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57화 (57/128)

# 57

57. 기대고 싶어져 (2)

“아오, 재수 옴 붙었네.”

사실 환승역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냥 그 망할 노인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빨리 내린 것뿐이지.

덕분에 은수는 한 시간 정도나 더 걸린 후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는 길이 거의 구만리라고 느껴질 만큼 길었다.

“하아…….”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피로감이 온몸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인간 하나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나마 속 시원히 되갚아 준 건 다행이었지만, 이미 잡쳐 버린 기분을 되돌려 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하철 타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기분이 참 좋았었는데.

“…….”

보고 싶다, 그 남자가.

이제는 부정하기도 지칠 지경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정말로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만약 그가 옆에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을 텐데.

문득 현재를 생각하던 그녀는 옆에 내팽개쳐 놓았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홀드를 풀자 그에게서 왔던 것 같은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이 남자가 언제 전화했었지.

“어, 얼마 안 됐네.”

수신 시각이 고작 몇 분 전이었다. 이제 쉬는 시간인 건가.

그의 연락을 확인한 순간, 은수는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딸깍.

“……여보세요?”

[어, 은수 씨. 집엔 잘 도착했어요?]

그의 밝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은수는 어쩐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은수 씨? 은수 씨?]

“네, 네. 듣고 있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목소리가 안 좋은데.]

……이 남자는 진짜 귀신인가. 아니면 여기 CCTV라도 붙이고 간 건가.

놀라울 정도로 제 기분을 잘 캐치하는 남자 때문에 은수는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름 얼굴이든 목소리든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건만, 이 남자 앞에선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들키고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그런데 오늘은 왠지, 대놓고 찡찡대고 싶어졌다. 그 앞에서 매번 뭔가를 숨기고, 아무 일도 없는 척하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사실 별것 아닌 것처럼 굴었지만, 그 망할 아저씨의 독설이 아직까지도 귓가에 맴돌았다. 빌어먹게도.

“……있었어요, 좀 안 좋은 일.”

그녀의 말에 현재는 금세 당황한 목소리가 되었다.

[왜요. 무슨 일이었는데요. 얼른 말해 봐요.]

“…….”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곤 생각했다.

“아까 지하철 타고 왔거든요. 평소랑 똑같이 탔는데, 누가 나한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거예요.”

[네.]

“근데, 어떤 아저씨가 나를 쑥 밀어내 버리고 그 자리에 덜렁 앉아 버리는 거 있죠.”

[다른 자리 놔두고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암튼, 엄청 세게 밀었다는 건 확실해요.”

[어유, 그래서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 줬는데, 그 아저씨가 막 나 보고 뭐라고 하는 거예요.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가 있니 없니 하면서, 딱 봐도 나한테 하는 말인데 추궁하니까 막 아니라고 하는 거 있죠.”

[……아아,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죠. 예의 밥 말아 먹은 사람들.]

너무나도 진지하게 힐난하는 말투에 그녀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어떻게 하긴요. 막 쏘아붙였죠. 내 특기잖아요.”

[그랬을 것 같긴 해요. 속 시원히 다 말하고 왔어요?]

“……아뇨. 사실 더 쏟아 붓고 싶었는데, 참았어요.”

[왜요?]

“진짜 하고 싶은 말 다 하려면 반나절도 모자랄 것 같았거든요. 더러워서 먼저 피했어요.”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에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련하시겠어요, 하는 듯한 웃음소리.

[잘했어요. 연락이 늦어서 걱정했는데, 역시 은수 씨는 내가 괜히 걱정한 것 같네요.]

“그럼요. 내 걱정은 말고 현재 씨 걱정이나 해요. 좀 끝나 가기는 해요?”

[네. 아직 좀 남았는데,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다들 지쳐서 잠깐 쉬고 있어요.]

“음…….”

임신을 해서 안 좋은 일은 이런 것이었다. 그를 포함한 팀원들에게 괜히 미안해질 일이 생긴 것.

“팀장씩이나 돼서 같이 있어 주지도 못하고, 미안하네요.”

[아니에요. 팀장님 없어도 다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은수 씨는 안 좋은 생각 하지 말고 편히 쉬어요. 알았죠?]

“……네. 힘내요, 현재 씨.”

그녀의 말에 그가 살짝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말로만요?]

“네?”

그럼 뭘 어떻게 하란 거지. 그녀가 멀뚱멀뚱 수화기를 붙잡고 있을 때, 그가 짐짓 인심 쓰는 척 말을 이었다.

[영상 통화면 힘이 좀 날 것 같은데.]

“……영상 통화요?”

갑자기 웬 영상 통화? 그런 이상한 짓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누구와도.

[싫어요?]

“아니, 싫은 게 아니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정말요? 단 한 번도?]

“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가 그녀에게 영상 통화를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영상 통화를 하는 게 흔한 일인가?

[좀 놀랍네요. 버젓이 있는 기능을 한 번도 안 써먹다니.]

“원래 다들 영상 통화 잘 안 쓰지 않아요?”

[……사실 나도 거의 안 써 보긴 했는데,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었어요. 특히 은수 씨랑은.]

어차피 회사에서 만날 보는 얼굴, 영상 통화까지 해서 뭐 한대.

그러나 오늘은 왠지 그녀도 색다른 일을 해 보고 싶어졌다.

