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44. 내 사과를 받아 주세요 (2)
아주 당연하다는 말투로, 현재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꽃이죠.”
누가 꽃인 걸 모르나. 나도 눈 있고, 코도 있다고. 차 안에 장미 향기가 아주 진동을 하는구만.
은수의 얼굴이 새치름해졌다.
“아니, 나도 꽃인 건 아는데, 갑자기 웬 꽃이냐구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네.”
“무슨 날인데요?”
은수의 집 앞을 벗어나 대로변으로 핸들을 꺾으며 현재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첫 데이트요.”
첫 데이트?
어떤 행동을 하나의 단어로 규정 짓는 것은 이래서 위험한 것이다. 은수의 귓불과 뺨이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아니, 이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누구 맘대로 첫 데이트예요!”
그러나 현재는 아랑곳 않는 얼굴로 대꾸했다.
“데이트 아니에요? 은수 씨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했잖아요.”
“무, 무슨……!”
아주, 혼자 착각을 제대로 하고 계시는구만. 난 순전히 사과의 의미로 청한 거였다고!
물론, 다시 그에게 영화를 보자고 말한 건 그녀가 맞았다. 그리고 오늘, 데이트 나가는 것처럼 약간 들뜬 기분으로 나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애초 약속이 지켜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순간 억울해진 은수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현재를 향해 다짐하듯 쏘아붙였다.
“현재 씨 뭔가 잊고 있나 본데, 우린 그냥 못 봤던 영화를 보러 가는 것뿐이에요. 그것도 현재 씨가 먼저 말했던 거구요!”
“…….”
“오늘은…… 내가 저번에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긴 하겠지만, 암튼 데이트 같은 건 절대! 아니에요. 알겠어요?”
“…….”
발 빠른 은수의 정정에도 현재는 빙긋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저게 더 맘에 안 들어.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약이 올랐다.
“……왜 웃어요?”
“좋아서요.”
게다가 저런 식으로 대답해서 사람 말도 안 나오게 만들고.
“허, 진짜…….”
어이없어 하는 은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속없이 웃기만 하는 현재의 얼굴에선 형용하기 힘든 기쁨이 마구 샘솟았다.
평소엔 매끈하게 쏙 들어가 있던 광대가 한껏 튀어나와 승천할 지경이었다.
“실은, 오늘 로즈데이라고 하길래 지금까지 꽃을 준 적은 없는 것 같아서 한번 사 봤어요.”
“……로즈……데이요?”
그런 기념일도 있었나. 별게 다 있네.
윗입술을 아래로 쑥 밀어 넣은 은수가 꽃다발 안을 살폈다. 그런데 익숙한 빨간 장미는 온 데 간 데 없고, 온통 하얀 장미와 안개꽃만 가득했다.
“근데, 빨간 장미가 아니네요?”
“아.”
전방을 주시하다 말고 꽃다발을 힐끔 들여다본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빨간 장미는 너무 뻔하잖아요. 하얀 장미가 무난하면서 예쁜 것 같았어요. 의미도 맘에 들고.”
“의미? 의미가 뭔데요?”
“인터넷에 쳐 봐요.”
하여튼 인터넷 참 좋아해. 그냥 좀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김빠진 은수가 쳇, 하는 소리를 냈다.
“귀찮은데 그냥 말해 주면 안 돼요?”
“비밀이에요. 색깔별로 다 다른 의미가 있으니까 한번 찾아봐요.”
“……좀 알려 주지.”
치사 빤스야, 진짜.
굳이 찾아보라는 말에 구시렁대면서도 코는 절로 꽃다발을 파고들었다.
독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향긋한 냄새. 머리가 절로 어질어질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너무나 좋은 향기인 건 분명했지만, 차 안이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멀미가 나려는 모양이었다.
“…….”
어느새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나 보다.
그걸 또 금세 캐치한 현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요? 별로예요?”
“아, 아니요. 멀미가 좀 나는 것 같아서. 냄새는 좋아요.”
“멀미 나요? 문 좀 열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임신하고 나서부터는 만날 뱃멀미하는 느낌이 들곤 해요. 걱정할 거 없어요.”
