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42화 (42/128)

# 42

42. 뿌린 대로 거두다 (2)

한 팀장의 얼굴에서 그나마 있던 미소가 싹 사라지더니 망연자실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 내가 정말 그러려고 한 건 아니고…… 아무래도 술에 취해서 말이 헛나왔…….”

“…….”

“서 팀장! 이 대리! 얘기 좀 해 줘. 내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 어? 응?”

한 팀장이 간절하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지훈과 이 대리는 무심히 쳐다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이쪽은 볼일 다 봤고.’

속으로 그를 맘껏 비웃은 은수는 아예 김 이사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결국 판단은 이사님께서 하시겠지만, 현재 씨는 무고한 사람을 때린 게 아닙니다. 공격을 방어하려다 싸움에 휘말렸지만, 결정적인 원인 제공은 분명 한 팀장님께서 하셨고요.”

“…….”

“이 일이 단순히 현재 씨의 징계로만 마무리된다면 전 다른 여직원들과 함께 한 팀장님의 해고를 위해 발 벗고 나설 겁니다. 우리 회사, 외부에 마케팅 할 때 ‘여자를 위하는 기업’이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나가지 않습니까? 그건 대체 다 뭔가요.”

불꽃같은 기세로 청산유수처럼 말을 내뱉던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솔직히 말해 괘씸한 것은 한 팀장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한 번도 말리지 않고 오히려 동조하기나 했던 방관자들.

“한 팀장님도 한 팀장님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다른 남직원들에 대해서도 충격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상급자라는 것에 겁이 나서 누구 하나 나서지 않을 때, 신입 사원이라는 자신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기 위해 용기 있게 나선 현재 씨의 행동은…… 오히려 칭찬해야 마땅한 일 아닙니까?”

“…….”

“징계는커녕 상을 주어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는데요.”

은수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김 이사가 마침내 그녀의 말을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분위기라면 현재의 구제는 확실했다.

‘됐다!’

비로소 원하는 바를 얻어 냈음을 확신한 은수는 속으로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위선적이고 불합리한 일들이 계속된다면 저는 더 이상 이곳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

“절대로요.”

라스트 팡이었다.

* * *

조금 전, 결정적인 구원 투수 역할을 했던 휴대폰은 어느새 이 대리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었다.

“고마워요, 이 대리. 다 이 대리 덕분이에요.”

은수가 이 대리를 향해 활짝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은수에게 현재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던 이 대리는 어찌할까 고민하던 은수에게 자신이 틈틈이 녹음했던 파일들이 증거로 있음을 털어놓았다. 파일명 ‘025’란 스물다섯 번째 파일을 일컫는 것이었고, 그것은 술자리에서 그만큼 많은 뒷담화가 오갔다는 방증이었다.

징계위원회에서 일을 벌이겠다는 은수에게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인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다 말씀 잘하시는 팀장님 덕분이죠. 역시 멋있으십니다!”

“멋있긴요. 암튼, 나중에 현재 씨랑 저녁이나 한번 먹어요. 내가 살게요.”

“예. 그럼 저는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얼른 오십시오.”

기분 좋게 인사한 이 대리가 먼저 자리를 떴다.

은수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후련한 듯 숨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은수야, 고생했다.”

“…….”

“이런 식으로 밝히기 쉽지 않았을 텐데.”

목소리 하나로 그녀를 돌아서게 만든 장본인은 역시나 지훈이었다.

은수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제 성격 아시잖아요. 불의를 보면 그냥 넘어가기 힘든 거.”

“…….”

“별거 아니었어요.”

방금 전, 한 팀장을 거세게 몰아붙이던 그녀의 모습은 그로 하여금 입사 초기의 풋풋한 은수를 떠올리게 했다. 딴 여자들과는 다른, 당찬 매력으로 저를 설레게 만들던 그녀.

언제나 민은수는 참 멋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그런 그녀를 참 많이 좋아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괜스레 웃으며 친근하게 말을 붙여 보려는데, 별안간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서 팀장님.”

“…….”

“제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하세요?”

“……어떤?”

은수의 눈빛은 그가 기억하는, 그 어느 때의 그것보다도 더 매서웠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남직원들이 더 충격이다. 그 대목이요.”

“…….”

“다 알고 계셨죠. 그런데도 지금까지 아무 언질 없으셨구요.”

“…….”

“쉴드 쳐 주는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실망이네요. 서 팀장님 정도면 같이 싸우진 못해도 주의 정도는 줄 수 있으셨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도 사랑했던 사이니까, 많은 걸 공유한 사이니까, 최소한 서지훈만은 다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남이 저를 두고 뭐라고 떠들어 대든 제 체면 지키기에만 급급했을 그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사귀었던 지난 3년 동안, 그는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을 모른 척 넘겨 왔을까.

언제 한 팀장의 편을 들어 주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 은수는 그에게 남아 있던 좋은 감정마저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

“제가 요즘 들어서 ‘정말 잘했다’라고 생각하게 된 일이 몇 가지 있는데요. 오늘, 본의 아니게 또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네요.”

“…….”

“정말, 잘한 일 같아요.”

……당신과 헤어져서.

