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50. 프로 예비 아빠의 고충 (3)
“괜찮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당사자는 딱히 내켜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그의 호응 여부 따위는 이 대리의 안중에 없었다. 그저 ‘이 가엾은 인간을 구제하고 말리라’는 일념에만 몰두해 있었으므로.
“내가 안 괜찮아. 현재 씬 잔말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알았지?”
“…….”
또 말투는 어찌나 단호한지. 엄연히 따지면 상사의 명령이기 때문에 거역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태도 자체가 너무나도 확고했다. 차마 싫다고 말하기가 미안할 만큼.
작정한 이 대리는 본격적인 계획을 짜기에 앞서 견적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업무 능력으로 인정받아 온 그에게 있어 모든 일의 첫 걸음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여자한테 제일 중요한 건 외모지. 팀장님도 어쨌든 여자니까, 못생긴 놈보단 잘생긴 놈을 좋아할 거 아냐.”
“…….”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현재 씨 외모는…….”
전문가같이 예리한 눈길이 현재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더니, 매우 흡족한 기를 띠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현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쳐다볼 뿐.
“뭐, 합격점을 훌쩍 뛰어넘으니까 됐고.”
“…….”
“성격도 현재 씨 정도면 차고 넘치지. 약간 어수룩한 게 흠이긴 한데, 영악한 것보다야 백배 나으니까. 팀장님이 원래 꾸밈없고 착한 사람 좋아하잖아.”
“…….”
그의 됨됨이면 제삼자 입장에서 보았을 때 충분히 희망이 있어 보였다. 누구든지 마다할 신랑감은 아니니까.
“흐음…….”
단, ‘나이’라는 거대한 약점만 빼면.
“근데, 너무 어리긴 하다. 서른둘에 스물일곱이라…….”
“…….”
“솔직히 내가 팀장님이었어도 많이 고민했을 거야. 다섯 살이나 어린 데다 신입이고, 직속 후배기까지. 뭐 하나 걸리지 않는 게 없잖아.”
“…….”
“혹시 현재 씨, 팀장님 앞에서 어린 티 낸 적 있어?”
이런 상황을 대비해 할 말을 미리 준비해 놓기라도 한 듯, 이 대리는 한마디 한마디에 거침이 없었다.
어째 저보다 더 열심인 것 같은 느낌. 졸지에 현재는 잠시 머뭇거렸다.
“…….”
“잘 생각해 봐. 있었어?”
또, 한편으론 조금 취조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현재는 엉겁결에 지난 기억들을 찬찬히 곱씹으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아뇨. 아마도 없는 것 같은데요.”
쭈뼛거리며 대답하기가 무섭게, 이 대리의 손가락에서 경쾌한 스냅 소리가 울렸다.
“그거 다행이네. 여자들이 연하남을 질색하는 게 바로 그런 거 때문이거든. 아무리 어른스럽다고 해도 은연중에 표가 안 날 수가 없으니까, 제일 조심해야지.”
“……그런가요?”
“그럼!”
아차.
지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던 그가 불현듯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덧붙였다.
“하긴 근데, 현재 씨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되긴 하겠다. 정신 연령이 이미 중년이잖아.”
“…….”
찌릿.
맘 같아선 반박을 하고 싶은데 양심상 그럴 수도 없다. 가자미눈을 하고 흘겨 봤자 타격감은 제로. 이 대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럼 대체 어떤 식으로 들이댔길래 아직까지 안 넘어오는 거지.”
……그 이유는 이미 말했는데. 그가 미처 잊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듯, 현재가 말했다.
“팀장님, 독신주의자라니까요.”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이 대리는 여전히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현재 씨 정도면 못 이긴 척 넘어가 줄 만도 한데……. 임신까지 했는데 아직도 짝사랑인 거면 문제가 좀 있는 거 아냐?”
남자 대 남자로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자 마련했던 자리는, 졸지에 ‘민은수가 왜 도현재에게 넘어가지 않는가?’를 놓고 토론하는 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시간이 이렇게까지 흘렀는데도 여전히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구름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아는 게 없어서 그녀의 맘을 감히 속단할 수도 없는 신세. 그러니 조용히 있을 수밖에.
“…….”
“…….”
