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 내 사과를 받아 주세요 (1)
며칠 뒤, 현재는 예상대로 징계를 받지 않았다. 물론 가벼운 경고 정도는 떨어졌다. 아무 처분 않는 대신 앞으로는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라며. 말투는 엄했지만 실상 타격은 전혀 없는 판결이었다.
평소에는 얌전하다가도 간혹 예고 없이 럭비공으로 돌변하고 마는 그였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또 사고를 칠 수는 없을 것이다. 덕분에 은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애석한 것은, 한 팀장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요즘처럼 한시가 바쁜 시점에, 한 팀장 같은 거물급의 사원을 단숨에 해고시켜 버릴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랬다면 인력난에 시달리는 회사 입장에서는 눈앞에 갑자기 커다란 바위 하나가 뚝 떨어진 느낌이었을 테고, 뒷감당은 자연히 그녀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이 일을 계기로 한 팀장이 전처럼 활개 치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겉으로 보기엔 둔해 보여도 그는 상당히 약삭빠른 사람이다. 이번은 어찌어찌 넘어갔다 치지만, 언제든 수틀리기라도 하면 그녀가 그 일을 대대적으로 공론화시킬 수 있다는 걸 그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뭐, 이 정도면 꽤 만족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지. 무엇보다도 그 남자가 아무 일 없이 회사에 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걸로 된 거라는…… 다소 그녀답지 않은 생각까지 했다.
아무리 불합리하다 한들 모든 것이 뜻대로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눈을 감고 현실과 타협하는 일은 잔뼈 굵은 사회인인 은수에겐 아주 익숙했다.
이러저러해서, 걱정스러웠던 고비 하나는 무사히 잘 넘겼다.
하지만 한 팀장이고 뭐고, 정작 지금 그녀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
딸깍, 딸깍.
클릭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더니 모니터를 쳐다보던 은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녀는 지금 다름 아닌, 영화 예매를 시도하는 중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시간에 여유를 꽤 두고 예매를 시도한 터라 자리는 많았지만, 어째 뒷자리로 갈수록 좌석 색깔도 다르고 가격도 천 원 정도씩 차이가 났다. 거기다 스위트박스니 비트박스니 뭐니 하는 자리들도 있었다.
이게 다 뭐람. 영화관 좌석들이 원래 이랬던가?
까마득한 예전 기억을 떠올려 보던 은수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비행기도 아니고, 이런 건 대체 누가 만들어 놓은 거야.’
마지막으로 영화관을 가 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실정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통 짚이지 않으니 아마도 1년은 넘었을 것이다.
자고로 영화는 집에서 IPTV로 보는 것이 제맛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따뜻하게, 시원하게 내 맘대로 온도 조절 잘되고, 뒹굴뒹굴 누워서 볼 수도 있고, 내킬 때마다 반복해서 볼 수도 있으며,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방해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으니까. 시끄럽고 복잡한 곳을 선호하지 않는 은수로서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렇다 보니 지훈과 사귈 때에도 영화관 데이트는 거의 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가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 영화관을 간다 해도 예매나 팝콘 구매처럼 귀찮은 것들은 늘 일행에게 맡겼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런 걸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건 매우 당연했다.
쥐뿔 아는 것도 없으면서 열심히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는 자신이, 은수는 영 어설프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에게 사과 차원에서 함께 보자고 한 영화였고, 먼저 예매해 놓는 게 응당 도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재에게 맡겼다면 알아서 다 준비해 주었을 테니 몸은 편했겠지만, 마음은 이쪽이 더 편했다. 자꾸만 그에게 자잘한 책임 같은 걸 지우기도 싫고.
그나저나, 영화 가격은 또 언제 이렇게들 올랐는지. 하여간 어디든 이놈의 독과점과 담합이 문제라니까. 무슨 영화 한 편 가격이…….
무심결에 그녀의 입술이 쭈욱 튀어나왔다.
“날강도들, 진짜…….”
“누가 날강돕니까?”
“엄마!”
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책상 앞에서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이는 역시나, 이 대리였다.
“어후, 놀랐잖아요.”
“하하, 죄송합니다. 노크했는데 못 들으셨어요?”
“……네.”
내가 어지간히 집중하고 있긴 했구나. 노크 소리도 눈치채지 못했던 걸 보면.
서둘러 영화관 홈페이지 창을 내리고는 멋쩍음을 숨기기 위해 괜히 머리를 쓸어내리며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다른 건 아니고, 어제 말씀하신 신제품 프레젠테이션 초고 컨펌 받으려고요. 메일로도 보내 드렸지만 이쪽이 더 빠를 것 같아서.”
“아, 여기 두세요. 좀 이따 첨삭해서 줄게요.”
“예.”
용건은 끝난 것 같은데, 웬일인지 이 대리는 곧장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오히려 별안간 상체를 숙이더니 뭔가를 탐색하는 듯한 눈길로 은수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피기까지 했다.
당황한 은수는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왜요. 왜 그렇게 봐요?”
다시 곧은 자세로 돌아온 이 대리가 슬며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 무슨 좋은 일 있으시죠.”
좋은 일? 은수의 얼굴에 당장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뇨? 왜요?”
