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51화 (51/128)

# 51

51. 프로 예비 아빠의 고충 (4)

“…….”

흐뭇하던 마음은 찰나에 사라져 버렸다.

웃음기가 가신 현재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당혹스러움을 애써 숨기며 되물었다.

“……왜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에게서 휴, 하는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해는 하지 마요. 알았죠?”

“…….”

“저번에 그 선물들도 그렇고…… 처음엔 별생각 없이 받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요. 정말, 너무너무 고맙지만…….”

한마디 한마디에서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아마도 최대한 상처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리라.

그의 입술은 일자로 꾹 다물렸고, 은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그때그때 사 먹을게요. 굳이 이럴 필요 없어요. 이렇게 많이 사 주는 건 현재 씨한테도 부담이고…….”

“부담 같은 거 아니에요.”

듣다 못한 현재가 은수의 말을 잘랐다.

제 사정을 배려해 주는 그녀가 물론 고마웠다. 하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그는 민은수라는 여자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내가 부담될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은수 씨가 부담돼서잖아요.”

“…….”

“맞죠?”

생각보다 더욱 직설적인 질문. 정곡을 찔린 은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도 모르게 깨물었다 놓은 입술이 붉었다.

그는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툭툭 내뱉는 재주가 있었다. 순한 인상과 다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가 영 호락호락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아예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물론 그런 부분도 있지만, 정말 부담될까 봐 그런 것도 있어요.”

솔직히 말해 그녀는 억울한 입장이었다. 다 자기 생각해서 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

“사회생활 처음 시작하면 돈 들어갈 데가 얼마나 많다고요. 나라고 신입 시절이 없었겠어요? 그때만 해도 난 돈에 꽤나 허덕였어요. 어쩌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서 생돈이 나가기도 했고……. 혹시 모르니까 목돈을 만들어 놓자고 다짐한 건 다 그런 기억 때문이구요.”

그보다 먼저 거쳐 온 세월이 벌써 까마득했다. 적어도 선배로서 도움이 되진 못할지언정 짐이 되기는 싫었다. 그건 그가 만약 자존심이 상한다 해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임신하고부터 돈 쓸 일이 많이 생긴 건 맞아요. 그래도 지금 나한테 이 정도 지출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사실 나한테도 적은 금액은 아니죠.”

“…….”

“나한테도 그런데 현재 씨한테는 오죽하겠어요?”

항변하던 그녀는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현재 씨가 나 생각하는 마음은 알아요. 근데…… 그냥 마음만 받을게요. 마음만으로도 진짜 고마워요.”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현재는 잠시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비참한 마음.

“…….”

넥타이를 꽉 조여 놓은 듯 속이 답답했다. 그녀에게서 군더더기 없는 진심이 느껴져 더 그랬다.

이 빌어먹을 간극은 어째서 좁혀지질 않는지. 저가 이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도.

조금의 정적 뒤, 현재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평소보다 다소 낮았다.

“은수 씨한테 쓰는 건 아깝지 않아요. 사회생활은 처음이지만 그 전부터 모아 둔 돈도 좀 있고,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

“내가 진짜 아까워하는 건 그런 게 아니란 걸 왜 몰라요.”

돈 같은 거야 얼마든지 벌면 그만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직 나이도 어리고 패기도 충만해서 그런지, 지금은 그런 데 미련도 딱히 없었다. 오히려 적은 돈이지만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뻤는데.

어차피 늘 저 혼자 신나서 했던 것이지만, 이럴 때마다 맘이 쓰린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은수 씨 눈엔 내가 아직 어리다는 거 알아요. 근데…….”

“…….”

“그래도 나한테 좀, 의지해 주면 안 돼요?”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는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도, 확실히 그 무게가 꽤 컸다. 외면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진실.

그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는 고작 초등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는 초등학생 티를 채 못 벗은 중학생이었고. 그녀가 처음으로 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그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했다. 그들은 언제나 다른 곳에 위치했다.

그것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든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인력으로 될 수 없는.

“…….”

“…….”

그래도 지금 우리는 이렇게 같이 있지 않은가.

애처로운 현재의 눈길이 은수에게 진득하게 닿았다.

“물론, 내가 은수 씨였어도 당연히 그랬을 거예요. 아직은 내가 미덥지 않겠죠.”

“그런 건 아니에요!”

얘기를 듣던 은수는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째 그녀의 생각보다 이야기가 너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제 말로 인해 그의 마음이 공허해질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이미 전에 없이 무거웠다.

“나이라는 장벽이 이렇게 큰 줄, 은수 씨를 만나고 처음 알았어요. 그런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

“아마도 내가 주제를 몰랐던 것 같아요.”

꼭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달리는 마라톤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정표가 없는 달리기는 선수를 서서히 지치게 하는 법이다. 지금 대강 어디쯤 왔다고, 이제 이 정도만 더 가면 끝이라고…… 어렴풋이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의 맘은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는 물속 같았다.

“항상 생각해요. 대체 언제쯤이면…… 당신이 날 믿고 온전히 기댈 수 있을까.”

“현재 씨.”

