전과 같았지만, 어슴푸레한 달빛이 침대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켜 냈다.
“…….”
꿈이구나.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은수는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자신의 집 그대로였다. 그제야 안심이 된 은수는 후, 하고 숨을 내뿜었다.
벌써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악몽이었다. 꿈의 내용은 매번 달랐지만 공포감은 항상 같았다. 심지어 어제는 열댓 명을 살인하는 꿈까지 꿨었다. 영화 같은 것들로 체험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서움. 분명히 정상은 아니었다.
이게 임신한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겪는 일인지 궁금했던 은수는 급기야 인터넷으로 검색까지 해 보았다. 다행히도 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꾸만 나쁜 꿈이 연속되는 게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시각은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칼퇴근을 하자마자 집에 와서 잠에 들었으니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채 깨어난 것이다. 점점 신경이 쇠약해지는 기분이었다.
“기가 허해졌나…….”
생전 그 흔한 가위 한번 눌려 본 적 없고, 이런 악몽조차도 꿔 본 적이 없었는데.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 먹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에서 깨고 나니 목이 탔다. 느릿느릿 이부자리에서 나온 은수는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 한 잔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려다, 아기를 생각해 천천히 조금씩 들이켰다. 그나마 속이 좀 풀렸다.
물을 마신 은수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조금 잔 덕분인지 정신이 약간 맑아진 것 같긴 한데, 다시 잠자기는 무서웠다. 또 잠이 들었다가 그런 무시무시한 꿈을 꾼다면…….
“……으으.”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렇게 악몽을 꾸는 게 아기에게 좋을 리도 없는데.
어떡하지…….
고민하던 은수의 머릿속에 불현듯 현재가 떠올랐다.
“…….”
그래, 그 사람이 옆에 있어 준다면……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될 것 같은데.
옆에 있던 휴대폰을 덥석 집어 들기는 했지만, 막상 밝은 빛이 쏟아지는 액정을 보자 그녀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양심 없이 매번 이 밤중에 사람을 오라 가라 해? 차라리 저번처럼 먹고 싶은 게 있다는 핑계라면 부르기라도 쉬울 텐데. 고작 혼자 잠들기가 무서워서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어떻게 말을 하냐고.
또…… 이게 남편 노릇이 아니면 뭐야.
“……아냐.”
이건 아냐. 염치없는 짓이라고. 그냥 자 보자…….
마음을 고쳐먹은 은수는 얇은 이불을 턱 끝까지 휙 끌어당겨 덮었다. 그러곤 까맣게 물든 천장을 황망히 한번 올려다본 뒤 그대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양을 세었다. 양은 생각을 할 때마다 한 마리씩 울타리에 들어찼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그리고 도현재…….
“아.”
……뭐야.
여기서 뜬금없이 도현재가 왜 튀어나와.
아직 정신이 제대로이지 못한 게 틀림없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든 은수는 다시 양 세기를 시작했다.
다시.
양 다섯 마리, 양 여섯 마리, 양 일곱 마리…… 여덟…… 마리…….
도현재.
“……아, 진짜.”
왜 자꾸 도현재야!
얌전히 양을 세다가도, 난데없이 자꾸 튀어나오는 남자의 얼굴 때문에 짜증이 솟구쳤다. 아마도 잠재되어 있던 무의식이 자꾸만 그를 찾는 것이 분명했다.
망할.
결국 은수는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다시 손에 들었다. 어둠에 적응된 탓에 휴대폰의 밝기가 무척 눈부셨다.
그녀는 재빠르게 전화번호부에서 ‘도현재 씨’라는 이름을 찾았다. 그러고는 통화 버튼 위로 엄지를 올렸다.
이제 누르기만 하면 되는데…….
에잇. 눈을 질끈 감고 액정을 터치한 은수는 얼른 폰을 제 귀에 가져다 대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어딘지 모르게 현재스러운 기본 통화음이 들려왔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여보세요?]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은수 씨? 웬일이에요.]
밤이라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는 낮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은수는 괜히 몸을 비비 꼬았다.
“아, 저기…….”
[무슨 일 있어요?]
전화를 꼭 용건이 있어야만 하나. 물론 지금은 용건이 있어서 한 거긴 하지만…….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뇨.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구…….”
아, 어떡해!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더 민망해져서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은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건 아니고, 저기…….”
[네.]
“지금…… 와 줄 수 있어요?”
[……네?]
조금 놀란 듯한 그의 목소리가 뒤늦게 들려왔다. 갑자기 이러는 게 이상하긴 하겠지. 하지만 이미 저지르고 만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엔.
은수는 방금 전보단 조금 더 힘 있게 말을 이었다.
“좀 무리한 부탁인 건 아는데요……. 내일 출근도 해야 되고, 그런 건 아는데…….”
[…….]
“안…… 되겠죠?”
은수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아, 이렇게 말하면 올 사람도 안 올 것 같은데.
그때완 달리 시간이 원체 늦었다 보니 그녀도 그가 정말로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혹시, 정말 혹시 모르니까.
은수는 잠자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도 모르게 이불을 세게 쥐었다.
[……은수 씨 지금 집이에요?]
“……네.”
잠시 생각하는 듯 [음…….]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갈게요.]
역시나 너무나도 쉬운 승낙.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정말요? 너무 늦지 않았어요?”
얼떨떨한 그녀가 눈을 끔뻑거렸다.
[네. 한 30분 뒤면 도착할 것 같으니까 기다려요.]
“……네. 끊어요.”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은수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도 잠시 동안 가만히 있었다.
가만있어 보자. 이 남자가 집에 온다. 30분 뒤에.
30분…….
“30분?”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순간적으로 그의 집이 이곳에서 멀지 않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완전 난장판인데!
“……아이씨!”
얼른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본 은수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연장처럼 양손에 든 채 집 안을 샅샅이 청소하기 시작했다.
* * *
매사에 정확한 남자는 정말 칼같이 30분 뒤에 도착했다.
아오, 식겁했네.
이제 막 청소를 끝마치고 한숨을 돌리던 은수는 뒤늦게 여유로운 척을 하며 현재를 맞았다.
“뭐예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는 뭔가를 봉지에 한 아름 들고 온 채였다.
“오렌지예요. 신 거 찾았었잖아요. 집에 많아서 좀 가져와 봤어요.”
식탁 위에 오렌지를 하나씩 올려놓는 손길이 섬세했다. 캐주얼 차림에 전혀 꾸밈없는 머리.
확실히 생머리가 더 낫단 말이야. 은수는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오렌지를 다 꺼내 놓은 그는 이제 은수가 애써 치워 놓은 집 안을 대충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전부터 의문이던 것이 하나 떠올랐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가면 어머님이 뭐라고 안 하세요?”
분명히 뭐라고 하실 것 같은데. 만약 우리 엄마였다면 내 등짝은 벌써 너덜너덜해졌을 테고.
살짝 깜빡거리는 듯한 형광등을 바라보던 현재가 “내놓은 자식인가…….” 하고 중얼거리는 은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내 나이가 몇인데요. 이유만 말씀드리면 상관없어요.”
“……그래서 오늘, 뭐 때문에 나간다고 했는데요?”
“친구들하고 술 마신다고요.”
“……내일 출근은 어떡하게요.”
“나올 때 옷도 들고 왔어요. 차에 놔뒀으니까 걱정 마요.”
그래도 여러 번 와 봤다고, 행동이 자연스러운 게 거의 집주인급이었다. 그녀가 깜빡하고 못 치워서 너저분한 소파 위를 아주 자연스럽게 정리한 그는 다시금 오렌지에 시선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