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5. 임신부의 딜레마 (4)
같은 시각.
늦은 설거지를 하고 있던 은수의 엄마, 이 여사는 오랜 친구의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
“여보세요?”
[은주야, 나 미숙이.]
“어어, 오랜만이네?”
[응, 잘 지내지?]
“그럼, 나야 만날 똑같지. 어쩐 일이야?”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웬일인지 한 템포 늦었다.
[아, 다른 게 아니고…… 네 딸내미 있잖아.]
“어, 걔는 왜?”
[이번에 진짜 괜찮은 자리가 있는데, 네 딸 얘기하니까 당장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이번엔 어떻게 좀 안 되까?]
역시나. 미숙이 전화를 걸어 온다면 십중팔구 선 자리 얘기일 것임을 이 여사도 알고 있었다. 원래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지만, 당사자인 은수가 부득불 거절하는 현 상황에서는 이런 전화가 마냥 반가울 수는 없었다.
“안 돼. 나도 귀에 닳도록 얘기했는데, 선은 절대로 안 나가겠다는데, 뭐. 그냥 포기하고 다른 애 알아봐. 그게 빨라.”
[아이고, 걘 아까운 청춘을 왜 그렇게 썩힌대. 참…… 아깝다, 아까워.]
너도 아까워하는 판인데 엄마인 나는 오죽하겠니. 이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란다.
더 말하기도 입 아파서, 그녀는 잠자코 한숨만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수화기 너머로 미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응? 뭐가.”
[아니……. 혹시 무슨, 선을 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거 아니냐고…….]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채지 못한 이 여사가 눈을 깜빡거렸다. 통화일 뿐인데도 미숙은 거의 남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기분 나빠하지는 말구. 너 경희 알지? 걔 딸내미가 글쎄, 남자 한 명 잘못 사귀었다가 덜컥 임신을 했다나 봐. 요즘 젊은 애들한테는 그게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더라고.]
처음엔 별생각 없었는데, 듣다 보니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이게 무슨?
“……뭐야. 우리 은수가 애를 배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이 여사의 날선 목소리에, 미숙은 금세 깨갱해서는 변명했다.
[아니,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으라니까. 그런 것까진 아니라도, 숨겨 둔 남자가 있는 걸 수도 있잖어. 엄마한테 그런 것까지 구구절절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구. 계속 그러는 거 보니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한번 알아봐 봐.]
나참. 자식을 이렇게 못 믿어서야, 원.
얘기를 듣던 그녀는 혀를 끌끌 찼다. 자동적으로 헛웃음도 튀어나왔다. 무슨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지.
“설마. 우리 은수는 절대 그럴 애 아니야. 결혼도 안 하겠다고 하는 애라니까! 남자가 있었으면 당연히 말을 했겠지. 그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런 얘기 할 거면 끊어.”
하나뿐인 딸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이 여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미처 몰랐다.
설마가 사람 잡는 일이 저에게도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 * *
집 안은 어느새 기분 좋은 코코넛 향기로 진동했다.
두 사람은 소파와 바닥에 앉은 채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은수의 팅팅 부은 발이 현재의 큰 손아귀 안에 고스란히 감싸졌다.
“기분이 어때요?”
“……잘 모르겠어요.”
씻고 와서 물기가 살짝 남은 발에, 손의 온기로 녹은 오일이 골고루 발리는 기분은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했다.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야릇하기도 하고, 또…… 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기도 했다. 꼭 꽈배기가 될 것 같아.
어정쩡한 은수의 대답에 현재는 낮게 키득거렸다.
“잘 모르겠으면 안 되는데. 좋아야 되는데.”
사실 엄밀히 말해서, 좋으면 좋았지 나쁜 기분은 절대 아니었다.
“뭐…… 좀 시원한 것 같아요.”
“그래요?”
솔직히 말하긴 좀 쑥스럽지만, 생각보다 안정감이 들기도 했다.
“사실 오늘 좀 힘들었었는데,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것 같아요.”
아침에 그런 이상한 소리도 듣고, 오늘 하루는 진짜 욕봤지, 나.
그 말에 발 마사지에만 집중하고 있던 현재가 고개를 들어 은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요? 누가 뭐라고 해요?”
“……네?”
물론 윤정이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런 걸 이 남자에게 일일이 말하는 건 좀 아니었다. 제일 친한 친구가 나 보고 무책임하대요, 라고 말할 수도 없고. 따지고 보면 걔가 한 말 중에 딱히 틀린 말도 없었으니까.
“……아, 아뇨. 그냥, 일 때문에.”
“아아, 난 또.”
의심 없이 짧게 대꾸한 현재가 다시 마사지에 열중했다. 그에게서는 흡사 전문가의 포스가 물씬 풍겼다.
“근데 현재 씨 마사지할 줄 알아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다 공부해 뒀죠.”
“어떻게요?”
“그런 게 있어요.”
“……속 시원히 좀 대답해 주면 어디가 덧나요?”
이 사람은 만날 이런 식이야.
은수의 입술이 불만스럽게 튀어나오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은 그가 냉큼 덧붙였다.
“알잖아요, 나 인터넷 신봉자인 거. 동영상 보면서 익혔어요. 드라마 보니까 그러길래.”
“아…….”
