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 임신부의 딜레마 (1)
“레몬은, 어머니가 청 담그신다고 사두신 게 집에 있길래 좀 가져왔고. 순대는, 늦게까지 하는 포장마차 있길래 사 왔고.”
“……그렇구나. 맛있네요.”
그녀는 일부러 꼭꼭 씹으며 고소한 간의 맛을 음미했다. 원래 그녀는 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순대 간은 자칫 잘못하면 퍽퍽할 수 있는데, 현재가 사 온 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야들야들하고 촉촉한 게 정말이지 이제껏 먹어 본 것 중 최고였다.
저도 모르게 순대 사이에 섞여 있는 간을 집요하게 골라 먹고 있었나 보다.
그녀를 본 현재가 피식 웃었다.
“순대보다 간을 더 좋아해요?”
“네?”
젓가락질에 열심이던 그녀는 잠깐 주춤했다. 먹는 모습이 좀 추해 보이려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든 탓이었다.
“아…… 네. 좋아해요.”
“간 좋아하면 아들이래요.”
“정말요? 누가 그래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누가 그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은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현재는 얼른 대답해 주었다.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아…….”
늦은 시각까지 영업하던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순대를 포장해 오던 길이었다. 임신한 사람이 먹을 거니 특별히 맛있는 걸로 많이많이 달라고 하니, 아주머니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더랬다. 간을 찾는 거 보니 아들인 모양이라고. 그 말이 아까부터 현재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다시 한 번 간을 집은 은수는 짐짓 그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어떡해요? 현재 씨는 딸이 좋다면서요.”
“원래 그런 속설은 잘 안 믿어서요.”
“……에이. 그러면서 지금 나한테 굳이 말하고 있잖아요. 진짜 안 믿었으면 얘기도 안 했겠지.”
“……아, 그런 건가.”
정확한 그녀의 눈이 또 한 번 적중했다.
물론, 딸을 바라는 그로선 그 말이 마음에 걸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딸이든 아들이든 소중한 건 매한가지였다.
‘혹시나 내가 딸만 원한다고 오해하는 거면 어쩌지.’
솔직히 지금은 성별이야 어찌 됐든 아이가 빨리 태어나 은수를 설득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만 굴뚝같았다. 아이 본인이 아빠를 원한다고 하면 그녀도 좀 듣지 않을까 싶어서. 당연히 가능성 없는 헛된 희망일 뿐이지만 말이다.
지금은 좀 오버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바로잡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코 성별에 따라 자식을 차별하는 아버지가 될 수는 없으니까.
현재가 고민하고 있든 말든 아랑곳없이 은수는 이제 먹기 좋게 잘라 놓은 레몬을 덥석덥석 까먹고 있었다. 시다고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그 신맛이 나쁘지 않은지 레몬 조각들이 계속해서 입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무슨 TV 예능 프로그램 벌칙도 아니고, 굳이 신맛의 최강인 레몬을 거부감 없이 먹는 그녀가 약간 우스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안쓰러워지려 했다.
“너무 시죠? 귤을 좀 사 놓을 걸 그랬네…….”
그러나 은수는 고개를 흔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에요. 생각만 했을 땐 좀 무서웠는데, 먹어 보니까 레몬도 나쁘지 않은데요? 엄청 신 게 딱 내 스타일이야.”
“……그럼 다행이고요. 조심조심 먹어요. 혹시 탈 날라.”
“네, 알아요.”
그렇게 열심히 먹는 그녀를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잘만 먹고 있던 은수가 돌연 젓가락질을 멈추고 현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
“왜요? 맛이 이상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현재는 혹시나 급하게 먹어 체하기라도 한 걸까 싶어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갑자기 눈에 띄게 시무룩한 얼굴을 할 뿐.
“나 요즘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죠?”
“네?”
물론 입덧이 그친 후로 먹성이 조금 늘기는 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그런데 그의 생각과 달리, 갑작스레 그녀의 하소연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좀 심한 것 같아. 요즘은 진짜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요. 잠시만 있어도 배고프고, 먹고 돌아앉으면 또 배고프고. 이러다 식신 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
“만약에 계속 이러면 어떡하죠.”
겨우 이 정도 먹는 걸로 식신 되는 거였으면 이 세상에 식신이 되지 않을 사람이 없을 텐데. 그야말로 걱정을 사서 하는 꼴이었다. 현재는 걱정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놀리고 싶은 맘도 들었지만, 예민해져 있는 그녀를 감안했을 때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웃음기를 거두고 진심을 담아서 전혀 아니라고 위로의 말을 하려던 그가 별안간 잠시 멈추었다.
순간 며칠 전, 이 대리가 했던 또 다른 조언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먹을 건 사다 줬어? 잘했어. 근데,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막 주체 안 되게 먹고 그러면 적응이 안 될 거야. 혼자서 너무 많이 먹으면 자괴감 같은 게 들 수도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같이 먹어 줘. 그래야 조금이나마 맘 편히 먹지.’
아, 그게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나.
앞일을 훤히 꿰뚫는 이 대리의 혜안에 현재는 속으로 감탄했다. 밑지는 셈치고 믿어 보길 정말 잘한 듯싶었다.
“…….”
그래, 역시 말보단 행동이지. 생각이 정리되니 거칠 게 없었다.
현재는 대답 대신 앞에 놓인 레몬을 용감하게 집어 들곤 입에 넣었다.
덕분에 무방비 상태로 있던 은수는 깜짝 놀랐다.
