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54. 임신부의 딜레마 (3)
‘아니, 그런 해괴한 말은 자꾸 어디서 듣고 오는 거야, 걘?’
얼마나 충격이었으면 이 시간까지 그 ‘요강’ 소리가 생생하냐.
아침의 일을 떠올리던 은수는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윤정은 다른 부분은 안 빠지는 대신에 고놈의 입이 문제였다.
‘개도 그 입을 고쳐야 시집을 가든지 말든지 할 텐데.’
문득 든 생각. 그러나 이내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는 너는 시집갈 생각이나 있긴 하니?’
네 주제에 괜히 쓸데없는 걱정은.
“휴우….”
어느새 퍽 둥글어진 배를 내려다보며 은수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임신 초기 200퍼센트 충만했던 자신감이 ‘왜’, ‘언제부터’ 이렇게 수그러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무사히 잘 낳아서, 잘 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통화 말미에, 윤정은 특유의 말투로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암튼 너 진짜 잘 생각해. 잘나가는 미혼모? 그거 허울만 좋은 거지. 네 인생만 중요해? 아빠 없이 자랄 애 인생은 어쩌라고. 네가 책임질 거세요?’
‘…….’
‘야, 됐고, 너보고 똑똑하고 현명하다고 한 인간들 다 데리고 와. 다 줘패 버리게.’
이미 한바탕 설전이 있은 후였다. 말 잘하고 욕 잘하기로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윤정이었지만 논리와 말싸움으로는 결코 은수를 이길 짬밥이 아니었다.
그 통화는 그렇게 윤정의 항복으로 끝이 났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은수에게 가져다준 여파는 상당했다.
덕분에 회사에 있는 동안 오직 한 가지 생각에만 골똘했으니까.
‘내가 정말,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처음엔 세상의 빛을 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아이들에 비하면 적어도 이 아이는 축복받은 것이지 않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결단이 아니었더라면 이 아이는 애초부터 절대 존재할 수 없을 아이였으니까.
돈 있고 능력 있겠다, 그리고 아이에게 사랑을 듬뿍듬뿍 줄 마음도 있겠다, 낳기로 한 후부터는 거칠 게 없었다. 요즘 세상에 싱글맘이 된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뭐, 세간의 안 좋은 시선이야 감수하기로 한 것이니 논외로 둔다 치더라도.
비록 아빠 없이 자랄 아이겠지만, 어줍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보다는 오히려 훨씬 행복하게 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특히 재정적인 부분만큼은 어디에도 꿇리지 않게 해 줄 자신이 있었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전부 철저히 엄마인 제 입장만을 생각한 결론이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뱃속에서 쑥쑥 커 가고 있을 아이의 입장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태어나고 싶어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간다는 게 축복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죄악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한때는 저도 세상을 증오하는 아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
첫 단추를 잘못 꿰어서 자꾸만 이런 고비가 찾아오는 것인지. 현실에 대한 감각이며, 옳게 판단하는 능력까지 몽땅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팀장은 팀장이라고, 회사 일 하나만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야!
집 앞에 다다른 그녀는 애꿎은 현재를 저주하며 힘없이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 했다.
그런데 그때, 멀찍이서 우렁찬 차 엔진 소리가 들려오더니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길가를 밝게 비추었다.
빠른 속도로 진입한 차는 끽 소리를 내며 은수의 바로 눈앞에 정차했다.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
“은수 씨!”
“……현재 씨?”
“딱 만났네. 아직 저녁 안 먹었죠?”
씩 웃은 남자가 조수석에 놓여 있던 봉지를 들어 보였다.
“저녁 사 왔는데.”
“…….”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하여튼 옛말 틀린 법 하나 없다니까.
* * *
짧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나름대로 정다운 티타임을 가지며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좀 어땠어요? 앉아서 왔어요?”
“네. 어떤 여자분이 양보해 줘서 편하게 왔어요.”
“다행이네요. 하도 지옥철이라 그래서 걱정인데.”
“가끔씩 사람 많을 때는 좀 힘든데, 다닐 만해요. 아직까지는.”
컵을 손에 쥔 현재가 그제야 약간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리에게 들킨 이후 은수는 줄곧 버스 혹은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물론 현재는 그와 하등 상관없이 그녀의 집으로 매일 퇴근 도장을 찍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위험 부담은 있더라도 같이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일 텐데, 조심하겠다는 은수의 뜻이 너무나도 완고한 나머지 현재는 말을 꺼낼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또 아무 생각 없다느니, 조심성 없다느니 하는 소리만 들을 게 빤하기도 했고.
좀 더 기다렸다가 힘에 부칠 때가 되면 다시 한 번 설득해 봐야지.
“근데, 저건 뭐예요?”
루이보스티를 홀짝이고 있던 은수가 소파 위에 놓인 종이 가방을 가리켰다.
“아.”
저걸 잊고 있었네. 저녁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였는데.
은수와 함께 있을 때면 오로지 그녀에게만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본 목적을 잠시 잊어버리곤 했다.
종이 가방을 얼른 집어 온 현재가 그것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선물이에요.”
“선물이요?”
또 웬 선물…….
저도 모르게 또 탐탁지 않은 얼굴이 되었지만, 그녀는 의식적으로 표정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뭔데요?”
“꺼내 봐요.”
설마 이것도 먹을 것인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열어 본 가방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어……?”
