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48. 프로 예비 아빠의 고충 (1)
개인의 삶이 아무리 시끄럽다고 한들, 세상은 언제나와 같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법이다. 일련의 사건들을 뒤로한 채 월요일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더 피곤하네.
기실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몇 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젯밤 은수와 꽤 오랜 시간 통화를 한 뒤 잠든 그였으니까. 까무룩 잠들려던 새벽께, 뜬금없이 울린 전화벨에 현재는 적잖이 놀랐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두근거렸다. 이 사람이 웬일일까? 싶어서.
메시지를 선호하는 편이라 웬만해선 전화를 잘 걸지 않는 그녀였는데. 또, 남녀가 그런 야심한 시각에 통화를 하는 건 보통 밀어를 속삭이기 위함이지 않은가. 그는 적어도 굿 나잇 인사 같은, 달콤한 대화가 이어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은수 씨?’
‘어, 현재 씨 아직 안 잤네요. 다행이다.’
‘왜요?’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오지 말라고요.’
그건 확실히 달콤한 말은 아니었다. 다짜고짜 데리러 오지 말라니.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하기야 ‘밀어’는커녕 저를 ‘밀어’내려 애쓰고 있는 그녀가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전화를 걸었을 리는 만무했지만.
그녀가 전화를 건 이유는 알고 보니 일종의 비상 회의 요청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비밀을 공유하게 된 만큼, 새로운 주가 시작되기 전에 향후 거취를 놓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은 비상 회의였지만 현재에게 그 시간은 은수의 목소리를 맘 놓고 들을 수 있는 찬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 동안 꽤 고심한 듯 보였던 그녀는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으로 조심해야겠다며 앞으로 상호 유의해야 할 것들을 자분자분 일러 주었다.
물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욕심이 날이 갈수록 키가 자라났다. 또 아예 희망이 없으면 좀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미 누군가 앞에서 아이 아빠라고 인정받아 놓고 보니 더욱 속이 쓰린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뭐 어찌 됐건 가장 큰 결론은 매일 해 주던 카풀을 당분간은 못 하게 되었다는 것. 출근뿐만 아니라 퇴근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너무너무 싫었다. 그럼에도 일이 일파만파 커질까 두려워할 그녀가 걱정되었던 그는 마지못해 알았다는 대답을 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밝히는 편이 맘 편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시기상조란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하루빨리 그녀의 맘을 제게로 돌리는 수밖엔.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미 습관이 박혀 버린 탓에 약 한 시간이나 일찍 출근하게 된 현재는 속절없이 터져 나오는 하품을 손바닥으로 욱여넣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늦잠이나 좀 잘걸. 다른 팀원들이 전부 출근하기까지는 아직 30여 분이 넘게 남아 있었다. 이런 기세라면 점심때쯤엔 엄청난 잠이 쏟아질 것 같은데.
그래, 혹시 모르니까 미리 카페인을 좀 섭취해 놓자. 그 사람 앞에서 굳이 피곤한 티를 내고 싶진 않으니까. 뿐만 아니라 모닝커피 한 잔은 일의 능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마침내 결심한 그가 자판기 커피를 마실지, 아니면 1층 카페의 아메리카노를 마실지를 두고 프린터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현재 씨!”
예기치 못한 부름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자 저에게 다가오는 멀끔한 얼굴이 시야에 바로 들어왔다.
이 이른 시간부터 누구인가 했더니. 필요 이상으로 친근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요주의 인물 이 대리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 대리님. 일찍 오셨네요.”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토요일에 그 일이 있었으니 고작 이틀 만에 보는 얼굴.
근데 이 대리님이 원래 이렇게 일찍 출근하셨던가? 문득 생각한 현재는 속으로 갸웃거렸다.
“으응. 현재 씨도 굿 모닝.”
평소 같았으면 그의 얼굴이 그저 반가웠겠지만…… 은수와의 비밀이 까발려진 지금, 그를 보기가 껄끄러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사무적으로 짧은 목례를 건넨 현재는 곧바로 프린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괜히 그와 더 말을 붙였다간 저도 모르게 제 무덤을 파게 될 것 같아서. 앞으로는 아예 그와 대면하는 시간 자체를 거의 없게 할 참이었다.
그렇게 현재는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종이를 뱉어 내는 프린터를 말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했다. 왠지 모르지만 낯이 간지러운 게, 꼭 날파리 한 마리가 얼굴 근처를 윙윙 날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
현재는 그 알 수 없는 느낌의 원인을 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즉 제자리로 갔을 거라 생각한 이 대리가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여전히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졸지에 흠칫 놀란 현재는 순간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섬뜩하게 왜 저렇게 보는 거지?
그런 현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 대리는 한술 더 떠 그의 옆에 바짝 붙으며 소곤거렸다.
“현재 씨.”
“……예?”
“오늘 저녁에 따로 약속 없지?”
이렇게 묻는 것은 필시 저녁을 같이 먹을 요량으로 까는 밑밥일 터. 한데 왠지 모르게 감이 좋지 않았다. 없어도 있다고 해야 할 것만 같이.
그래도 정직 빼면 시체인 그가 상급자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도 현재는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잘됐네. 내가 저녁 사 줄 테니까 같이 나가자고.”