“그럼…… 내가 걸까요?”

[아, 아니요. 내가 걸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그렇게 통화가 끊겼다. 잠시 뒤, 그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바로 영상 통화를 걸어 왔다.

전화가 왔다는 표시가 뜨자마자 은수는 벌떡 일어나 카메라에 비친 제 모습을 점검했다. 모든 걸 다 내려놓은 채로 누워서 그런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아이…….”

어쩌자고 영상 통화를 승낙한 거야.

그와 얼굴을 보며 대화한다는 데에만 몰두해 미처 제 외관을 생각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그래도 서둘러 매무새를 정리하자 생각보다 괜찮아진 것 같기는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은수는 억지로 밝은 표정을 만들어 낸 뒤 전화를 받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평소보다 더 떨렸다.

“여, 여보세요……?”

수신 상황이 좋지 않은 건지, 몇 번을 부른 끝에야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네, 은수 씨.]

약간 피곤함이 묻은 듯한 얼굴과 목소리였다.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

[…….]

그들은 잠시 동안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늘 보는 얼굴인데 새삼스럽기는. 그러나 기기를 하나 거친 것뿐인데도 뭔가 느낌이 남달랐다.

[좀 이상하다, 기분이. 그쵸.]

“……그러게요. 영 딴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하고.”

영상을 통해 보는 그의 얼굴은 평소 보던 것보다 약간 날카로워 보였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본 얼굴일지도 몰랐다. 그녀에게만 신경 쓴다고 한 얼굴이, 은수가 익숙하게 마주 보던 그의 얼굴이었을지도. 그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은수 씨도 약간 그래요. 물론 똑같이 예쁘긴 하지만.]

하지만 팔불출은 이제나 저제나 그대로였다.

“그런 얘기 하면 안 부끄러워요?”

[전혀요. 마냥 좋기만 한데.]

미소를 머금은 입가가 무척 예뻤다. 손을 내어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왜 평소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항상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지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지금 어디서 전화하고 있는 거예요?”

[비상구요. 좀 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아아……. 네. 좀 그런 것 같아요.”

고작 통화 때문에 비상구까지 가다니.

사내에서 다른 관계를 맺는다는 건 이래서 불편한 것이었다. 사내 연애의 스릴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그녀의 체질상 사내 연애는 영 맞지 않았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이건 연애가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연애처럼 돌아가고 있기는 하니까…….

지금 이 상황만 보더라도.

액정 너머의 그는 영락없이 사랑스러운 연인과 통화하는 모습이었다.

[피곤했는데, 은수 씨 얼굴 보니까 피곤함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래요?”

[네. 앞으로 자주 애용 좀 해야겠어요.]

누가 다시 또 이런 걸 할 줄 알고.

“누구 맘대로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예? 그런 게 어딨어요.]

“여기 있어요. 영 낯간지러워서 두 번은 못 하겠단 말이에요, 이거.”

그녀가 푸념했지만, 그는 여전히 싱글벙글한 채로 뻔히 알겠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좀 참아 봐요. 언제 또 야근을 할지 모르잖아요. 피로 회복제가 따로 필요 없는데, 지금.]

“…….”

하긴, 이렇게 좋아하는데 한 번으로 끝내긴 조금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그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기란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은수는 이쯤에서 그만 통화를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자, 다 봤죠? 이제 그만 끊어요.”

[벌써요?]

“그럼요. 아까 통화까지 합하면 벌써 꽤 했는데.”

[……근데 왜 이렇게 짧게 느껴지죠.]

사실은 은수도 좀 짧다고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것을 그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빨리 일이나 하세요. 퇴근해야죠. 집 가면 연락해요. 자고 있을 수도 있지만.”

[……네. 알았어요.]

얼굴과 목소리에 아쉬움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은수와 영상 통화까지 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는 듯했다.

[그럼, 혹시 모르니까 인사하고 끊을게요.]

“…….”

[잘 자요. 안 좋은 일 같은 건 잊어버리고요.]

안 좋은 일?

……아아, 지하철 민폐남.

“……아, 네. 그럴게요.”

그와 통화를 하다 보니 어느샌가 아까 전 일은 잊은 채였다. 그래도 확실히 그와의 통화는 기분 쇄신에 꽤 효과가 있었다. 어떻게든 그 생각에서 탈피하고 싶었는데.

[먼저 끊어요. 또 연락할게요.]

“네. 얼른 마치고 들어가요.”

[네.]

간결한 그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종료 버튼을 눌렀다.

최종 통화 시간이 깜빡거리는 액정을 보면서, 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짐을 느꼈다. 제트기처럼 붕 날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자꾸만 이렇게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시나브로 그에게 길들여져 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녀는 무서워졌다.

‘……어쩌지, 나. 정말.’

십 몇 년간 지켜 오던 신념은 어느샌가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곧 뿌리까지 뽑혀 나갈 것만 같은데.

그녀는 폰을 다시 던져 둔 채 그대로 자리에 누워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장이 마치 제 마음 같았다.

‘넌 지금, 대체 어떤 마음이니?’

끊임없는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녀도 그 답을 알 것 같았지만, 밀려드는 두려움이 그녀의 발목을 힘껏 잡아 댔다.

“…….”

몰라. 정말 모르겠어, 난.

모든 것을 피해 버리고 싶은 사람처럼, 그녀는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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