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 프로 예비 아빠의 고충 (2)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사람들이 속속 자리를 뜬 포장마차 안은 눈에 띄게 조용해져서, 대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자, 현재 씨.”
“아, 예.”
그 안에서 이 대리와 현재는 어느새 한껏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주거니 받거니, 그간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풀고 있었다. 초반, 몸을 사렸던 현재로 인해 다소 딱딱했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르익었다. 무거운 이야기는 일단 뒤로 제쳐 두고 일상 이야기부터 천천히 시작한 덕분이었다.
넙죽 잔을 받아 또 한 번의 원 샷을 한 현재가 크으, 하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이 모습을 본다면 그 고생을 해 놓고 아직도 정신 못 차렸느냐며 타박부터 늘어놓을 것이 눈에 선했지만,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술을 마시는 것도 참 간만이어서 기분은 퍽 좋았다. 실로 오랜만에 모든 걸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현재 씨, 괜찮아? 안 취했어?”
“예. 괜찮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너무 많이 마시진 마. 술김에 나도 팰라. 저번에 보니까 무섭더라고.”
……농담인 건 알지만 뼈아프네.
이 대리가 부러 오버 액션을 하며 능청을 떨자, 현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잖아도 그날을 계기로 술이라면 무조건 자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후였기에, 오늘은 딱 감당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들이켠 상태였다.
하지만 주량이 센 편은 아니다 보니 눈이 풀리고 열이 오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화끈하게 올라오는 술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커다란 손이 얼굴 이곳저곳을 쓸었다.
그런 현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이 대리가 별안간 그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현재야.”
……어?
순간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현재는 스윽 고개를 들며 입술을 벌렸다.
뜻밖의 반말. 아니, 반말 자체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줄곧 저를 ‘현재 씨’라고 꼭꼭 높여 불러 주던 이 대리였기에, 뜬금없이 튀어나온 ‘야’라는 호칭은 현재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예? 방금, 뭐라고…….”
만날 애늙은이 같던 놈이 술을 멕여 놓으니 약간 귀여운 구석도 있네.
어안이 벙벙해진 신입이 우스워서, 이 대리는 흥흥거리며 웃은 뒤 대꾸했다.
“뭘 그렇게 놀래.”
“…….”
“솔직히 말해서 회사 안에서나 이 대리님이지, 바깥에서는 우리 몇 살 차이 안 나는 형, 동생이잖아. 별로 놀라울 것도 없고만.”
“…….”
그,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가 살짝 입술을 감쳐물었다.
친형인 현수에게서나 듣던 친근한 투를 상사에게서 듣는 것이 영 적응이 되지 않는 탓이었다.
그의 속내를 뻔히 아는 이 대리는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런다고 현재 씨까지 똑같이 안 굴어도 돼. 난 그냥, 좀 편해지고 싶어서.”
“…….”
“이제부터 나도 한편이라며. 한편이면 좀 가까워야지. 안 그래?”
현재의 동그란 눈이 이 대리를 응시했다.
방금 전 그의 말은, 그 스스로가 그들과 ‘한편’임을 에둘러 인정한 것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로 우리 편이 되어 주기로 했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외로운 존재가 아니구나.
말 몇 마디와 눈빛만으로도 현재는 그의 맘이 진심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살뜰히 신경 써 주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현재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띤 이 대리가 다시 한 번 병을 손에 들어 현재의 비어 있는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
“고작 스물일곱에, 나도 아직 못 된 애 아빠가 된 소감이 어때.”
질문이 영 생경했다. 여태껏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질문. 그야 물론 아무 데도 알리지 않았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득 그녀의 뱃속에서 고이 잠들어 있을 아기를 생각하자, 현재의 입가에 자동적으로 빙긋 미소가 걸렸다.
“아직 낳지도 않았는데요, 뭐.”
“그래도. 느낌이 좀 다를 거 아니야.”
“……느낌이요.”
글쎄. 아빠가 되는 느낌이라는 게 어떤 거더라.
물기 어린 소주잔을 문지르며, 현재는 벌써 까마득해진 그날을 떠올렸다. 은수의 임신 사실을 처음 알게 됐던 날. 그리고 제가 아기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날.
그녀와 짧고도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이미 그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완연한 아기 아빠가 되어 있었다.
막상 그에게 누군가를 ‘아빠’라고 불러 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름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맨 처음의 느낌이 어땠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애초부터 그렇게 태어나기라도 했던 양.
“…….”
아기가 그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
본래 어딘가에 제 맘을 토로하는 성격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껏 불가항력적으로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 마음은, 그 전과 다르게 구석에 고인 채로 계속해서 곪아 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티 내지 않고 애써 숨겨 놓는다고 했던 게, 가끔은 용암처럼 절절 끓기도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차라리 이렇게 된 게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적어도 홀로 속앓이하지는 않게 되었지 않은가.
그에게 모든 걸 구구절절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굳이 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이건 어차피 그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며 그저 하소연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마침내 천천히 대답을 내놓았다.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어요. 맨 처음 알았을 때요.”
“…….”
“실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기를 참 좋아했어요. 특히 여자 아기. 예쁜 여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거든요.”