신발이었다. 그것도 아주 편해 보이는.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갑자기 신발은 왜…….
은수의 의아한 눈초리를 간파한 그가 짐짓 웃었다.
“은수 씨 요즘 걸어 다닐 일 많잖아요. 보니까 변변한 신발도 없는 것 같길래 하나 사 봤어요. 편해서 임산부들이 많이 신는 신발이래요.”
“아…….”
내가 신발 필요한 건 또 어떻게 알았대.
그의 말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본래 하이힐 종류를 즐겨 신던 그녀였기에, 신발장의 대부분은 화려하고 굽 높은 신발들이었다. 임신하고 나서부터는 그나마 몇 켤레 있던 통굽으로 된 구두를 돌려 신던 참이었지만, 이제는 하중이 실리고 발도 붓고 하는 통에 조만간 새 신발을 사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사 온 신발은 편해 보이면서도 적당히 격식 있어 보여서, 보는 순간 마음에 쏙 들었다.
이런 식으로 번번이 감동을 주다니. 꼭 제 마음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고마워요. 이런 것까지 신경 써 줄 줄은 몰랐어요.”
“뭘요. 당연한 거지.”
현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또한 이 대리의 조언 덕분이라는 걸 그녀는 절대 알 수 없으리라. 어떻게든 그녀가 마음이 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더니, 진정 알토란같은 도움을 톡톡히 주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씨 보는 눈 있네요. 예쁘다.”
“그래요?”
“근데,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요?”
그런 것까지 말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신발 여기저기를 뜯어보던 은수가 작게 중얼거리자, 현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안 맞을지도 몰라요.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그냥 눈대중으로 산 거라. 안 맞으면 교환할 수 있어요.”
“음.”
그럼 내친 김에 한번 신어 볼까.
포장을 해체한 신발을 식탁 옆에 내려놓은 은수가 조심스럽게 발을 끼워 넣었다.
“우와, 딱 맞아요.”
“정말요?”
“네. 지금 좀 부어 있어서 아침엔 조금 클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발이 편해서 좋은 것 같아요.”
일어나서 괜히 다리도 들어 보고, 거실을 걸어 보기도 한다.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그녀 덕분에 현재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가뜩이나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는 사람이 불편한 신발로 다니는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었는데.
“앞으로는 꼭 그거 신고 다녀요.”
“네. 고마워요. 잘 신을게요.”
“근데 은수 씨, 발이 부었어요?”
아, 그 말은 하지 말걸.
아차, 한 그녀가 신발을 벗으며 느릿느릿 변명했다.
“원래 부종기도 좀 있었고…… 임신하면 다 발 자주 붓고 그런대요. 신경 안 써도 돼요.”
하지만 은수는 동시에, 그가 제 일에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잠시 생각하는 듯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그때 사 줬던 코코넛오일 아직 있어요?”
튼 살에 좋다며 크림과 함께 선물했던 것을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둘 다 나름 열심히 썼지만 워낙 양이 많다 보니 아직 대부분이 남아 있었다.
“아, 네. 안 그래도 꾸준히 쓰고 있어요.”
“도움 되는 것 같아요?”
“음…… 네. 아직까지는 튼 살 안 생겼으니까, 뭐.”
은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가 대뜸 눈을 반짝 빛냈다.
“내가 발 마사지해 줄게요.”
뭐, 뭘 해 준다고?
하마터면 마시던 차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네에?”
그러나 그는 은수의 반응엔 아랑곳없이 태연한 모습이었다.
“코코넛 오일로 발 마사지도 많이 한대요. 내가 해 줄게요.”
윽. 그건 좀…… 오버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싫어요!”
“…….”
늘 그랬듯,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가 버렸다.
아, 이게 아닌데.
“아, 아니, 나는, 현재 씨가 해 줘서 싫다는 게 아니라…….”
더듬더듬 변명의 말을 늘어놓으려던 은수는 남자의 표정을 보곤 뚝 멈추고 말았다.
금세 또 저렇게 풀이 죽어선. 사람 맘 약해지게, 진짜.
“부끄러워서 그래요. 발이 예쁘지도 않은데…….”
은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시무룩해 있던 현재가 곧장 반색했다.
“그런 거면 이리 와요. 내가 발도 씻겨 줄 테니까.”
발까지 씻겨 주겠다고? 기함한 은수가 입을 딱 벌렸다.
이거 갈수록 첩첩산중이잖아!
“아, 아뇨! 됐어요! 내가 씻으면 돼요!”
그러나 현재는 어쩐지 전에 없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고집 부리지 말고 빨리 이리 와요. 그런 거 안 풀어 주면 내내 고생해요.”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은수의 주저하는 기색에, 그는 마치 적선하는 셈 치듯 타협안을 내놓았다.
“정 그러면, 씻는 것까지만 은수 씨가 할래요?”
……어쩌다 전개가 이렇게 되어 버렸지?
은수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그냥 둘 다 싫다고 하면 되는 건데, 그러기에는 남자가 실망할 것이 눈에 뻔히 보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달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도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그래.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차라리…….
머뭇거리던 은수는 잠시 동안 치열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기어코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그, 그럼.”
“…….”
“씻는 건 내가 할 테니까…… 기다려요.”
현재가 바랐던 그 문장, 그대로였다.
그는 그제야 만족한 듯 배시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