“오, 저도 가도 됩니까?”
그때, 갑작스레 튀어나온 또 하나의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갈랐다. 아침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는 현재의 동기 태섭의 것이었다. 혹시나 누가 들을세라 일부러 개미 같은 소리로 말했건만. 귀가 좋아 그걸 또 용케 들은 모양.
평소라면 흔쾌히 끼워 주었을 테지만, 오늘은 꼭 단둘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때문에 이 대리는 부러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미안해, 태섭 씨. 오늘은 내가 현재 씨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태섭 씨는 다음에 사 줄게.”
거절당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함께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태섭은 금세 눈에 띄게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이길래요. 두 분이서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시려고요?”
비밀 얘기라.
이 대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그래, 맞아.”
“……예? 그게 뭔데요?”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태섭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런 게 있어. 다 알면 그게 비밀이야?”
예의 의미심장한 얼굴로, 이젠 살짝 윙크까지 한다. 사고를 멈춘 현재는 할 말을 잃고 그를 쳐다보았다. 비밀 유지만 생각하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인 현재로서는 속내를 뻔히 알겠는 그의 행동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순간, 이 대리를 철석같이 믿는 것 같던 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대리는 괜찮을 거라고, 믿어 봐도 될 거라고 했는데.
‘……정말 괜찮을까.’
어쩐지…… 걱정스러운 걸.
호기심이 잔뜩 인 태섭의 얼굴을 보며, 현재는 말없이 억지 미소만 지었다.
* * *
토도독, 빗물이 천장을 두드리는 소리가 웅성거리는 소음들 사이로 섞였다.
“내가 진짜 헷갈려서 그러는데 말이야.”
“…….”
“현재 씨, 대체 팀장님하고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그날 저녁, 회사 근처의 포장마차는 비슷한 직장인들로 인해 무척이나 떠들썩했다. 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온 두 사람은 이제 간단한 안주 몇 접시와 함께 꽉 들어찬 소주잔을 각자의 앞에 놓아 둔 상태였다.
고개를 숙여 가며 이 대리의 말을 겨우 알아들은 현재는 잠시 주저했다. 이런 청문회가 열릴 거라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믿어 보기로 한 사람이라도, 이런 이야기를 내 맘대로 털어 놔도 되는 걸까.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완곡한 거부의 말투. 하여튼 그 나이답지 않게 신중하고 또 신중한 신입이었다.
이 대리는 표현을 고쳐, 유하게 구슬리듯 말했다.
“아니, 내 말은.”
“…….”
“결혼할 것도 아니라면서. 근데 팀장님은 임신까지 하셨고. 그럼 지금, 연애 중인 건가? 결혼 전제는 빼고?”
워낙 아는 게 없다 보니 이 대리는 제가 아는 정보 선에서 그들의 관계를 정립했다. 현재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렀다.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들으니 그들은 정말로 모호한 사이였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없는, 단추를 잘못 꿰어도 한참 잘못 꿴 관계. 술을 들이켜지도 않았는데 입술 끝이 씁쓸했다.
“……연애라기보다는, 짝사랑이죠.”
“뭐?”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 이 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짝사랑인데 어떻게 애를 가져?”
그러게요.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 테지만 사실이 그러니 뭐라 답할 수도 없다. 말의 힘이란 참 무서운 것이어서, 다 알고 있었기에 새삼스러울 거 없는 사실임에도 마음을 허해지게 만들었다.
현재가 그 말을 끝으로 계속해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통에, 이 대리는 당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얼굴을 찌푸렸다.
“현재 씨, 자세히 좀 말해 봐. 답답해 죽겠어!”
“…….”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다고 말은 했는데, 이건 뭐 내가 아는 게 있어야 방패막이가 돼 주든 할 거 아냐.”
그날 집으로 돌아간 뒤, 그는 한참이나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했다. 그들을 물심양면 도와주기로.
고작 스테이크 따위를 얻어먹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게 없었어도 그는 기꺼이 비밀을 지켰을 것이다.
임신을 하고, 아이 아빠가 현재라는 것을 지금까지 숨겨 온 데는 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터였다. 제가 겪어 본 탓에 사내 연애 자체도 험난하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거기다 임신까지 했다니. 순탄히 결혼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같은 팀원으로서, 또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돕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꼭 딸, 혹은 아들을 시집 장가보내는 아버지의 마음 같기도 했다. 그날 목격한 두 사람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지켜 주고 싶은 한 쌍이었으니까. 아직까지는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 커플.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엮어 대는 망상 분자의 마음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관망만 하는데도 이렇게 뿌듯하니.
“…….”
그러나 꾹 다문 현재의 입술에서는, 가만히 있어선 답을 해 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풀풀 풍겨 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를 포장마차로 데리고 온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대리는 호기롭게 제 술잔을 먼저 들어 보이며 건배를 제의했다. 일단 술이 들어가면 사람은 솔직해지는 법이다. 왜,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일단 마셔. 마시고 천천히 얘기해 봐.”
“…….”
술잔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현재의 눈빛이 오늘의 날씨마냥 흐렸다. 그에 반해, ‘쨍’ 하고 부딪치는 잔의 소리는 무척이나 맑았다. 왠지 오늘 밤은 긴긴밤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