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53화 (53/128)

# 53

53. 임신부의 딜레마 (2)

“괘, 괜찮아요. 안 아파요.”

그의 매끈한 미간에 금세 주름이 졌다.

“미안해요. 내가 잘 확인하고 줬어야 되는데.”

“아니에요! 내가 먹기만 하느라 잘 못 봐서…….”

이미 자책에 사로잡힌 그에게 은수의 말은 안중에 없었다.

“안 되겠다. 잠깐만요. 금방 치워 줄게요.”

말을 마친 그는 곧장 벌떡 일어서더니 청소 도구를 들고 와 바닥 주변을 샅샅이 치우고 물기를 닦았다. 미처 못 본 유리 파편이 없는지, 엉뚱한 곳으로 튀지는 않았는지 세심하게 체크하는 얼굴이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

어느새 뭔가를 먹겠다는 생각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착잡한 기를 띤 그녀의 눈이 현재의 얼굴을 천천히 좇았다.

하여튼 미안한 일도 참 많지. 정작 미안해야 하는 건 바로 나인데.

정직하고 우직하기만 한 남자는 정말로 바보 같다고밖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를 굳이 이곳까지 발걸음하게 만든 건 그녀였지 않은가. 그의 입장에선 생색만 내도 모자랄 것을.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일을 사과하고, 고마워하지 않아도 될 일에 과하게 고마워한다. 그는 이렇게 끊임없이 은수를 미안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이걸 단순히 ‘미안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언젠가부터 가슴께를 자꾸만 간질이는 어지러운 감정. 약간 뭉클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약간 짜증스럽기도 한……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요즘은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요. 그 말은 그저 늘어난 먹성을 뜻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말, 내 맘을 내가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진정 그랬다. 차라리 누군가에게서 답을 얻고 싶은데, 임신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니 차마 그럴 수도 없다. 그러고 보면 임신 5개월을 넘긴 지금까지도 가까운 사람들 중에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엄마를 포함해서.

어차피 아이가 태어나면 자연히 모두 알게 될 일, 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그 반향은 더욱 거세질 테고.

“혹시 모르니까 발 조심해요, 은수 씨. 유리조각 박히면 큰일 나니까.”

“……네. 조심할게요.”

이제 누군가는 꼭 알아야만 하는 시점이 온 것임을, 그녀는 자각했다.

다만 문제는 ‘누구’에게 제일 먼저 얘기해야 하느냐는 것.

남자의 숱 많은 뒤통수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은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마침내 은수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그녀가 정한 첫 번째 대상은,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이였다.

“윤정아, 나 임신했어.”

[……어?]

‘내가 방금 무슨 소릴 들은 건가?’ 싶은 투의 느지막한 대답. 이미 예상하던 바였다.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서 쉬운 일도, 가까운 사람 앞에선 어려운 일이 된다.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이 그랬다. 남 앞에선 ‘미친 척’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저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척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미친년’이 되는 거였다. 고로, 사실을 밝히는 데는 무척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만만한 친구 윤정을 첫 번째 타깃으로 설정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나마 제일 말하기가 쉬우니까.

[하하하. 뭔 개소리야…….]

예전 같았으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겠지만, 이제는 뭐 별 감흥도 없어서 달리 애쓰지 않고도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야. 나 임신했어.”

[……오늘 만우절?]

“아니. 만우절은 한참 지났는데.”

[야, 잠깐만. 나 지금 출근 중이라 기분 겁나 나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장난치지 마라.]

윤정은 고질적인 의심병이 있어서, 꼭 두 번 세 번씩 말해야 믿는 안 좋은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라니까. 초음파 사진 보내 줘?”

물론, 축하받을 거란 기대는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초음파 사진’이란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춘 윤정은,

[이 미친. 너 돌았냐? 이런 $#@!…….]

이내 특기인 걸쭉한 욕으로 축하를 대신했고, 은수는 자동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랜만에 듣는 윤정의 욕이 왠지 모르게 반가워서, 그녀의 입에선 실실 웃음이 새었다.

“너 지금 출근 중이라며. 욕해도 돼?”

[웃냐. 웃어? 넌 이 상황이 재밌냐?]

“아니. 지금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게 난데.”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 게 더 싫다. 진저리치듯 으으거리는 윤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지훈 그 새끼, 언젠간 일 칠 줄 알았어! 내가 예전에 그놈 눈빛 쎄하다고 그랬잖아! 그땐 너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서지훈? 이 얼마 만에 나오는 고릿적 이름인가.

