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45. 내 사과를 받아 주세요 (3)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있다.
물론 무지막지하게 기다란 꼬리인 건 맞았지만, 있는 힘껏 똬리를 틀어 여간해선 보이지 않게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맞은편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스테이크를 질겅거리고 있는 이승환 대리를 보고 있자니 은수는 제 생각이 아예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바닥은 넓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좁았다. 그리고 애석하지만, 은수와 현재를 포함한 회사 사람들의 행동반경은 거기서 거기였다. 사실상 언제 들킨들 놀랍지 않았을 상황. 무엇보다 옆에 앉은 이 남자가 애초부터 이 이상야릇한 사이를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었으니 오늘이 아니라도 빠른 시일 내에 탄로 날 일이긴 했다.
그러게 조심 좀 하라고 했건만. 이렇게 맥없이 들통나 버렸다는 게 은수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오늘 일은 딱히 현재를 탓할 것도 아니라서 더 통탄스러울 노릇. 결국 속이 터지는 건 부푼 배를 감싸 안고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그녀뿐이었다.
운이 없어도 어쩜 이렇게 없을까.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른 척 우겨 보기라도 했을 텐데. 이렇게 되면 이제 문제는 이 대리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이었다.
“이 대리.”
“예?!”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도 화들짝 놀라는 모양이 퍽 요란했다. 얌전히 고기 한 점을 꼭꼭 씹고 있던 현재도 덩달아 은수를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요.”
“……아, 아뇨. 그냥…….”
“맛있어요? 입에 맞아요?”
“……예. 맛있습니다.”
당연히 맛있어야지. 내가 얼마나 큰맘을 먹고 온 건데.
왜 굳이 여기로 온 것인지는 그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비싼 식당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었는데 막상 와 놓고 보니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칸막이로 나눠져 있어 이야기 나누기에도 좋고, 각 테이블의 조명도 적당한 데다 음식 맛도 좋았다. 결정적으로 ‘헉’ 소리 나오게 비싼 가격! 구멍이 날 금전 사정을 생각하면 맘이 아팠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발설치 못하도록 초특급 입막음을 해야 하는데 이 정도 투자가 대수일까.
한 시간 전, 영화관에서 불행히 마주친 그들은 잠시간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왜 하필 하고 많은 영화관 중 거기서 만나게 된 걸까. 우리나라에 극장 브랜드가 몇 개고 거기서 또 지점은 몇 개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약한 운명의 장난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지.
그러던 중 은수가 가까스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고, 그녀는 배가 고프지 않느냐며 무작정 현재와 이 대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대리는 답지 않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이제 이걸 어쩐다.
깨작대고 있는 이 대리를 마뜩찮게 바라보고 있던 은수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저기, 있잖아요.”
“……예?”
“…….”
일단, 상황을 설명하는 게 급선무일 텐데.
그런데 무슨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게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그녀와 현재는 사귀는 사이도, 결혼할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말 그대로 ‘애매’한 사이.
그녀가 임신한 상태라는 게 공공연히 알려진 상황에서, 아까 전의 데이트─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대리에겐 그렇게 보였을 테다.─는 그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주었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총각 신입 사원과 미혼모 팀장의 밀회’ 같은 걸로 비친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쁠 일이었다. 엄연히 아이 아빠와의 정당한 만남인 것을.
어떻게 말을 해야 그나마 수습이 될까. 서두를 뭐라고 꺼낼지 고심하는 은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
“…….”
“음……. 그러니까, 오늘 일은…….”
“저, 이 대리님.”
그런데 그녀가 겨우 내놓은 말을 현재가 싹둑 자르며 들어왔다.
얼떨결에 선수를 빼앗긴 은수는 저도 모르게 현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흔들림 없이, 대각으로 앉은 이 대리 쪽만을 진지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그렇게 하시겠지만…….”
“…….”
“제가 오늘 팀장님과 따로 만난 건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회사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팀장님이 곤란해지실 테니까요.”
어라. 아까부터 내내 조용했던 남자가 이런 식으로 재빨리 치고 들어온 것은 그녀로서도 상당히 의외였다.
눈치로 보아 이 대리도 은수와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흐리멍덩한 얼굴로 현재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어. 그럼! 당연하지.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야. 걱정 마.”
“……고맙습니다.”
그 말과 함께 정 가운데 놓여 있던 파스타 접시가 이 대리 쪽으로 치우쳤다. 현재가 밀어 준 덕이었다. 하지만 그의 호의 어린 행동에도 이 대리는 금방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이 자리가 너무너무 불편한데, 그러면서도 대체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 그런 그를 은수가 모를 리 없었다.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새내기 시절부터, 그녀가 이 대리를 알아 온 시간만 장장 몇 년이었던가.
피차 성정을 잘 아는 건 이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엔 온화하다가도 심기에 거슬리는 일엔 곧바로 불같아지는 그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사람이었다. 섣불리 나서다 큰코다치는 이를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지.
그럼에도 이건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은수의 뒷담화를 하던 한 팀장을 쥐어 팰 때부터 진작 무언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지만 현재의 일방통행이라 생각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설마, 쌍방통행이었던 것일까.
잠자코 배만 채우고 빠져야겠다고 맘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지만 결국 참지 못한 이 대리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몰라. 너무너무 궁금한데 어쩌라고!
“……근데요, 이런 거 묻는 게 예의가 아닐 수도 있는데……. 흠흠.”
“…….”
“두 분……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
“아니, 유난히 가까운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생각보다 더 가까운 것 같아서…….”
“…….”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거니까! 절대, 절대 부담 가질 필요는 없고요.”
혹시나 기분이 나쁘기라도 할까, ‘절대’를 여러 번 강조하며 지레 손사래 치기까지.
