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46. 내 사과를 받아 주세요 (4)
“……배요?”
의아해진 이 대리가 묻자, 은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우린 이제부터 한편인 거라구요. 안 그래두 든든한 우리 편이 하나 필요하던 참이었거든요.”
“…….”
가만, 이거 좀 이상한데.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이 대리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난 그냥 밥이나 한 끼 얻어먹으려고 온 것뿐인데, 갑자기 왜…….’
영 석연찮은 것 같은 그의 표정에도 은수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한편이 되는 거면 당연히 비밀 유지가 필수겠지만. 뭐, 이 대리는 믿음직한 사람이니까 각서 같은 것까지 쓸 필욘 없겠죠.”
“…….”
“자세하게 설명하긴 힘든데, 당분간 나와 현재 씨 사이는 누구도 알아선 안 돼요. 적어도 우리가 먼저 밝히기 전까지는요. 그래서 이 대리의 역할이 중요한 거구요.”
“…….”
“어려울 건 없어요. 평소엔 그냥 모른 척하고, 만약에 누가 의심 같은 걸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둘러대 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 건 이 대리 전공이잖아요.”
“…….”
……아.
그제야 은수의 말뜻을 알아들은 이 대리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스테이크를 눈앞에 두고도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말만 점잖을 뿐, 풀어 말하면 즉 직원들을 상대로 뻔뻔하게 사기를 치라는 것 아닌가! 물론 금전적인 이윤 같은 걸 얻는 건 아니라고 해도…… 그런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할 자신은 없었다.
역시, 이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 내가 왜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막심한 후회가 밀려오려고 했다. 혹시 나중에 덤터기나 쓰지는 않을는지.
“저…… 그래도 만약에 누가 알기라도 하면…….”
그의 소심한 목소리에, 은수는 걱정 붙들어 매라는 듯 눈을 번쩍 떴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나랑 현재 씨도 더 조심할 거니까. 그치만 그렇게 했는데도 소문이 난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그땐 피장파장으로 갈 수밖에요.”
“…….”
“암튼 난 전혀 걱정 안 해요. 차라리 이 대리한테 들키길 잘한 것 같아.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후…….”
“…….”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잖아요. 알죠?”
……음. 믿는다는 말이 이렇게 협박같이 들릴 말인가.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그녀가 벌려 놓은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느낌이 들었다. 끈끈이주걱 안으로 말려들어 가고 있는 듯한 기분. 찝찝함이 온몸을 감쌌다.
“……그, 그럼요.”
“…….”
근데, 이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날 이렇게나 믿는다는데?
은수는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방긋 웃고 있었다. 막중한 부담감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조용히 고민하던 그는 이윽고, 은수가 기대했던 대답을 마지못해 내어놓았다.
“감사합니다, 믿어 주셔서…….”
“…….”
“앞으로 힘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은수의 먹잇감이 된 가여운 이 대리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자, 넘어왔어!’
게임 끝. 우리 편 만들기는 일단 성공인 것 같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 사살까지 마치고 나자 그녀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임기응변이랄 게 뭐 따로 있나. 이런 처세술이 다 그런 걸로 통하는 거지.’
옛말에 배워서 남 주는 것 아니라더니 정말이었다. 온갖 꼴 다 보면서 온몸으로 체득했던 사회생활의 산물들을 이렇게 남김없이 다 써먹고 있는 걸 보면.
회심의 미소를 지은 은수가 특유의 큰 눈을 반짝거리며 생글거렸다.
“이거, 모자라지 않아요? 하나 더 시킬까요?”
* * *
“……정말 괜찮을까요?”
이 대리를 배웅한 뒤 은수의 집으로 향하는 길, 운전대를 잡은 현재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주어는 없었지만 그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은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을 거예요.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은근히 입이 무거운 사람이거든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무조건 잡아뗐죠. 이 대리니까 솔직히 말한 거지.”
“…….”
“이 대리는 진짜 믿어 볼 만한 사람이고, 또 우리한테 엄청 힘이 돼 줄 거예요. 내가 보장할게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현재도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눈빛을 보냈다.
신입 사원 신분이다 보니 그를 안 지 오래된 건 아니었지만, 현재도 은수의 말에 동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어쩐지 다른 사람들보다 의리가 있어 보였다. 최근의 한 팀장 사건만 해도 그가 저를 수렁에서 꺼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설사 그가 그렇지 않다 해도 어차피 다 까발려진 일이다. 이제는 그저 그가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근데, 아무리 상대가 이 대리님이라지만…… 좀 놀랐어요.”
“…….”
“그렇게 갑자기 밝혀 버리실 줄은…….”
하긴,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저질러 버렸으니 이 남자 입장에선 이게 웬일인가 싶었겠지.
밀려드는 쑥스러움을 감추며 은수는 애써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야, 뭐…….”
“…….”
“이번 기회에 현재 씰 아빠로 인정받게 해 주고 싶어서요. 지금까지 어디다 제대로 말도 못 했잖아요. 현재 씨도 아기한테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다면서요.”
“…….”
“나도 그냥…… 현재 씨한테 예의를 지킨 것뿐이에요.”
