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56. 기대고 싶어져 (1)
“어휴, 아서요. 그럼 현재 씬 아들 같다는 거예요?”
“아뇨? 그건 모르죠. 하지만 여자 축구 선수도 있잖아요. 은수 씨 방금 그 말, 성차별적인 발언이었어요.”
“……아, 그런가.”
분위기에 취해 아련해지려 했건만, 지난 번 제가 했던 말을 고대로 돌려 응수하는 걸 보니 은수는 흥이 팍 식어 버렸다. 이런 걸 보면 하여튼 보통내기가 아니란 말이야.
내가 너무 오냐오냐 해 준 게 분명해. 순 안 좋은 것만 배워선.
은수가 뾰로통한 입술을 앙다물자 그가 픽 웃었다.
“다음에 병원 갈 땐 나랑 꼭 같이 가요.”
“……왜요?”
“왜긴요. 우리 아기 보고 싶어서 그러지.”
이젠 아주 당당히 병원 동행을 요구하는데다가, 말끝마다 ‘우리’를 붙이기까지.
뭐라고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라는 말이 주는 효과가 은수의 생각보다 더욱 거센 탓이었다.
“같이 가게 해 줘요. 그럴 거죠?”
게다가 저렇게 애처로운 눈빛인데. 저기다 대고 거절을 어떻게 해.
“……정 원하면…… 뭐.”
그녀의 말에 남자는 기쁜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렇게나 좋을까. 고작 병원 같이 가도 된다는 말일 뿐인데. 이 정도에 이렇게 뛸 듯이 기뻐하는 걸 보면 이제껏 내가 너무 야박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아이가 마사지를 좋아하나 봐요. 자주 해 줘야겠다.”
아이의 뚜렷한 태동은 분명 저의 마사지 덕분인 것 같다며, 그는 아까보다 더욱 열심히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은수는 이 상황이 왠지 모르게 낯설어졌다.
‘어떡해.’
발에 닿는 감각도 어쩐지 아까보다 훨씬 생경했다.
‘자꾸 떨리잖아, 이상하게.’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였다.
* * *
퇴근 시간의 지하철역은 사람 지옥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엄청나게 붐볐다.
하지만 이제는 은수도 아침저녁마다 보게 되는 이 광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요즘은 한가롭게 주변 풍경을 돌아보는 여유까지 생겼다. 차를 가지고 다닐 때에는 절대 불가능하던 것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눈코 뜰 새 없었던 저의 대학교 시절도 새록새록 생각나곤 했다. 아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 뜻밖의 즐거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하면서, 은수는 갈수록 무거워져만 가는 배를 부여잡았다. 버스와 지하철에 왜 임산부석이 있는지, 요사이 들어서야 절실히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무거운 걸 달고 다니는데 당연히 앉아서 갈 수 있게 해 줘야지. 이건 기본적인 삶의 질이 달린 문제라고.
그녀의 눈길이 옆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딱히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 주는 착한 사람이 하나쯤은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전철이 도착하고, 은수는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 봉 옆에 있는 공간을 일단 선점했다. 그나마 옆에 뭐라도 잡을 게 있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었다.
문이 닫히고, 숨을 돌린 그녀는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깔끔한 신발 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현재가 선물한 신발은 그녀에게 생각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장시간 서 있어야 할 때는 특히 더. 발이 편해지니 다른 일들도 한결 수월했다.
‘그 남잔 안 그런 것 같으면서 은근히 센스가 있단 말이야.’
이렇게 또 문득 그가 생각났다.
현재는 오늘 다른 팀원 몇 명과 함께 야근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구른 그녀에게 야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지와도 같았지만, 신입인 그에겐 그렇지 못할 것이었다.
[ㅠㅠ오늘은 못 가서 미안해요] 현재씨
[집 도착하면 꼭 연락해요] 현재씨
일 때문인데 미안하기는. 죽상을 하고 메시지를 보냈을 그를 생각하니 은수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저기, 여기 앉으세요.”