“……혀, 현재 씨? 갑자기 왜 그래요?”
보란 듯 천연덕스럽게 레몬을 짓씹으며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냥요. 난 먹으면 안 돼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안 시어요?”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괜찮긴 개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무턱대고 집어넣었지만, 레몬은 씹으면 씹을수록 말도 못 하게 시었다. 은수는 이걸 대체 어떻게 눈 깜짝 안 하고 먹었나 싶을 정도로. 눈물이 비어져 나오려는 걸 참으며 레몬을 겨우겨우 삼킨 현재는 이제 순대와 간도 속속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부러 힘주어 말했다.
“맛있는 거 좋아하는 건 누구나 똑같아요. 은수 씨만 많이 먹는 거 아니니까 그런 생각 말아요. 나도 이렇게 먹잖아요.”
그래도 다행히 순대와 간은 은수의 말처럼 꽤 맛있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태연하게 웃어 보인 그는 마치 은수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이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놀렸다. 이 대리의 당부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
졸지에 잠깐 할 말을 잃은 은수는 현재를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저기, 현재 씨.”
이건 어쩌면 미스터리와도 같았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도 막지 않았던 그이지만…… 이렇게까지 해 가며 사람을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네?”
“……미안한데…….”
내 아이를 가져 놓고는 시종일관 철벽에, 제 맘이라곤 하나도 몰라주는 이 뻣뻣한 사람이…… 어째서 싫기는커녕, 하나도 밉지가 않은 걸까.
“너무 많이 먹지 마요. 나 먹을 거 모자라요.”
……아아, 이래서.
푸하하. 무심결에 터진 현재가 입을 가린 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은 뒤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킨 후에야 그는 겨우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대답했다.
“……네, 알았어요.”
‘불가항력’이란 말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님을, 그가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이 여자가 너무 좋아.
불가항력적으로.
식탐을 부리는 모습마저 이리 예뻐 보일 지경이면 가히 중증이라고 할 만했다.
어마어마한 콩깍지, 그걸 알면서도 벗겨 버리고 싶지 않은 건 왜인지.
단박에 젓가락을 내려놓은 현재는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순대를 그녀 쪽으로 쓱 밀어 주었다. 걱정 말고 양껏, 맘껏 먹으라는 뜻이었다.
너무나 신속한 그의 행동에, 은수의 눈길이 순대와 현재를 번갈아 향했다.
“…….”
……내가 너무 매정했나.
방금 전까지는 빠르게 사라지는 순대들이 거슬렸지만, 제 말 한마디에 군말 없이 바로 흡입을 중단하는 남자를 보니 왠지 모를 미안함이 올라왔다.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공연히 눈치를 준 것 같은 느낌.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좀생이였지?
제가 말해 놓고도 스스로 찔린 나머지,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
“아예 먹지 말란 말은 아닌데……. 더 먹어도 돼요.”
하지만 그는 전혀 생각이 없다는 듯 너그럽게 웃었다.
“이제 은수 씨가 다 먹어요. 난 많이 먹었어요.”
……하긴, 그 짧은 새에 게 눈 감추듯 많이 먹기는 했지.
그녀는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과식을 하는 건 누구에게든 좋을 턱이 없었다.
“그럼…… 뭐…….”
물론, 상시로 영양 보충이 필요한 임신부는 제외하고. 아기가 배고프다는데 시간 따위가 대수일까.
엄연히 경우가 다르다며 속으로 자위를 마친 은수는 죄책감 없는 표정으로 순대와 레몬을 다시금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배를 채웠을까. 어느 순간, 그녀는 봄 햇살처럼 따사로운 남자의 눈빛이 저에게로 고스란히 와 닿고 있음을 느꼈다. 먹는다고 바빠서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탈 없이 잘 먹고 있는지 유심히 보면서도 동시에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하는 게, 마치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 어미 새 같은 얼굴이었다. 이런 식으로 면밀하게 관찰당하는 느낌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나쁜 기분도 아니었다. 단지 낯이 좀 뜨거울 뿐.
씹던 순대를 꿀꺽 삼킨 은수가 헛기침을 했다.
“……먹는데 자꾸 쳐다보니까 민망하네요.”
“아, 보지 말까요?”
“보지 말라고 하면 안 볼 거예요?”
“아뇨.”
……그럴 거면 대체 왜 물어보냐.
은수의 반응엔 아랑곳없이, 현재는 엷게 웃으며 조용히 컵에 물을 따랐다.
“마시면서 천천히 먹어요.”
“네.”
안 그래도 막 목이 막히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얼씨구나, 하고 현재에게서 컵을 넘겨받으려던 순간, 그녀는 예기치 못하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쨍그랑.
맞물리지 못한 두 손 사이에서 미끄러진 유리컵이 그만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던 그녀가 컵을 확실히 붙잡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엄마!”
졸지에 은수보다 더 놀란 현재는 허락을 맡을 정신도 없이 은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 손을 감싸는 커다란 온기에 그녀가 본능적으로 몸을 새우마냥 움츠린 것도 그때였다.
“은수 씨 괜찮아요?”
“어, 어……. 네.”
“놀란 거 같은데, 다친 데 없어요? 안 베였어요?”
상처 난 곳이 없는지 그가 황급히 살피는 동안, 잔뜩 팽창된 은수의 눈에선 자그마한 지진이 일었다. 그에게 붙들린 손이 이상하게 홧홧했다. 또한 급박하게 콩닥대는 저의 심장 소리가 귓가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이건 아마도 사고 탓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