너무나 급작스레 튀어나온 탓에 단지 즉흥적으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이런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니. 어떻게 보면 참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막 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깊은 뜻이나 고민이 들어 있다고 해야 할까. 민은수는 항상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가끔 보통 사람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사고와 행동을 보여 주는데, 또 그런 부분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게 탈이다. 바로 그런 면 때문에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제가 말해 놓고도 부끄러운 건지 뻣뻣하게 앉아 있는 은수를 힐끔 쳐다본 현재가 씩 웃었다. 이 여자와 살면 바람 잘 날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마냥 행복할 것만 같다.
“아무튼, 오늘 영화 보러 가길 잘한 것 같네요. 은수 씨 우는 것도 보고.”
……이 대리를 신경 쓰느라 미처 잊고 있었던 사실. 영화관에서의 일을 상기한 은수가 으헉, 하고 괴성을 냈다.
“당장 잊어버려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왜요, 귀엽던데.”
“귀엽긴 뭐가 귀여워요. 귀여운 거 다 죽었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귀여운 줄 모르는 걸까. 샐쭉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자 현재는 웃음이 픽 새었다.
임신 덕에 감수성이 예민해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 내용에 펑펑 울 정도면, 작정하고 슬프게 만든 영화엔 통곡을 할 것 같은데. 다음에 한번 보여 줘야지. 놀리는 재미,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듯하니.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지만, 야속하게도 집에 너무 일찍 도착해 버렸다. 현재는 애써 아쉬움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은수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했어요, 오늘. 들어가서 푹 쉬어요.”
“네.”
그런데 차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녀가 돌연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아차.”
“……왜요? 뭐 잊은 거 있어요?”
아까 식당에 뭔가를 놔두고 온 건가.
현재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던 은수가 금세 들뜬 얼굴을 했다.
“현재 씨, 가지 말고 잠깐만 있어 볼래요?”
“왜요?”
갑자기 엄청난 재미거리를 떠올린 듯 표정이 잔뜩 신나 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서른두 살 먹은 여자가 맞나 싶은데.
“그런 게 있어요. 잠깐 기다려요. 알았죠?”
“네……?”
그러고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부리나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왜 저러지?’
최고 결정권자의 분부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버린 현재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은 약 10분 남짓이 지난 때였다. 차를 주차장에 대고 나와 건물 앞에 서 있던 현재가 바쁘게 내려오는 은수를 반겼다.
“빨리 나왔네요.”
“어? 왜 나와 있어요. 안에서 기다리지.”
“답답해서요.”
“아아.”
그런데 그녀의 몸짓이 평소와 다르게 다소 어정쩡했다. 양팔을 뒤로 쭉 빼곤 뭔가를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근데, 뒤에 감춘 건 뭐예요?”
그걸 벌써부터 말해 주면 재미없지. 조금 뒤 현재의 얼굴을 상상하며, 은수가 속으로 키득거렸다.
“현재 씨.”
“…….”
“나한테 화난 거, 아직 덜 풀렸죠?”
내가 며칠 동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간 그를 섭섭하게 했던 것을 만회할 찬스, 바로 지금이었다.
그런데 잠시 뒤, 현재에게서 나온 대답은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는 은수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뇨. 화 안 났어요.”
엥? 뭐야.
“……진짜요?”
“화난 적도 없었어요.”
“……에이, 거짓말.”
“진짠데.”
“내가 거짓말하고 그래서 화났었잖아요……?”
“그건 잠깐 기분 상했던 거지, 화난 건 아니었어요.”
……어라, 이게 아닌데……?
나름대로 생각해 놓은 게 있었기에, 그녀는 제 맘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이 답답했다.
뭐, 정 아니라고 하면 내가 ‘기’로 만들면 되는 거긴 한데.
“……그러지 말고, 화났다 그래 봐요.”
“예?”
“엄청 화났으니까, 빨리 풀어 달라고 그러라고요.”
……이건 또 무슨. 현재에게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화가 안 났는데 왜 화가 났다 그래야 돼요.”
“아, 하여튼! 그런 게 있으니까. 빨리요.”
또 뭘 준비했기에 이렇게 성화인지.
정성이 갸륵해 넘어가 주는 셈치고, 현재는 짐짓 인상을 썼다.
“나 화났어요. 빨리 풀어 줘요.”
누가 봐도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걸 알 만한 얼굴이지만, 아무렴 어때.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두둥실 떠오르더니 이어서 커다랗고, 납작하고, 네모진 무언가가 현재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자요.”
인상을 쓰느라 가늘어져 있던 현재의 눈이 금세 동그래졌다.
“……이게 뭔데요?”
“화해의 선물이요. 아, 화해의 선물이라기보단 사과의 선물인가?”
현재의 시선이 의문의 물건을 재빨리 스캔했다. 선물을 주는 것까진 좋은데, 무슨 선물이 이렇게 큰 걸까.
“……뭐가 든 거예요?”
저를 쳐다보는 여자의 얼굴이 무척 뿌듯한 듯 상기되어 있었다.
“뜯어 봐요.”
미심쩍은 얼굴로 그것을 몇 번 흔들어 보던 현재는 천천히 리본을 풀고, 정성스레 되어 있는 포장을 뜯어내었다.
마침내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물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