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47화 (47/128)

# 47

47. 내 사과를 받아 주세요 (5)

“짠. 놀랐죠?”

다름 아닌 레고 세트였다.

한때 레고 덕후였던 그답게, 현재는 그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은수 씨……?”

“어때요? 맘에 들어요?”

유명 만화 영화와 콜라보로 제작된 듯한 그것은 그가 어렸을 적 갖고 놀았던 것보다 몇 배 더 크고, 몇 배 더 멋있는 외관을 하고 있었다.

27년을 살며 한 번도 갖지 못했던 초대형 레고 세트를 내려다보며 현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뭘 줘야 할까, 고민 많이 했어요. 남자 선물 고르는 거 나름 많이 해 봐서 자신 있었는데…… 현재 씨한테는 뭐가 어울릴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

“근데 그때, 현재 씨가 이걸 좋아한다고 했던 게 번뜩 떠올랐어요.”

……내가 그랬었나?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데, 때마침 묻혀 있던 영상 하나가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랑 되게 사이가 좋은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하루는 아빠랑 레고 같이 맞췄다고 자랑하더라고요. 그게 조금, 부러웠던 거 같아요.’

‘……레고요?’

……아아, 그날이었구나. 서로의 비밀을 공유했던 그날. 늦게야 기억이 났다.

꽤나 힘들게 고른 선물인지, 레고 세트를 내려다보는 은수의 얼굴에 흡족함이 감돌았다.

“딴 거였으면 좀 쉬웠을 텐데, 왜 하필 내가 잘 모르는 걸 좋아해 가지구. 이거 고르느라 내가 얼마나 애먹은 줄 알아요?”

“어떤 게 재밌는 건지 알아야 고르지…….” 하고 중얼거리는 모습에선 쑥스러움과 생색이 동시에 묻어나기도 해서, 현재는 그만 푸스스 웃고 말았다.

“레고면 다 좋아해요. 고마워요, 은수 씨.”

세상에 남자에게 이런 걸 다 선물하는 여자가 있을까. 그렇게 잠깐 지나가듯이 한 말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 벅찬 감동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현재는 그저 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별안간, 은수가 그의 손에서 레고 세트를 홱 빼앗아 갔다. 뭔가 조건을 걸려는 것처럼.

“그치만 줬다고 바로 냉큼 맞추지 말고, 기다렸다가…… 나중에 같이 맞춰요.”

“……같이?”

“……우리 아기하고요.”

아……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다니.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꼬물거리는 아이와 제가 레고를 함께 맞추는 광경이 절로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성동구 최고의 팔불출이자 사랑꾼인 현재는 이런 순간에조차도 제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감탄해 마지않고 있었다. 물론 속으로.

“근데, 혹시 딸이면 어떡해요?”

“……왜요? 뭐 문제 있어요?”

아직은 김칫국 마시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만약 딸이 태어난다면 걱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은수가 선물한 레고 세트의 주인공은 보통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로봇 캐릭터였으니까. 이건 아무래도…….

“주로 남자애들이 맞추는 거라서요. 여자애들 거는 따로 귀여운 거 있는데.”

문득 현재는 딸을 바라는 저와 달리, 그녀는 아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무슨 소리예요. 그거 성차별인 거 몰라요? 레고가 다 똑같은 레고지, 남자애들 거, 여자애들 거 따로 있는 게 어디 있어요. 여자애들도 이런 거 얼마든지 좋아한다고요.”

대번에 발끈한 은수는 현재의 발언을 문제 삼고 나섰다.

“……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게도 오해할 수 있겠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덕분에 그는 그녀의 생각이 언제나 남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성으로서의 애정을 떠나, 참 배울 점이 많은 사람.

“은수 씨 말이 맞아요. 실수했네요, 내가.”

“괜찮아요. 알면 됐어요.”

“그나저나 그럼,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죠. 참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런가…….

현재의 푸념 아닌 푸념에, 레고 세트를 소중히 안고 있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긴, 선물로 준 건데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좀 그렇지. 지금 뱃속에 있는 아기가 레고를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크려면 또 한참 걸릴 텐데.’

……그래. 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그냥 맞추라고 하자.

맘속으로 재차 결론을 내린 은수는 기껏 빼앗은 레고 세트를 그의 품에 다시 턱 떠안겼다.