윤정의 거대한 뒷북에, 은수에게선 나직한 탄식이 흘렀다.

“……아냐, 지훈 씨 애.”

[뭐? ……서지훈 아냐?]

“어. 아니야.”

한동안 연락이 뜸했기에 말하지 못한 부분이 많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대과거 속에 살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뭐야. 그럼 애 아빠가 누군데?]

다시 돌아온 윤정의 물음에는 호기심과 의심이 가득했다. 덕분에 은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원래라면 그를 당연히 ‘부하 직원’쯤으로 말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만 정의하기엔 어쩐지 그와 자신의 관계가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현재 씨를 누구라고 설명해야 하지?

설명할 말을 찾느라 고심하던 은수가 결국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있어. 너 모르는 사람.”

[……아예 딴 놈이라고? 아니, 야. 그럼 서지훈은? 너 임신했다는데 지랄 안 하디?]

“뭐, 조금.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헤어진 지가 언젠데.”

[헐? 언제 헤어졌는데?]

“어. 한…… 5개월 전인가?”

[……지금 나랑 장난하냐, 너?]

“……미안.”

나도 참 어지간히 죽은 듯 살았구나. 겸연쩍어진 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 좀 하고 살라는 타박을 들어도, 그녀의 무심한 성격은 어디로 가지 않았더랬다. 그랬던 그녀가 생각을 조금 바꾸게 된 건, 역시나 아이를 가지고 나서부터였다. 요사이만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 적은 없었으니까. 사실, 반성해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만도 그녀로서는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윤정은 절친이라고 있는 게 오랜만에 전화를 해서 한다는 소리가 ‘나 임신했어.’인 것이 맘에 들지 않는 듯했다. 수화기 너머로 짜증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아, 날벼락이네. 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뭐냐 진짜. 너 그럼 이제 어떡하려고.]

“…….”

[그래서, 그 뒤로 연락 안 왔어?]

“……왜 안 와. 왔지.”

[뭐라는데.]

“그냥, 전형적인 구남친 패턴.”

그에 대해서는 이제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말하기도 싫은 건 물론이고.

그녀의 왼손이 책상 한편에 놓인 선인장 화분을 톡톡 건드렸다. 잠을 설친 탓인지 피로와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공교롭게도 그에게서 가장 최근에 온 연락은 오늘 새벽이었다.

[자냐.] AM 01:03

[자나 보네. 잘 자.] AM 01:10

한 팀장 일 관련하여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로, 그들은 거의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처럼 지냈다. 그래서 그녀는 갑작스레 도착한 지훈의 연락이 매우 뜬금없게 느껴졌다. 그 여자랑 나름 잘 지내는 모양이더니 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은수는 당연히 그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은수가 이 고백을 좀 더 앞으로 당긴 데에는 그가 한몫을 했다. 그의 문자를 읽고 속이 매우 심란해졌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는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도 속사정을 모르니까. 심지어 그녀가 지훈과 헤어졌다는 사실조차도.

윤정은 말이나 행동이 좀 거친 편이긴 해도,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뒤끝도 없었다. 또 보기완 다르게 입도 무거웠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웬만해선 제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 은수가 맘 편히 속 얘기를 털어놓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최소한 이제 윤정에게는 말을 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고, 그래서 은수는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윤정이 은수를 너무 잘 안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지훈에 대해서도 쓸데없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근데 대체 왜 헤어진 건데. 너네 3년 넘었었잖아. 네가 찼어?]

“아니, 못 찬 게 한이지.”

[그럼 서지훈이 찼다고? 미친 거 아냐? 너 좋다고 쫓아다니던 게 언젠데!]

“……너무 좋아서 문제였나 보지.”

[뭐래. 또 뭔 개똥같은 소리?]

아오, 씨. 그 일은 떠올리기 싫은데.

정말 마지막으로 얘기하는 셈 치자고 생각하며, 은수는 맘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대꾸했다.

“결혼하자고 했었어. 근데 내가 싫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헤어지자더라.”

[……서지훈이 프러포즈했었다고?]

“어.”

[너, 서지훈한테는 네 단골 멘트 안 했었냐?]