이 대리는 여전히 예의 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냥, 계속 웃고 계시는 게 기분 좋아 보이셔서요.”
어머, 내가 그랬나?
은수는 황급히 손등을 뺨에 가져가 살짝 문지르며 더듬더듬 대꾸했다.
“아, 아니 뭐…… 기분이야 늘 좋죠.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어요.”
혹시나 뭔가를 더 물어볼까, 은수는 긴장한 채로 이 대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은수의 말에 별로 의심스러운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그런 성향이 약간 있기는 했지만, 요 근래 이 대리는 유달리 은수를 챙겼다. 아마도 한 팀장 사건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대리가 늦게라도 일이 해결되는 데 매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은수가 전면으로 나서기 전까지는 그도 사실을 선뜻 밝히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기에, 그에 대한 나름의 부채감이 있는 모양이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그를 증명하듯, 모니터와 저를 번갈아 보며 어색하게 웃고 있는 은수를 향해 이 대리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다행입니다. 한 팀장님 일, 별로 신경 안 쓰시는 것 같아서.”
“…….”
“요즘 뭔가…… 예전보다 많이 여유로워지신 느낌이에요. 아이를 가지셔서 그런가, 얼굴도 많이 좋아지시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은 은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요?”
“네. 예전엔 가끔 너무 예민하신 것 같아서 걱정될 때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
“이제 입덧도 안 하시니까 좀 이따 점심 드시러 같이 가요. 비빔밥집 맛있는 데 있답니다.”
“……네, 그래요.”
이 대리가 나가면서 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닫히고, 그 모양을 보며 은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방금 전 이 대리의 말이 왠지 모르게 귓가에서 맴맴 도는 탓이었다. 아이를 가져서인지 예전보다 많이 여유로워진 것 같다고 했던 그 말.
그러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어쩐지, 자신이 정말로 처녀 보살 비스무리하게 되어 가고 있는 듯도 하니까. 예전 같았으면 성질부터 내고 봤을 일들도 너그럽게 넘기게 되고, 무엇보다 이해심과 공감 능력이 엄청나게 높아진 느낌이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최근의 키스 사건이 그것이었다.
예전의 그녀 같았으면, 술이 깬 그에게 어젯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냐며 따지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남자라고 맘이 편할 리 없단 생각에 오히려 꿀물과 해장국 등은 챙겨 먹었느냐며 걱정이 담긴 연락을 남겼을 뿐이었다.
어쩌면 무턱대고 덤벼들던 아이 아빠를 한 대 치지 않은 것부터가, 그녀가 많이 발전했음을 증명해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단순히 아이를 가져서일까. 아이가 무슨 성격 개조를 하게 만드는 것도 아닐 텐데.
“…….”
은수는 문득 근무 시간인 것도 잊은 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온갖 사람들이 섞여 있는 메신저 친구 목록에서 무의식적으로 현재의 이름을 찾았다.
[도현재씨]
군더더기 없는 그의 프로필에는 증명사진 한 장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세나 멋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게 참 도현재스럽다고 해야 할까.
남자의 이기적인 외모는 한낱 증명사진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동그랗게 뜬 프로필 사진 위로 나와 있는 상태 메시지.
[Beloved]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단어에 은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이 정도 영단어쯤이야 당연히 뜻을 알고 있었다. 대단히 사랑하는, 혹은 대단히 사랑하는 사람. 즉, 연인을 뜻하기도 하고.
아마도 이는 필시 그녀의 뱃속에서 숨 쉬고 있는 아이를 뜻하는 말일 것이었다. 아기라면 죽고 못 사는 그니까.
아니면, 아기와 은수 둘 다를 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단히 사랑하는 것까진 아니어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못 박았었고, 또 지금 그에게 그녀가 중요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인가……. 내가 헛다리를 짚은 걸 수도…….’
생각에 빠진 그녀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근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신성한 근무 시간에.’
정신 좀 차리자. 이것도 얼른 끝내고.
요즘은 걸핏하면 생각이 다른 데 가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고개를 흔든 그녀가 다시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방금 전까지 영화관의 독과점 행태를 욕하던 사람은 어디로 가고, 과감히 뒷자리 정 가운데를 지정한 그녀는 속전속결로 결제까지 끝마쳤다.
조금 비싸긴 해도 이왕 준비하기로 한 거, 이런 데 돈을 아끼기는 싫었다. 기껏해야 몇 푼 한다고.
그가 보고 싶다던 영화의 제목은 ‘아기와 나’였다.
무척 직관적인 제목이어서 좋긴 하지만, 내용이 너무 빤히 보이는 영화라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아, 진짜 돈 아까울 것 같은데.
“……재미없으면 물어내라 그래야지.”
그럼. 내가 누구 땜에 이러고 있는데. 이것도 해 보니까 별거 아니네.
예매가 완료되었다는 최종 메시지를 보며, 은수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 * *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새 그와 영화를 보는 날이 되어 있었다.
은수는 집으로 데리러 오겠다는 그를 친히 맞아 주기 위해 먼저 밖에 나와 기다렸다.
그런데 마침내 조수석에 올라탄 그녀의 품에 다짜고짜 안겨진 것은, 다소 뜻밖의 것이었다.
“……이게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