그때, 때마침 근처에 자리가 난 모양이었다. 은수가 퍼뜩 고개를 들자 젊은 여자 한 명이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 여자의 손은 방금 전까지 본인이 앉아 있었던 것 같은 빈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럴 때는 티 나게 불룩 튀어나와 있는 배가 어찌나 감사한지.
“아, 네. 고맙습니다.”
빈자리가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은수는 얼른 그곳을 사수하려 했다. 그런데…….
“크흠!”
그와 동시에 웬 등산복 아저씨가 뒤를 파고들더니 앉으려는 그녀를 밀어내고 먼저 엉덩이를 붙이는 것이 아닌가!
졸지에 어이없게 자리를 뺏기고 만 은수는 그 자세 그대로 정지하고 말았다. 눈 뜨고 코를 베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나참, 뭐 이런 일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자리가 그렇게 없었나.
가까스로 몸을 돌려 선 그녀는 나직하게 남자를 불렀다.
“저기, 죄송한데.”
“…….”
“제가 지금 임신 중이라 몸이 좀 불편해서요. 실례인 건 알지만, 자리 좀 양보해 주실 수 없을까요?”
물론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애초부터 자리를 스틸하지도 않았겠지만,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엄연히 양보 받은 자리를 이런 식으로 맥없이 뺏길 순 없었으니까.
그러나 약간 심술궂은 인상의 남자는 다리를 쩍 벌린 채 기분 나쁜 시선을 하고 은수를 위아래로 훑었다.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고만. 젊은 사람이 웬만하면 좀 서서 가. 저기 젊은이들 다 서 있는 거 안 보여?”
그야 저 사람들은 배가 이만큼 안 불러 있으니까 그렇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속으로 ‘참을 인’을 새긴 은수는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건 알지만, 솔직히 말해서 제가 먼저 앉으려고 한 자리를 뺏으신 거잖아요.”
하지만 은수의 은근한 질타에도 남자는 여전히 당당했다.
“뺏긴 누가 뺏었다고 그래? 그 쪽이 여기 자리 맡아 놨어?”
하아. 은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전형적인 무논리. 단번에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한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더 말해 봐야 소용도 없겠네.
“아, 예. 죄송합니다.”
드러워서 안 앉고 만다. 임산부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하여튼.
이런 족속들과는 아예 엮이지도 않는 게 상책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까 전 자리로 다시 돌아간 은수는 봉에 몸을 기대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온 말은 잠자코 있으려 했던 그녀의 신경을 매우 거슬리게 했다.
“쯧쯧. 하여간 요즘 젊은 사람들은 문제야, 문제. 윗사람 공경할 줄도 모르고, 그저 지 편한 것만 찾아 대기 바빠선.”
“…….”
“애를 가졌으면 집구석에나 틀어박혀 있을 것이지, 왜 나와서 사서 고생을 하나 몰라…….”
……뭐야. 저거 내 얘기하는 거야, 지금?
평화로웠던 그녀의 눈빛에 빠직 날이 섰다. 뭐 밟은 셈 치고 넘어가려고 했건만. 당신이 감히 잠자는 민은수의 코털을 건드려?
“지금 그거, 저 들으라고 하시는 소린가요?”
눌러 놓았던 싸움꾼의 기질, 직설적인 말투가 본능적으로 튀어나갔다.
“……뭔 소리야. 누가 댁 얘기래?”
방금 전,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뻔히 보이는 말을 용감하게 지껄이던 남자는 심상치 않은 은수의 낌새를 눈치채고는 금세 말을 돌렸다. 눈길을 슬금슬금 피하는 것부터가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일러 주고 있었다.
아, 이런 졸렬한 것들 딱 질색인데, 나.
입술을 깨물었다 놓은 그녀가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저한테 하신 소리 맞잖아요. 발뺌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 쪽한테 한 말 아니라니까, 글쎄?”
“믿을 걸 믿으라고 하세요. 사람 앞에 두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눈 가리고 아웅 하면 다예요?”