“……괜히 샀나.”
으유, 내가 또 이럴 줄 알았지. 무슨 말을 못 해.
놀라울 정도로 어른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그녀의 눈치 하나는 끝장나게 신경 쓰는 남자였다.
은수는 그가 혹시나 실망할까, 얼른 꽃다발을 들어 올리며 향기를 들이마셨다.
“무슨 소리예요! 으음, 좋기만 한데. 꽃 선물 진짜 오랜만에 받아 본다. 고마워요.”
“……뭘요. 그럼 다행이고요.”
좀 오버해서 말한 감은 있지만 다행히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안심한 것 같았다. 시무룩하던 얼굴이 다시금 밝아진 걸 보면.
어쩐지 앞으로 애를 둘 키울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현재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가 픽 웃었다.
“근데, 현재 씨 오늘 볼 영화 내용 대충 알아요?”
“조금요. 엄청 기본적인 것만.”
“난 아예 안 봤는데.”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다 알고 보면 재미없잖아요.”
“그쵸.”
“근데 저번에도 말했듯이, 뒤에 가면 좀 슬픈 부분이 있대요. 다른 사람들 후기 보니까 손수건 다 적시고, 휴지 반 통 쓰고 그랬다던데.”
“괜찮아요. 난 영화 보면서 한 번도 운 적 없어요.”
“……정말요?”
현재가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을 봤나, 하는 얼굴로 은수를 쳐다보았다.
“단 한 번도요? 타이타닉 같은 영화 봐도?”
반면 은수는 방금 전 현재처럼 당연한 걸 뭘 물어보냐는 얼굴이었다.
“네. 타이타닉이 슬픈 영화예요?”
“슬프죠, 당연히. 망망대해에서 다 얼어 죽잖아요. 남녀 주인공도 결국엔 못 이루어지고.”
“그런가. 감동적이긴 한데, 울 정도로 슬프진 않았어요. 짠하긴 했죠.”
심드렁한 은수의 말투에, 현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확실히 은수 씨는 좀…… 뭔가 특이해요.”
“참나, 타이타닉 보고 안 슬프면 특이한 거예요? 그냥 사람마다 다른 거지.”
“그건 맞는데…… 하여튼 좀 특이해요. 특별하다고 해야 할까.”
갑작스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사실은, 지훈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넌 코드가 좀 이상한 것 같아.’
특이한 것도 아니고, 이상하다니.
그땐 저를 약간 소시오패스 취급이라도 하는 것 같아 빈정이 좀 상했었는데, 지금 현재의 말은 그와 맥락이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특이하다’를 굳이 ‘특별하다’로 고쳐 주는, 그런 작은 것에서도 그의 배려심이 듬뿍 느껴져서일까. 오히려 예쁘게 말해 주는 그가 고마울 정도였다.
하지만 은수는 그걸 굳이 그에게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말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아무튼 그럼, 오늘 은수 씨 울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죠?”
“그럼요. 괜한 걱정은. 난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다고 몇 번 말해요.”
은수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 * *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오산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두 시간 남짓 뒤에 깨닫고 말았다.
“……은수 씨?”
“…….”
“……은수 씨 울어요?”
어쩐지, 어디선가 히끅거리는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오더라니.
이 영화를 보자고 먼저 제안했던 건 현재였지만, 그는 막상 영화가 시작되고 나자 옆에 앉은 은수를 의식하느라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영화 볼 땐 아무것도 안 먹는다는 은수 때문에, 홀로 애꿎은 팝콘을 집어 먹으며 힐끔힐끔 그녀를 훔쳐볼 뿐이었다. 그렇기에 은수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영화 중반부부터 언뜻 물기가 그녀의 얼굴에 비치는 듯했지만, 현재는 제가 잘못 본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절정부터였다.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더니, 영화가 끝난 지금은 급기야 눈물을 아주 펑펑 쏟아 내고 있었다.
이제껏 영화 보고 울어 본 적이 없다던, 절대로 안 울 거라던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훌쩍이는 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에게서 웃음이 비싯 흘러나왔다.