그가 정성스럽게 제 발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맨 처음 그가 이 코코넛 오일을 선물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굉장히 어수룩하게만 보이던 남자였는데.
하지만 그는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갈수록 고단수가 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아까 전 선택지를 이용해 승낙을 이끌어 내던 스킬도 그렇고, 요즘 뭔가를 물어보면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지 않는 것도 그렇고…… 그의 의도대로 조종당하는 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그녀가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끔, 도현재는 확실히 은수의 상식선에선 예측이 불가능한 인간이었다.
“근데 아까는 왜 그랬어요.”
“뭘요?”
“발이요. 예쁘기만 한데. 누구 발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아니, 이 남자는 무슨 여자 발을 이렇게 유심히 보고 있어?
민망해진 은수의 볼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으윽, 보지 마요!”
“왜요. 진짜 예뻐요. 발가락도 길고. 하얗고.”
그럼 뭐 해. 전체적인 밸런스가 별로인걸.
샐쭉해진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통통하잖아요. 발볼도 넓고.”
“그래서 더 귀여운데.”
세상에, 별게 다 귀엽대.
믿어지지 않았지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래도 싫지는 않았다. 이 남자한텐 나의 뭔들 안 예쁠 수 있을까.
이제 그는 엄지로 발바닥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살짝살짝 느껴지는 가벼운 지압에 엄청난 잠기운이 밀려들려 했다. 남자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꼭 자장가 같기도 했다.
“은수 씨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모르겠는데,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아기도 좋아하죠.”
“……네…….”
“……은수 씨 졸려요?”
“……네……. 좀 졸리네요…….”
안 되겠다. 이 남자는 빨리 보내 버리고 그만 자러 가야지. 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거의 잠들 기세로 가늘어져 있던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한순간 뭔가에 의해 얼어붙은 것 같은 모양새. 그녀의 발을 붙잡고 있던 그가 그러한 변화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은수 씨?”
그녀의 손이 재빠르게 배를 덮었다. 이윽고, 그녀는 무슨 이유에선지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지켜보던 현재는 덜컥 불안해졌다.
“왜 그래요?”
“…….”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얽혔다. 그리고 잠시 뒤, 현재는 방금 전 그녀만큼이나 놀라고 말았다.
“방금, 애기가 발로 찼어요.”
“……정말요???”
그 움직임이 마치 전광석화와도 같았다. 바닥에 앉아 있던 그는 홀랑 소파로 올라와 은수의 옆자리에 바투 앉았다.
첫 태동이 꽤나 궁금하긴 했던 모양. 덕분에 은수는 훅 끼쳐 오는 남자의 온기와 향기를 느끼고 움찔했다.
“방금 그런 거예요?”
허락을 해 줄 새도 없이, 현재의 손은 곧장 은수의 배 위로 향했다. 그 바람에 그녀는 또 한 번 움찔했지만, 그는 아기의 발차기에만 정신이 팔려서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확실해요?”
“그렇다니까요. 확실히 뻥! 찼어요.”
그녀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그건, 지금껏 느껴 왔던 자그마한 태동들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고.
“찬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차려나…….”
“그러게요.”
어차피 별다른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숨을 죽이게 되었다.
은수와 현재는 함께 눈을 굴리며 조용히 아기의 미약한 신호를 기다렸다. 제발, 한 번만 더 해 주기를.
그러나 아기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안 할 모양인가 본데요.”
“그런가…….”
“…….”
“그래도 조금만 더 있어 봐요. 처음이잖아요.”
자고로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아기는 비록 잠잠했지만 섣불리 실망하지 않고 기다려 보기로 할 무렵이었다.
잠시 뒤, 마치 부모의 기대에 화답이라도 해 주듯 현재의 손이 왠지 모를 힘에 의해 ‘들썩’거렸다.
“어!”
“오!”
그를 감지한 은수와 현재가 동시에 동그래진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맞죠? 방금 또 찼죠?”
“네! 그런 거 같아요.”
“…….”
“와……. 신기하다.”
쪼끄만 게 힘도 좋네.
갑작스레 기분이 좋아진 현재의 입술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아이의 존재를 이렇게 강렬하게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정말 숨 쉬고 있긴 하구나, 우리가 만든 생명이.
그 사실이 눈물겨울 정도로 깊게 와 닿아서, 그는 별생각을 할 틈도 없이 제 귀를 그녀의 배 위로 바짝 가져다 대었다.
“현재 씨!”
손을 통해 느끼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탓이었다.
“잠깐만요.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요.”
뭐, 뭐 하는 거야…….
남자의 기습적인 행동에 깜짝 놀란 은수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빠들이 으레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배를 내주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이렇게 불러 있는 배는.
“계속 움직이고 있나 봐요. 소리가 들려요.”
“…….”
“이 조그만 데서 어떻게 이렇게 움직이는 거지.”
아기는 가까이 온 아빠가 반가운 것처럼 신나게 꼬물거렸고, 현재는 그런 아기가 신기해서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는 파동이 되어 그녀의 배를 톡톡 두드렸다.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은수의 눈길은 어느새 현재의 정수리로 향해 있었다.
뭔가 좀…… 뭉클한 것 같기도 하고. 벅찬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아기 축구 선수 시켜도 되겠다. 지금 보니까 내 못 다 이룬 꿈을 이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