체구도 작고 유약해 보이던 젊은 여자의 기세는 그의 생각보다 엄청났다. 사실 좀 만만하게 보고 덤볐던 것인 터라, 여자가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였다.
궁지에 몰린 남자는 일부러 눈을 크게 부릅뜨며 위협감을 조성했다.
“아니, 젊은 사람이 말본새가 왜 그래? 으른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그러나…… 천하의 민은수에게 그런 작전이 통할 리 없었다.
잠깐 말을 멈춘 그녀가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야말로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말씀하시면 안 되죠.”
“……뭐, 뭐야?”
은수의 날카로운 눈이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리 좀 양보해 달라 했다고 그렇게 인신공격을 하시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지금 아저씨 복장으로 보아하니까 건강하시다 못해 팔팔하시기까지 한 모양인데, 그 정도시면 고달픈 젊은이들한테 자리 좀 양보해 주셔야죠. 연세 드실 만큼 드신 분이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그다지 큰소리가 난 것도 아닌데, 어느새 전철 안에 있는 모든 인원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자리 한번 잘못 뺏었다가 이게 무슨 일인지. 갈수록 태세가 불리해지고 있다는 걸 알아챈 남자는 어떻게든 건수를 잡기 위해 발버둥 쳤다.
“내, 내가 뭘 어쨌다고 이 지랄이야? 나이 든 사람이 좀 앉아서 갈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억울해?”
“…….”
“나이도 어려 보이는 게 벌써부터 발랑 까져서 애나 배 가지고는. 뭐 잘난 게 있다고 선생질이야, 선생질이? 어?”
이젠 하다하다 공격할 게 없어서 애까지 건드리네. 아주 갈 데까지 가셨구만.
그녀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아저씨도 누군가의 뱃속에서 태어난 거 아니에요? 제가 몇 살이든, 임신을 했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잔말 말고 빨리 사과나 하시죠.”
“내가 뭘?”
“방금 전에 함부로 말씀하신 거요. 요즘 젊은 사람들 어쩌고 하셨잖아요. 누가 봐도 절 겨냥하신 거 아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시니까 사람이 좀 없어 보이네요. 추해 보이고.”
“이…… 이런, 별 미친년이…….”
하는 말마다 족족 맹랑하게 받아쳐 버리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수준 낮은 욕이 전부였다.
이제 좀 닥치고 있어 주려나.
여유롭게 웃던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남들에겐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 지금 보는 눈이 얼만데, 자꾸 이러시면 아저씨 모욕죄로 잡혀 들어가요. 그러길 원하세요?”
“…….”
“뭐, 정 원하시면 그렇게 해 드릴 수도 있고요.”
잔뜩 당황한 남자의 눈이 요리조리 굴러다녔다. 어떻게 하는 편이 가장 좋을지를 놓고 상황을 재고 있음이 분명했다.
“…….”
그렇게 잠시 뒤, 이미 논란의 중심이 되어 버린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잇, 재수가 없으려니까 내가 증말…….”
“…….”
“자, 앉아! 앉으면 될 것 아니야!”
게임 오버. 그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녀는 막상 앉을 생각은 않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여자를 본 남자가 갸웃거리자, 그제야 그녀는 그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됐어요. 앉아 가세요. 어차피 저 이제 환승해야 되거든요.”
……뭐, 뭐라고?
남자의 눈빛이 한순간에 멍해졌다.
“근데 끝까지 사과는 안 하시네요. 뭐, 어쩔 수 없죠.”
“…….”
“다음부턴 임산부 자리 뺏지 마세요. 아셨죠?”
화룡점정으로 얄밉게 고갯짓까지.
그렇게 할 일을 다 마친 은수는 유유히 전철을 빠져나갔다.
마침내 전철 안엔 남자만이 홀로 남았다. 이렇게 끝나 버리면 저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였다.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고스란히 혼자 다 받게 된 남자는 분통이 터진 나머지 떠나는 그녀의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쳤다.
“아니, 뭐 저런 게 다 있어?!”
완벽한 그녀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