이젠 더 이상 말을 섞기도 싫었다.

눈빛으로 말을 마친 뒤 매몰차게 돌아선 그녀는 걸어가다 말고 뭔가 잊고 있었다는 듯 잠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아참,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는데.”

“…….”

“회사에선 존댓말 좀 써 주세요. 그새 까먹으신 것 같아서.”

머리도 좋은 사람이 매번 까먹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웃어 보인 그녀는 다시금 기운차게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 * *

“왜…… 사실대로 얘기 안 했어요?”

“…….”

“내가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답도 안 해 주고.”

난간에 팔을 기댄 은수의 얼굴이 불퉁했다. 그러나 현재는 짐짓 웃기만 했다.

“몰라서 묻는 거 아니죠.”

“…….”

“은수 씨가 상처받을까 봐 그랬어요. 굳이 괜한 거 알게 하기 싫어서.”

“…….”

“어차피 나만 징계 받으면 끝날 일이니까…….”

은수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내 성격에 퍽이나 가만히 있었겠다.

“현재 씨는 안 그런 것 같으면서 은근히 바보 같아요.”

“…….”

“난 이미 임신을 공표한 사람이에요. 그 정도 뒷담화도 예상 못 했을까 봐요?”

“…….”

“나, 갖은 풍파와 고난을 이겨 내고 여기까지 왔어요. 더한 일들을 수두룩하게 겪어서 그 정도쯤은 아무 타격도 없다구요.”

“…….”

“설마, 날 그 정도로 얕보는 건 아니죠?”

현재는 말없이 웃으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덩달아 웃던 은수는 잠시 웃음기를 거두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뭐가요?”

“그냥, 다.”

고마운 걸로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하지만 굳이 꼽자면…….

“자기 일처럼 그렇게 나서 줘서. 또, 나 상처받을까 봐 혼자서 그렇게 떠안으려고 한 것도…….”

“…….”

“그리고…….”

“…….”

“한 팀장, 그렇게 흠씬 두들겨 패 준 것도.”

“……예?”

은수가 그에게 보란 듯 손의 관절을 우두둑 꺾는 흉내를 냈다.

“사실은 한번 손봐주고 싶었거든요. 재수탱이, 진짜.”

“…….”

“지금껏 기회가 없었는데, 현재 씨가 나 대신 패 줬으니까…… 고맙죠.”

말은 이렇게 해도 그녀는 막상 한 팀장에게 손도 대지 못했을 것임을 알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은수의 너스레에 그가 웃고 있던 사이, 그녀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거짓말한 거……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괜찮아요.”

그녀의 거짓말쯤이야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런 상황에 그런 걸로 뒤끝을 부릴 생각도 없었고.

그러나 그런 그와 달리 은수는 꽤나 오래, 아직까지도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둔 듯했다. 미안하기는 엄청 많이 미안했던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근데 현재 씨도 나한테 뭐 숨기거나…… 거짓말 안 했으면 좋겠어요.”

“…….”

“나, 그 정도로 나약하지 않아요. 이래봬도 현재 씨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고요. 현재 씨만큼 강했음 강했지. 오늘 한 팀장 나한테 깨지는 거 봤죠?”

확실히, 은수는 그의 생각보다 더욱 강한 여자였다.

그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징계를 피하게 해 줄 줄도 몰랐거니와, 한 팀장을 그런 식으로 위협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일들을 수도 없이 겪으며 저도 모르게 강해졌을 그녀가 안쓰러워지기도 했다.

“그러게요. 나야말로 오늘 고마웠어요. 팀장님 꽤 무섭더라고요.”

현재의 말에, 은수는 뿌듯하게 웃었다.

“그쵸? 그러니까 현재 씨도 약속해요. 앞으론 그런 거 숨기지 않기로.”

“…….”

“자.”

은수가 현재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수줍게 내밀었다.

언젠가 저가 그녀에게 요구했었던 것과 같은 약속.

잠시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쳐다보던 현재는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은수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손바닥 펴 봐요.”

“……네?”

“빨리요.”

현재가 의아해하며 손바닥을 펴자 나름 날렵한 그녀의 손톱 끝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그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사인.”

“…….”

그러고는 그 위로 날씬한 손바닥을 미끄러뜨리고,

“복사.”

“…….”

화룡점정으로 두 손바닥 사이에 현재의 손을 넣어 쭉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코팅.”

그러고서는 배시시, 아이처럼 웃는다.

현재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약속을 할 때면 으레 했던 놀이. 옛날 옛적에나 유행했던,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현재 씨.”

“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요?”

“…….”

“시간 있으면…….”

“…….”

“나랑, 영화나 좀 볼래요?”

……이 여자가 하는 짓은 이렇게 다, 대책 없이 예쁘기만 한지.

“싫어요?”

“…….”

“싫으면 어쩔 수 없…….”

“아뇨. 봐요, 저번에 못 본 거.”

“…….”

“같이 봐요, 나랑.”

그러면서 또, 웃는 얼굴은 또 왜 이리 사랑스러운 건지.

정말로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요.”

“…….”

이렇게 하루하루 좋아지기만 하니까 자꾸만 욕심이 날 수밖에.

현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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