“안 운다면서요? 어떻게 된 거예요.”
“…….”
“그만 울어요. 화장 다 번지겠다.”
“……히끅, 이거, 워터 프루프라, 흑, 괜찮아요…….”
또 이 와중에도 자기 할 말은 다하는 게 너무나 민은수답고.
결국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서야 그녀는 울음을 겨우 멈추었고, 현재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은수의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이제 다 울었어요?”
“……네.”
“그럼 우리 얼른 나가요. 이제 여기 청소하려는 것 같은데.”
은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현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천천히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확실히 그녀의 말처럼 워터 프루프의 위력은 대단했다. 휴지로 마구 닦아 대는 통에 피부 화장은 좀 지워져 있었지만 눈 화장이나 입술 등은 그대로였다.
특히 입술은 울면서 깨물어서 그런지 오히려 더 붉어진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그렇게 보기 흉한 모습은 아니었다. 되레 예뻤다. 물론 현재가 보기에는.
그럼에도 어두운 곳에 있다 갑작스레 밝은 곳에 나온 탓에 얼굴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그녀는 무척 민망해하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슬펐어요?”
팝콘이 반쯤 남아 있는 통과 콜라 컵을 버리며 현재가 물었다.
“그게…….”
현재의 질문에 그녀는 잠깐 주저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에게서 생각보다 긴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후반쯤에…… 여자 주인공이 유산할 뻔하는 장면 나오잖아요. 도와줄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아기는 떠나려고 하는 것 같고…… 너무너무 위태롭고, 세상에 남겨진 사람이 오직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그 기분을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
“그리고 나 첨 임신한 거 알았을 때 기분도 좀 생각나고……. 그냥 눈물이 막 나더라구요…….”
요즈음 씩씩하게만 보이던 그녀가 한순간에 안쓰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약하기만 한 여자였다. 단단한 겉껍질 안에 가려진 연약한 마음. 혼자서 임신 사실을 알고 난 뒤, 나에게 미처 말도 못 했던 그 시절들을…… 이 여자는 대체 어떻게 견뎠던 걸까.
은수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현재의 눈빛이 짙어졌다.
“…….”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힘들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
괜한 이야기를 꺼내 그녀를 더 울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현재는 일부러 놀리듯이, 그녀의 촉촉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까 은수 씨, 울보네요.”
“……그런 거 아니에요!”
“맞는데 뭘 아니에요.”
어찌 보면 참 다루기 쉬운 사람. 한참을 울던 사람이 이제는 금방 약이 올라 씩씩거렸다.
“오늘만 그런 거예요! 나 지금까지 한 번도 운 적 없다니까요!”
“그럼 오늘이 첫 번째인 거네요. 난 그걸 다 구경했고.”
“……씨.”
울어 버린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붉었다.
그녀가 더 이상 대꾸도 못 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려는데, 현재가 그런 그녀의 손을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처럼, 그녀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 힘껏 끌어당겼다.
그에게 휙 딸려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컷 울었으니까 이제 저녁 먹으러 가요.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
그냥 영화가 슬퍼서 운 거지,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남의 속도 모르고 놀려 댄 건 별로였지만, 그가 계속 달래 주는 바람에 기분은 평소와 같아진 상태였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은수가 현재에게 맞춰 발을 떼려던 바로 그때였다.
“어? 팀장님?”
너무나도 익숙한 호칭과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은수는 저도 모르게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휘리릭 돌아보았다.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무시하고 갔어야 했는데!
목소리의 주인공은…….
“팀장님이 여기까진 웬일로…….”
애증의 이 대리였다.
수습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
반가운 얼굴을 한 채 은수를 향해 다가오던 이 대리의 눈길이 옆에 있는 현재에게 바로 닿았다. 비록 사복을 입어 평소와 다르다고 해서, 그가 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는 도현재를 못 알아볼 확률은 없었다.
“……현재 씨?”
그리고 물론, 눈치 빠른 그가 두 사람의 사이를 예사로운 사이로 여길 리도 없었고.
은수는 순간 언젠가 터질 것 같았던 대재앙이 마침내 도래했음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