“왜 안 해. 골백번도 더 했다. 그런데도 그런 거야. 내 말이 안 믿겼나 보지.”

[……이건 뭐 누가 불쌍한 건지 모르겠네.]

윤정에게서 쯧쯧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일에 관해선 초연해진 지 오래인 은수는 피식 웃기만 했다.

“누가 불쌍할 것도 없어. 그냥 그렇게 끝난 거야. 내 인생에 이제 지훈 씨는 없는 거고.”

[그럼, 그 ‘애 아빠’는?]

“……어?”

[서지훈은 네 인생에 없을 거라며. 그럼 그 남자는 앞으로 네 인생에 있을 것 같냐고.]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은수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자 윤정은 다시금 물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 남자랑 결혼할 거야?]

어김없이 나오는 ‘결혼’이란 단어에 은수가 한숨을 폭 쉬었다. 답답함을 풀려다 오히려 더 가중만 되는 느낌.

“내가 너한테도 굳이 설명해야 돼? 내가 결혼을 왜 하냐.”

[아니 그럼, 애까지 생겼는데 결혼 안 하겠다고? 그 남자도 그렇게 한대?]

“……아니, 그 남자는 결혼하자더라.”

[그래도 내뺄 생각은 없나 보네. 야, 너 생각 잘해. 여자 혼자서 애 키우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어?]

윤정의 말에 은수의 얼굴이 대번 부루퉁해졌다. 최소한 얘는 당연히 내 편을 들어 줄 줄 알았는데.

“……어려울 건 뭐 있어. 그냥 잘 키우면 되지.”

[하여튼…….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넌 네 새끼 걱정은 안 하냐?]

“뭐. 무슨 걱정.”

[요즘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편모슬하에서 자랐다고 하면 사람들 인식이 어떤데. 나중에 네 자식이 너 원망 안 할 거 같아? 아빠가 결혼하자고까지 했는데 엄마가 거절했다고 하면?]

“…….”

[내가 아는 너는, 일 그만두고 애만 키울 성격은 못 되잖아. 그럼 애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 테고……. 외로워질 거고. 애한테 못할 짓이잖아, 그거.]

그런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그녀에겐 오직 ‘난 무조건 이 애를 세상에서 최고로 잘나게 키울 거야.’라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미 단련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매우 현실적인 윤정의 말을 듣고 난 은수는 갑자기 벽에 부딪친 것처럼 멍해졌다.

단지 내 트라우마 때문에, 나중에 아이가 받을 상처, 외로움 같은 건 생각하지도 못했어. 윤정의 말이 뇌리에 박힌 순간, 현재가 했던 말도 뒤따라 생각났다.

‘팀장님. 아니, 민은수 씨.’

‘참 이기적인 사람인 거 알고 있어요?’

……그래, 난 이기적이야. 결혼이 무섭고, 상처 받기가 두렵고, 내 마음을 다 준 상대에게 버림받는 게 싫어. 사랑도 변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이 변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 있냔 말이야.

이건 어쩌면 현재에게 하고 싶은 말과도 같았다. 그러니 제발, 나에게서 멀어져 달라고. 하지만 저보다도 열성적인 그에게 이런 모진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제 풀에 지쳐 그만두면 좋으련만.

무심코 선인장의 가시를 만지자 비수처럼 날아와 박힌 윤정의 말처럼 따가운 것이 콕콕 손가락을 쑤셨다.

“일 안 하고 내가 직접 키우면 되지. 같이 있어 주면 될 거 아니야. 어떻게 해서든 외롭지 않게 해 줄 거야. 할 수 있어, 난.”

하여튼 말이 안 통해……. 윤정은 혀를 끌끌 찼다.

[모르겠다, 난. 그게 말이 쉽지. 그 남자랑 결혼만 하면 모든 게 일사천린데, 왜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고 하냐. 어휴.]

“…….”

[근데 그 남자……. 잘생겼어?]

……얘는 심각한 얘기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질문이 황당했지만, 은수는 요즘 들어 자꾸만 생각이 나는 현재의 얼굴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뭐, 잘생긴 편이지. 약간 연예인도 닮은 것 같고. 그 왜, 요즘 한창 뜨는 신인 배우 있잖아.”

[헐…….]

“왜?”

[진짜…… 넌…….]

“…….”

[호강에 받쳐서 요강에 똥 쌀 년이다, 넌.]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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