두 남자 사이에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괸 이 대리는 고심하는 듯 제 턱을 슬슬 문질렀다.
그러다 일순 뭔가 알았다는 표정이 되었고, 현재는 그런 그를 그저 의아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임신!”
“……네?”
“팀장님은 임신하신 상태잖아.”
“……그렇죠?”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
쯧쯧. 짧은 새 생각을 정리한 이 대리는 명쾌한 해답을 내어놓는 양 거들먹거렸다.
“연애란 게 어려운 것 같아도, 막상 보면 게임하는 거랑 똑같아. 기본 베이스는 같은데 대상에 따라서 공략법이 조금씩 달라지는 거지. 지금 팀장님 심리 상태가 다른 여자들이랑 같겠어? 원래 임신을 하면 사람이 예민해지고, 괜히 생각도 많아지고 그러는데?”
말하는 본새가 마치 임신을 해 보기라도 한 듯한 뉘앙스였다.
“……이 대리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
무심코 튀어나온 현재의 질문에, 그가 잠시 할 말을 잃고 현재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래서 님이 이 꼴인 거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좋게 말하면 초짜 취급이고, 나쁘게 말하면 한심하다는 쪽에 더 가까운 눈빛이었다.
“현재 씨는 꼭 찍어 먹어 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알아? 척하면 척이지, 참. 거 답답한 사람이네.”
“…….”
아아.
그제야 살짝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 된 현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은수가 했던 행동과 말들을 생각해 보면 나름 일리가 있는 설명이기는 했다. 맘 같아선 그녀의 입장이 되어 공감해 주고 싶었다. 물론, 죽었다 깨어나도 제가 임신을 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무튼 좀 어려울 것 같긴 한데…… 차근차근 시작해 보자고. 부딪치면 뭐라도 얻는 게 있겠지.”
“…….”
“그럼, 기초부터 한번 시작해 볼까.”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진 이 대리의 목소리가 현재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했다. 뭔가, 진정 작당 모의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만의 아군이 생긴 탓일까. 어쩐지 든든해진 것 같기도 하고.
“현재 씨.”
“예?”
“임신한 사람한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지.”
“…….”
소처럼 느리게 끔뻑거리는 눈이 순박했다. 딱 봐도 모르는 눈치.
“왜, 몰라?”
“……어…….”
이놈은 드라마나 영화도 안 봤나. 그 쉬운 걸.
앞으로 가르칠 게 많겠군. 이 대리에게서 피식, 웃음이 새었다.
“허, 참. 뭐긴 뭐겠어.”
자고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당연히 음식 공수지!”
먹을 게 최고인 법이었다.
그 사람이 ‘임신부’라면 특히 더!
* * *
그것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무심코 앞을 내려다본 은수는 삽시간에 토끼 눈으로 변했다.
“이, 이게 다…… 뭐예요?”
생과일부터 시작해서 빵 종류, 몸에 좋은 채소, 군것질거리, 밥반찬, 그리고…… 가끔씩만 먹으라고 일부러 적게 준비한 듯한─그러나 사실 은수가 제일 좋아하는─ 즉석 식품 등. 현재가 펼쳐 놓은 식량들이 거실에 즐비했다.
이 정도면 거의 피난을 가도 될 수준의 사재기 아닌가?
그러나 잔뜩 놀란 은수와 달리, 이 많은 것을 가지고 온 사람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두고두고 먹으라고요. 이젠 입덧도 안 하고, 입맛도 좋아졌잖아요.”
그렇다. 요새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먹고 싶은 것들이 늘어나는 참이었다. 세상엔 맛있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좋아하던 것은 물론이고, 평소엔 거들떠도 안 보던 음식들이 무지막지하게 먹고 싶을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단것을 싫어하는 탓에 혐오 수준이었던 빵이나 케이크 같은 것들.
“……아, 아무리 그래도 이 많은 걸…….”
하지만 그렇게 먹고 싶은 게 많아도 그에게만은 절대 말하지 않았었다. 그를 귀찮게 하거나 책임을 지워 주기는 싫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치다니. 또 정말 신기하게도 눈앞의 음식들은 죄다 정확히 그녀의 취향이었다.
한참 동안 바닥에 꽂혀 있던 그녀의 시선이 곧장 현재에게로 향했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고마워요, 현재 씨. 잘 먹을게요.”