“요즘은 가끔, 내가 은수 씨보다 다섯 살이 많은 거였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

“그렇다 해도 난 은수 씨를 좋아했을 텐데.”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민은수에게 도현재는 철저한 ‘을’의 입장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고 그녀가 야속해도. 그건 그들의 나이 차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현재 씨, 난…….”

그래서 그는 오늘도 가까스로 웃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알았어요. 은수 씨가 날 믿게 하는 것도 어쩌면 내게 남겨진 몫일 테니까.”

“…….”

“은수 씨가 싫다고 하면 안 할게요. 그래도 이건 남김없이 다 먹어요. 알았죠?”

“…….”

알긴 뭘 알아. 하나도 모르면서. 은수의 눈빛이 이지러졌다.

사실은 말해 주고 싶었다. 나, 당신을 어리게만 생각하지 않는다고.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고 있다고. 사실 지금 내게 힘을 주고 있는 건 당신이 유일하다고.

그저 그를 더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은 거였다. 이미 그가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이제라도 그런 게 아니라고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북받친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눈빛이 상처 입은 사자 같아서일까. 어렵지도 않은 말이 목 근처에서 탁 걸려 나오질 않았다.

결국, 그녀가 겨우 내뱉은 건 별 볼일 없는 인사치레뿐이었다.

“잘 먹을게요…….”

“…….”

“정말.”

현재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진심을 오롯이 얘기하기란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어도 힘들 수밖에 없는 일이구나, 라고.

* * *

그날 이후, 은수는 회사에서 그를 만나도 약간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대화할 때는 평소와 같았지만 은근슬쩍 자꾸만 그를 피하는 게 어쩐지 그녀답지 않은 태도였다.

현재는 후회했다. 괜한 이야기를 했던 걸까. 내 이야기가 어쩌면 그녀로 하여금 부채감을 느끼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거였으면 차라리 이야기하지 말 것을. 감정에 휩쓸려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해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늘 조급한 건 현재이지 그녀가 아니었다. 내일은 그녀와 꼭 따로 시간을 가져야지. 밥을 먹든 차를 마시든. 그에게 있어 은수는 ‘생명수’와도 같아서, 하루라도 빠지게 되면 마음이 시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잠에 들려던 밤이었다. 불현듯 울린 전화벨 소리와 발신자의 이름은 피곤에 절어 있던 현재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내가 깨운 거예요?]

그 생각지도 못했던 통화의 주인공은 바로, 은수였다.

반사적으로 얼른 각을 잡은 현재는 숨죽인 상태에서 목소리를 최대한 고쳤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왜 전화했어요?”

[그게…….]

은수가 뜸을 들일 때는 분명 뭔가 있다는 징조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그녀의 수줍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렀다.

[순대가 먹고 싶어요. 지금. 너무너무.]

순대? 갑자기 웬 순대? 너무 뜻밖이라 자동적으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순대요?”

[네. 특히 순대 간.]

“…….”

[그리고 신 것도 먹고 싶어요. 레몬이나 귤 같은 거.]

시기상 맞지 않는 과일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그런 걸 구할 수 있을 턱이 있나. 무의식적으로 본 시곗바늘은 자정을 비슷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음. 무진장 서두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사다 줄까요? 집으로 갈까요?”

[어…… 음.]

약간 민망해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시간이 너무 늦긴 하죠?]

“아뇨, 전혀요.”

이 정도면 아직 한낮이지.

혹시나 시간이 늦다는 이유로 청을 취소할까 봐, 현재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정했다.

“지금 당장 갈 테니까 기다려요. 금방 갈게요.”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 초인적인 스피드를 내야 할 순간임을 그는 직감했다.

* * *

“자다 일어났는데, 갑자기 이게 너무너무 먹고 싶은 거 있죠.”

그녀의 앞에는 어느새 포장된 순대와 간, 레몬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젓가락을 든 은수는 야무지게 순대를 입 안으로 넣으며 웅얼거렸다.

“귀찮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침에 출근도 해야 되는데.”

재빠르게 움직인 현재는 겨우 40분 정도 만에 이 모든 것을 준비해 그녀에게 도착했다. 그녀가 저를 부른 것이 그저 기뻐서,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득, 아까 전 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맘이 어찌나 급했는지, 통화가 채 종료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는 성마르게 옷을 껴입었었다. 얼굴은 하회탈처럼 싱글벙글.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으니까. 그녀가 이런 식으로 먼저 SOS를 친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정말로 이게 너무너무 먹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그녀가 기꺼이 저를 부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분명, 며칠 전 일이 마음에 쓰였기 때문이었겠지.

진짜 이유는 그녀만이 알고 있었지만, 현재의 기분은 이상하리만큼 두둥실 떠올랐다. 이제야 정말로 아빠 노릇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기나 해요. 부족하면 더 사다 줄게요.”

“아니에요. 이것도 많아요.”

원래 손이 큰 건지, 아니면 그녀에 한해서 그런 건지. 그는 항상 모든 것을 한 아름 사다 바치곤 했다. 지금만 해도 순대 두 팩에, 큼지막한 레몬이 한 통째로 있었다.

“근데, 이거 다 어디서 났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