“그럼…… 먼저 맞추든가요.”

“…….”

“그때 가서 딴 거 새로 사면 되니까.”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현재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반색했다. 어째, 방금 전 선물을 받을 때보다 더 기쁜 것 같은 얼굴로.

“정말요? 또 사 줄 거예요?”

“……원한다면요.”

앞으로 이런 버릇을 들이면 좀 곤란한데.

하지만 그가 생각보다 너무나도 기뻐하는 바람에, 안 사 주고 싶어도 안 사 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진짜 고마워요. 잘 간직할게요.”

뻔하고 흔한 것은 싫어서 매우 심사숙고하며 고른 선물이었는데, 이 정도로 좋아하는 걸 보니 고민했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나도 다음에 누군가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이렇게 격한 반응을 해 주어야지.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선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곧바로 잊고 있던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맞다. 꽃!”

“네?”

“오늘 현재 씨가 준 거요!”

오늘 영화를 보기 전, 그에게서 받았던 꽃 선물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빨리 차 뒷좌석으로 가서 꽃다발을 꺼낸 그녀는 잊고 있었던 것이 민망해 괜히 꽃다발의 매무새를 정리하는 척했다.

장미 향기가 이렇게 진동을 하는데 이걸 어떻게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어휴, 하마터면 놓고 내릴 뻔했네.”

“괜찮아요. 꽃이야 진짜 또 사 주면 되는 건데.”

“그래두요. 처음으로 받은 건데 가져가야죠.”

어쩌다 보니 사이좋게 현재는 레고 세트, 은수는 꽃다발을 각각 품에 안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허공에서 얽히는 눈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는 달빛만큼이나 따스했다.

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가 불쑥 물었다.

“흰 장미 뜻이요, 뭔지 가르쳐 줄까요?”

아깐 인터넷에 쳐 보라고 하더니 웬일이래.

덕분에 다시 궁금증이 도진 은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작게 미소를 지은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존경’이에요. 물론 다른 뜻도 있지만, 난 그걸 생각하고 준 거예요.”

“…….”

“내가 예전에 말했었죠. 팀장님, 참 멋있는 여자라고. 그땐 뭣 모르고 한 말이었지만, 은수 씨를 알면 알수록 정말 사실인 것 같아요.”

“…….”

“은수 씨같이 존경스러운 사람이 나한테 와 줘서, 그리고 내 아이의 엄마가 돼 줘서, 진심으로 행복하고 고맙다고…… 언젠가는 꼭 말해 주고 싶었어요.”

“…….”

……아,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뭉클했다.

이제껏 이렇게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남자를 전혀 안 만나 본 것도 아닌데, 유독 이 남자는 은수를 혼란스러움 속에서 헤매게 만들곤 했다.

그래서일까. 함께 있는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은수는 현재가 무서워졌다. 이러다 정말 큰 후회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아직 현재 씨한테 간 거 아니거든요?”

“…….”

“……내, 내가 언제…….”

……당신한테 갔다고.

그러나 이제 은수에 한해 인이 박여 버린 현재는 능청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

“‘아직’이란 건, 나중엔 올 수도 있단 소리네요?”

……그, 그게 그렇게 되나……?

남자의 재기 어린 물음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질 뻔했지만, 은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몸을 꼿꼿하게 폈다. 이 남자 앞에선 한시라도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되었다.

“아, 아무튼! 착각은 금물이에요.”

“…….”

“선물 줬으니까, 이제 빨리 가요.”

무드라곤 약에 쓰려도 없는 여자의 마무리는 꼭 이런 식으로 투박했다.

“알았어요.”

그는 담백하게 웃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는 듯했다. 그러나 은수가 잠시 방심하던 그때, 일이 벌어졌다.

현재의 입술이 은수의 동그란 이마 위로 ‘촉’하고 붙었다 떨어진 것이다.

“……!!!”

곧장 홍옥처럼 변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현재는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갈게요. 잘 자요.”

……이러고 가면서 잘 자라는 건 뭐야?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

요새는 마음이 오뚝이처럼 자꾸만 갈팡질팡했다.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마음이었는데.

차의 엔진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그녀의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끈질기게 손을 흔들던 남자가 저 멀리 사라져 버린 후에야, 은수는 작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잠깐 머물다 간 이마가 마치 불에 덴 양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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