이 모든 것을 준비하느라 진이 빠진 게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 그는 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이는 모두 이 대리의 작품이었다. 그의 첫 번째 코치 사항.
‘임신한 사람 치고 먹을 거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 이제 입덧도 안 한다며? 딱 좋은 타이밍이네. 먹고 싶다는 건 다 사 줘.’
‘그런데…… 통 먹고 싶은 걸 얘기 안 해서요. 물어봐야 하나…….’
몰라서 안 사 준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데 뒤이어 나온 이 대리의 말은 그에게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아니, 현재 씨. 대체 그런 걸 왜 따지고 있어. 그냥 막 사다 바쳐! 아무거나 막 사다 주면 그중에 좋아하는 게 하나는 있겠지!’
그 말을 들은 현재는 홀린 듯 무릎을 탁 쳤다.
애초에 고민을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다 사 주면 되는 거였는데!
그것도 생각 못 한 과거의 난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이 대리에게 새삼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말해 대가 없이 저를 도와주려는 그가 응당 고맙기는 했지만, 근거도 없이 호언장담을 하는 게 뭔가 석연치 않았었다. 물론 그 불신에는, 그가 지금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한몫을 했다. 제 머리도 못 깎는 주제에 훈수를 두는 것이 가당키나 한지.
그런데……. 그런데!
머리로는 당연히 말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그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묘-하게 믿음이 가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그녀의 맘이 도통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선 밑져야 본전일 것만 같은 느낌.
이 대리의 예상과 다르게, 애석하게도 현재에게는 연애 경험이 좀 있었다. 하지만 관계를 이렇다 하게 진전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래서 줄곧 오래가지도 못했다.
그와 사귀었던 여자들에게는 하나같이 공통적인 의견이 있었다.
‘너는 너무 부담스러워. 너무 나에게만 목을 매는 것 같아.’
현재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타입이었다. 낯을 좀 가리기도 하는 탓에 누군가와 쉽게 친해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천성 자체가 따뜻한 편이라 대부분 그에게 호감을 가지며 다가왔고, 그러면 그도 그만큼 화답해 주려 노력했다. 그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그걸 고마워하거나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호감이 있는 것을 넘어 ‘사랑했던’ 사람들조차도.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나는 항상 진지했는데.
오랜 시간 고민하던 그는 은수를 좋아하고 난 뒤에야 어렴풋이 그 답을 깨달았다.
문제는 바로…… 저에게 남아 있던 ‘결핍’이라는 것을.
그것은 단순 애정 결핍과는 좀 다른 문제였다. 애정은 어머니와 형에게서 많이 받았지만…… 그는 그냥, 늘 사람이 고팠다. 지난번에 은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저와는 너무 다른, 밝고 선한 사람 같아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그늘을 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건 멀끔한 겉가죽일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발현된 결과가 다른 방향인 것이지, 실상 그도 은수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셈이었다. 어릴 적 상처를 입고 아직까지도 회복이 덜 된 너덜너덜한 마음은 여러 사람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그래도 상대방 쪽에서 먼저 이별을 고하면 그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후회 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떠나보낼 수 있었다. 아쉬움도, 눈물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만약 일생일대의 감정이어서 절대 놓칠 수 없는 상대였다면…… 어떻게 해서든 붙잡았을 것이다.
지금 그가 은수를 마냥 지고지순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늘 연애에 헌신적이었던 그조차도 누군가에게 이만큼 맹목적인 감정을 쏟는 건 처음이었고,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혹시, 은수 씨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어쩌지.’
내 행동이 부담스럽다거나 그런 거라면…….
결국 문제는 그 자신에게 있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면 모를까, 한없이 고전하고 있는 지금은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도 그녀의 맘을 얻지 못한다면 정말 아찔해질 상황.
그렇다면 이 대리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번 기회는…… 중대한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생기면 언제든 말해요. 뭐든 다 사다 줄 테니까.”
현재도 이 대리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먹을 것을 챙겨 주는 것은 생판 남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 배려는 괜찮겠지. 적어도 아이 아빠니까.
하지만…….
“근데, 현재 씨.”
“네?”
“정말 고마운데요…….”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덧붙였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요.”
그것은, 그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