드디어 올 게 오고야 만 것을 직감한 은수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감수하기로 한 일인데도 이런 상황은 늘 힘들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현재와 은수는 잠시 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아무 사이도 아닙…….”
그러나 이번엔,
“……아이 아빠예요, 현재 씨가.”
얄궂게도 은수가 현재보다 약간 더 빨랐다.
‘뭐, 뭐라고?’
신기하게도 그 순간, 식당 안을 유유히 감돌고 있던 팝송이 뚝 멎었다. 그러나 셋 중 누구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그녀의 엄청난 대답에, 현재와 이 대리 모두 입을 떡 벌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은수 덕에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한 현재는 더더욱 놀란 채였다.
“……팀장님……?”
지금 이 여자 뱃속에 들어앉은 아이가 바로 나의 아이라고, 우리 두 사람이 만든 소중한 결실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을 얼마나 소원하며 기다렸는지, 그 간절함은 정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른 남자니 뭐니 하며 사람들이 오인하는 걸 보면 속이 쓰리지만 조바심 내지 않고 무던히 인내하다 보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날이 오리라고,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바로 지금, 그날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스스로를 통해서.
“……그, 그게 사실입니까?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가히 엄청난 충격. 말 잘하는 이 대리가 이토록 말을 더듬는 걸 보면 그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 만했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와 버린 진실에 당사자 은수조차 당황으로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은수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그녀의 눈길이 문득, 잔뜩 커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현재를 향했다.
“…….”
“…….”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눈빛이 오갔다.
그 상태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굳어 있던 현재는 은수의 엷은 미소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해빙될 수 있었다. 당황, 놀람, 혼란스러움 등이 다양하게 혼재된 얼굴. 그러나 그건 확실히 기쁜 표정에 가까웠다. 오히려 약간 감격한 것 같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그녀도 방금 전 자신이 굉장히 충동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한때는 영영 밝히지 않을 생각까지 했으면서, 대체 왜?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아도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글쎄,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얘기하고 싶었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구질구질하게 변명하거나 어쭙잖게 둘러대기가 싫어서.
이미 여러 번 남자를 서운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아직 맘속 응어리가 다 풀리지 않았을 테다. 그걸 잘 알고 있는 탓에, 한구석에 있던 부채감이 그녀의 맘속 어딘가를 툭툭 건드렸던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 저절로 알게 될 수도 있다는 변수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확실히 이렇게 된 이상 사실을 밝히는 게 옳았다. 아이의 아빠인 그를 존중해 주기로 한 건 이런 부분에서도 유효한 거니까.
한편, 얼빠진 얼굴이 된 이 대리는 황급히 상황 파악에 나섰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느 사이에 그렇게…….”
“…….”
“설마설마 했는데. 그럼 두 분, 결혼하시려고요?”
역시, 그놈의 결혼 얘기는 빠질 때가 없네.
은수는 은근슬쩍 현재의 눈치를 보며 머뭇머뭇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이제는 진정 주워 담을 수도 없다. 기왕 까발려진 마당, 은수는 이참에 이 대리와의 결의를 공고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편 내 편 따질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이 한 명이라도 생긴다면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훨씬 수월해질 거란 계산이었다.
“이 대리.”
그게 이 대리 같은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장땡인 거고.
“…….”
은수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이 대리 쪽으로 몸을 들이댔다.
그녀의 도발적인 접근에 흠칫한 그가 몸을 슬슬 뒤로 뺐다.
“……왜 그러십니까?”
그런데 어째 이어지는 말에는 맥락이 없었다.
“여기…… 되에게 비싼 거, 알죠.”
갑자기 웬 가격 타령? 설마 밥값을 나눠 내자는 얘기는 아니겠지.
한껏 놀라 있던 그는 은수의 뜬금없는 말에 다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예에.”
그러자 그녀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걸렸다. 그 웃음에서 어쩐지 전략가의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실은, 나 누구한테 이렇게 거창한 저녁 사는 거 처음이거든요.”
“…….”
“안 그래도 최근에 고마운 일 있었으니까 한번 대접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거 이제 종종 저녁도 같이 먹고 해요. 현재 씨랑 같이. 어때요?”
그러고 보니 회식을 제외하면 그녀와 이런 사적인 자리를 갖는 건 처음이었다. 점심때야 늘 우르르 몰려다니니 아무 느낌이 없었다 치지만.
워낙 사생활이 베일에 싸여 있던 팀장이라 평소엔 뭘 하고 다니는지도 몰랐다. 휴일엔 그저 집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녀가 이런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있을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저야, 뭐…… 당연히 좋죠.”
“그래요? 잘됐네.”
“그런데 이 이야기…… 혹시 다른 사람도 알고 있습니까?”
은수에게 물은 것이었지만, 대답은 현재에게서 나왔다.
“아뇨. 이 대리님이 처음입니다. 아직 아무도 몰라요.”
‘처음’이라는 말에는 상당한 무게가 있었다.
엉겁결에 칼자루를 손에 쥐게 된 이 대리는 어지러워진 머리를 문질렀다. 궁금증 하나를 풀게 된 거긴 한데,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어쨌든 이런 밥을 공짜로 사 주겠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
은수의 집요한 시선이 이 대리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폈다.
표정으로 봐선 잘 넘어오고 있는 것 같은데.
노련한 그녀는 이제 슬슬 쐐기를 박을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내가 참 이 대리 많이 믿고 있어요. 의지하고 있구요. 그것도 알고 있죠?”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
“그, 그럼요. 저도 팀장님 많이 믿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더 말할 것도 없네요.”
어찌나 활짝 웃는지, 그녀의 광대가 볼록 튀어나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우린 이제부터 한 배를 탄 거예요.”
……갑자기 웬 배?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 대리가 눈을 끔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