물론 우리 부모님을 생각했을 때, 그런 기대 같은 건 과하게 무리였지만. 그의 입꼬리를 타고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길 가다 어린아이만 보면 정신 팔려서 쳐다보고, 그러다가 많이 혼나기도 하고……. 겉으로 말한 적은 없는데, 여동생도 있고 화기애애한 친구네 가족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전 한 번도 그래 보지 못했으니까…….”
“…….”
“그때부터 제 꿈은 명확했어요.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일찍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거. 당연히 예쁜 아기도 낳고요.”
“…….”
“어떤 사람은 겨우 그런 게 꿈이냐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저는 스물일곱밖에 안 된 주제에 벌써 꿈 하나를 이룬 셈이죠.”
현재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러나 그는 일관되게 담담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근데, 그렇게도 바라던 내 아이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팀장님이잖아요. 마냥 행복해요. 그 아이의 아버지가 다름 아닌 저라는 게.”
“…….”
“그러니까…….”
말끝을 흐리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은 좀 힘들어도 참을 겁니다. 임신한 사람은 더 힘들 텐데, 이 정도 기다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죠.”
“…….”
“저도 제가 이렇게 인내심이 강한 사람인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어요. 오히려 성질 급하단 소리를 더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
“이상하게 그 사람한테만큼은 한없이 느려지고 싶어요.”
이럴 수가.
그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이 대리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이거, 스물일곱의 사랑 치고 너무 애틋한 거 아니야?
하지만 그보다, 아직 풀지 못한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근데 왜 결혼을 못 한다는 거야. 아까 말한 그 짝사랑이라는 건 또 뭐고. 팀장님이 현재 씨 싫대? 어려서?”
맥없이 시선을 떨어뜨린 현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확히는…….”
“…….”
“제가 아니라, ‘결혼’이 싫은 거죠.”
잠시 그의 말뜻을 헤아려 보던 이 대리는 일순 얼굴을 팍 찡그렸다.
“뭐야. 설마 팀장님…… 독신주의였어?”
경험상 그의 침묵은 곧 긍정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독신주의자’를 임신시켜서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인가?
“허, 참. 없는 거 빼고 다 가지신 분이 왜 독신이 되고 싶어 하실까.”
이 대리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 초짜는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고른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어쩌다 팀장님 같은 분과…….
“뭐, 그래도 어떡해. 벌써 아기는 무럭무럭 크고 있는 걸. 독신은 이미 물 건너간 거잖아.”
“…….”
“그래서 현재 씨는, 계속 설득 중인 거야? 결혼하자고?”
음. 이걸 설득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 말이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설득은 아니고, 그냥 기다리는 중이에요.”
“기다려? 뭘 기다려?”
그래, 이건 설득이라기보다 그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었다. 무던히.
“절 받아들여 주기를요. 은수 씨가 스스로 맘을 열 수 있을 때까지.”
……이건 또 도대체 뭐라는 거야. 답답하다는 듯 현재를 보던 이 대리가 정곡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러다 안 열리면?”
“……안 열리면.”
“…….”
어…….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문 현재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글쎄요.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 봤는데.”
……쯧쯧. 이 가여운 중생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 대리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현재 씨, 솔직히 말해 봐. 연애 많이 안 해 봤지?”
“…….”
“아이고, 이 사람아. 그렇게도 여자를 몰라? 좋아하는데, 사랑하는데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서 되나. 방법을 써야지.”
“……방법이요?”
한꺼번에 고구마 백 개는 먹은 것 같은 기분. 복장이 터진 이 대리는 시늉까지 더해 가며 필요 이상으로 열을 올렸다.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만 있는데 감이 떨어지겠냐고. 나무를 흔들든, 전짓대를 가지고 오든!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닌데…….”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건만 그렇게만 치부되는 게 또 섭섭해서 현재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이 대리는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아직 갈 길이 멀었네, 멀었어.
“안 되겠다.”
“…….”
“현재 씬 지금부터 조용히, 내가 시키는 대로만 따라와.”
“예?”
“내가 현재 씨 연애 코치해 주겠다고. 나 이래봬도 연애에는 도사거든.”
“…….”
쳐다보기는 하는데, 어쩐지 못 미더운 듯한 눈빛.
사실, ‘그러신 분이 그 나이 먹도록 아직까지 혼자 사십니까?’라는 말이 목젖까지 도달해 있는 상태였다. 독심술사가 아닌 이상 그를 알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이 대리는 명불허전 눈치 백단이었다.
“딱 보니까 못 믿는데, 지금.”
“……아, 아닙니다. 믿습니다.”
“……진짜?”
“그, 그럼요…….”
어느 드라마 내용처럼, 속마음이 밖으로 들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좋아.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팀장님이 현재 씨와 결혼해야겠다는 맘이 들 수 있도록 내가 애써 볼게.”
……그, 그게, 이 대리님이 애쓴다고 딱히 될 것 같진 않습니다만…….
밑도 끝도 없는, 당최 거부하기 힘든 그의 자신감에 현재는 멍하니 이 대리를 쳐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